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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33화 (33/201)

<33화>

훼방꾼들 (1)

세계 히어로 협회, 통칭 WHA.

뉴욕에 있는 이 기구는 히어로 사회에 중요한 안건이 발생했을 때 히어로 명부에 등록된 인물을 소집하거나 초청할 수 있고 협회의 부름을 받은 당사자 또한 이를 명예롭게 여긴다.

* * *

우리는 아카데미 전용기를 타고 협회 행사가 진행 중인 건물에 와 있다.

“WHA는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교직원분들과 학생 여러분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 환영합니다. 와줘, 와줘서 도맙, 고맙습니다!”

휴머노이드와 안드로이드에 경계에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의 로봇이 걸어와 어색한 발음으로 각국의 언어를 동시에 쏟아냈다.

“와하하! 환영한다! 응? 이게 누구야.”

로봇 옆으로 웬만한 강화형 히어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듯한 우람한 풍채와 문신이 새겨진 두피를 가진 남자가 프로스트 교수에게 인사를 건넨다.

“2년 만인가. 헤드라이트.”

큭.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이들이 반, 터트린 이들이 반.

“맘껏 웃어도 좋다! 모두 유쾌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은 히어로명이니까!”

“거짓말이다. 저 녀석의 히어로명은 풍성할 때 지었다. 히어로는 빛이고 자신이 그들의 치프가 되겠다고 했었지.”

“그때나 지금이나 네놈은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구나. 썩을 프로스트!”

“인사해라. 저래 봬도 협회장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냐!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맘껏 행사를 즐겨라! 교수님들은 저와 같이 가십시다. 자문을 구할 게 에베레스트처럼 쌓여있어서 말입니다. 으하하!”

프로스트가 가기 전에 나와 스위프트를 불러서는.

“1학년은 너희가 챙겨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 복귀하십니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묻는 스위프트.

“음…, 올해는 회의가 길어질 듯해.”

그러며 프로스트의 시선이 행사장 귀퉁이에 붙어 있는 포스트로 향한다.

[빌런의 인권, 이대로 괜찮은가.]

내가 이때는 이쪽에 관심을 크게 두고 있지 않아서 잘 기억이 안 난다만, 한동안 저 주제로 시끄러웠던 것 같기는 하다.

‘리쳇, 저거 관련해서 정보 수집 좀 해봐.’

-이미 하는 중.

역시 리쳇.

그렇게 교수진과 학생들이 분리되었고 아까 그 반쪽짜리 휴머노이드들이 우리를 객실로 안내했다.

“왜 또 너야!”

방은 2인 1실이었고 룸메이트는 안토니오. 그야 동성에다 같은 교수의 초대장을 들고 왔으니 당연한 결과.

녀석의 투정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뉴욕의 밤거리를 구경할 생각으로 호텔 밖으로 나왔다.

어?

여성용 슈트를 입은 마가렛과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퀸이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앗.”

둘도 나를 발견하고 이쪽을 본다. 당황하는 퀸과 그런 퀸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마가렛.

뭐야.

“쥐 잡아먹었냐.”

유독 빨간 립스틱을 지적하자 눈꼬리를 치켜올리는 퀸. 무어라 하려 하기에 얼른 말을 이었다.

“예쁘네.”

“네?”

“옷 말야. 디자이너가 고생했겠어. 맞춤 같은데.”

“…후, 마가렛. 그냥 가자.”

쿡쿡.

“교수, 우리 공주님 너무 놀리지 마. 나야 재밌긴 하지만. 앗, 같이 가!”

호텔 밖으로 나가는 둘. 마침 나도 바깥 구경을 하려던 참이라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가니 정문 앞에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스포츠카가 대기하고 있었고 퀸이 계단을 내려오기가 무섭게 안에서 덩치 큰 남자가 튀어나와 녀석을 에스코트한다.

‘맞선이었나?’

잠깐 걸음을 멈추고 퀸이 타는 모습을 보고 있자 마가렛과 눈이 마주쳤다.

“나 잠시만, 남교수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내게 재빨리 다가와 종이 한 장을 쥐여주곤 윙크한 뒤, 차에 타는 마가렛.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떠난 뒤 꾸깃꾸깃한 종이를 펴 보자 주소가 적혀 있었고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리쳇이 해당 위치를 찾았다.

-크럼프 인터내셔널 뉴욕.

“거기 호텔 아냐?”

-어, 5성. 참, 농장주. 그거 알아? 인간 여자는 높은 곳에 약해.

“사람은 다 높은 곳에 약해 인마.”

-왜 나한테 화를 낼까아?

“화는 무슨.”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최단 경로는 뽑아놨는데. 어쩔래. 가려면 지금 저 택시 타야 돼.

“내가 저길 왜 가.”

-그래? 그럼 폐기한다?

“…잠깐.”

-빨리 결정해.

“궁금하니까 가는 거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야.”

-그렇겠지.

웃음기 어린 리쳇의 대답을 들으며 무인 택시를 탔고 마가렛이 준 주소를 찍자 최단 경로로 이동해 호텔에 도착했다.

쪽지에는 72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호텔 라운지에 들어와 두리번거리니 단정한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흉터로 가득한 남성이 다가온다.

“무슨 일이신가요?”

“72층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거긴 지금…. 잠시만요. 예, 올라가셔도 좋습니다.”

남자는 귀에 손을 대고 고개를 돌린 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더니 나를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했고, 닫히는 문틈으로 끝까지 웃는 얼굴을 유지한다.

70층까지 직행하는 엘리베이터 안은 나 혼자였고. 나지막이 리쳇에게 물었다.

“들었지?”

-녹음해뒀어.

방금 그 대화를 리쳇이 재생한다.

“아시아계 소년 하나가 거기서 만날 사람이 있답니다.”

“예약자 다 온 거 아니었어? 젠장, 길바닥 출신 새끼들 아니랄까 봐 일 처리 개판이네. 내가 여유 구속포 안 들고 왔으면 어쩔 뻔했어! 후…, 올려보내.”

“예.”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대화다. 다른 건 뭐 업무상 일이라고 칠 수 있겠으나 구속포는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감옥섬에 갇혀 있을 때 입었던 게 구속포의 발전형이다. 한번 착용하면 입 말고는 모든 행동이 차단당하는 옷.

여분을 말하는 걸 보니 나를 포함해 72층 사람들에게 그걸 쓰겠다는 거 같은데. 로비까지 점령한 걸 보면, 호텔 장악은 거의 끝난 모양이다.

“위험한가.”

-위험하지.

단순히 나중에 퀸을 놀릴 만한 에피소드 하나 줍기 위해 온 것뿐인데, 일이 꽤 커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커다란 샹들리에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주변으로 20대 전후의 젊은 남녀들이 짝을 이뤄 춤을 추고 있었다.

-퀸 찾아? 저기.

시야에 핑크빛 하트를 만들어 퀸의 위치를 알리는 리쳇.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이. 이런 게 재밌나.

나는 괜히 헛기침하고 퀸과 그 상대가 앉은 테이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거 근데 나만 옷이 좀 추레한데.’

다들 명품으로 빼입고 있는데 나만 아카데미에서 입던 트레이닝복이다.

“너, 잠깐 이리 와봐.”

기둥 뒤에서 나를 부르는 흰색 셔츠에 빨간 베스트를 입은 여자. 산발된 머리와 짙은 다크써클. 대놓고 풍기는 담배 향에 입술 피어싱까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외관.

“여기 왜 왔어.”

“아는 사람 좀 보러.”

미간을 구긴 여자는 주변 눈치를 보고는 나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간다.

“빨리 나가. 살고 싶으면.”

응?

“미란다! 손님 붙잡고 뭐 하는 거야. 당장 이리 안 와?”

입술을 꽉 깨물고 돌아서선 허리를 깊게 숙이는 여성.

“죄송합니다!”

확실히. 사람은 외형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구나. 저 미란다라는 여자의 의도가 무엇인진 몰라도 초면인 나를 살리려 했음은 분명하다.

-안면 조회 끝났어. 각성자고 이름은 미란다 히긴스, 전직 종군기자. 최고명예훈장도 받았네.

안면 조회는 내 미래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리쳇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기술이다.

‘잠입 중인 건가.’

“손님, 아는 분이 계시면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미란다를 혼내고 다가온 남자의 목소리는 리쳇이 재생한 그 음성이었다. 아마 이 남자가 여기 책임자겠지.

“저기 일행이 있네요.”

하얀 정장에 노란 행커치프. 붉게 물들인 머리카락. 갓 소년티를 벗은 사내를 가리키자 남자는 입가를 움찔하고는 미소를 유지한 채 앞장섰다.

“모시겠습니다.”

테이블 가까이 가니 마가렛이 먼저 나를 눈치채고 입을 가린 채 웃는다. 이어 빨간 머리 놈이 쳐다봤고 마지막으로 퀸이 돌아본다.

“당신이…, 여긴 왜.”

“초대하신 분이 아닌가요? 이런, 제가 실수를.”

“아니요, 제가 초대한 게 맞아요. 여기 앉아. 남교수.”

마가렛이 빠르게 나서자 빨간 머리와 퀸이 우물거리다 입을 다문다.

“그러시군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뭡니까, 당신.”

직원으로 위장한 놈이 떠나자 경계 어린 얼굴로 묻는 빨간 머리.

“음…, 청소부?”

“장난치지 마시고. 윽!”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강하게 찍자 내게 위협적으로 몸을 들이대던 녀석이 놀라 목을 뒤로 뺀다.

“겸사겸사 너희도 좀 구하고. 오, 이 집 스테이크 잘하네.”

옆에서 쿡쿡 웃던 마가렛이 내게 녀석을 소개했다.

“여기는 뉴욕 히어로 아카데미 수석. 프로즌화이트. 알지? 스위프트처럼 갓차일드 중 한 명이야. 협회가 뽑은 올해의 히어로 유망주에도 올랐고.”

“프로즌화이트? 처음 듣는데.”

“여기는 서히아 1학년 남만혁. 학생들 사이에선 프로페서 남이라고 불려.”

“이 불쾌한 남자는 무슨 반입니까. 미스 마가렛.”

“그….”

내 눈치를 보는 마가렛.

“F반.”

핏기 어린 소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먹으며 내가 대신 답하자 구겨진 휴지 같은 얼굴을 한 프로즌화이트가 비웃음을 머금다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지.”

눈으로 내 위아래를 훑는 녀석. 그러고는 퀸에게 시선을 돌린다.

“레이디 그레이스. 혹시 불편하시다면 당장 이 무뢰한을 내쫓겠습니다.”

“아니요. 여기까지 왔잖아요. 식사는 하게 두죠. 불쌍하니까.”

“아아,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까지 고우시군요.”

어우. 얘 멘트 심각하네.

“네가 사는 거냐. 잘 먹을게. 퀸.”

“…흥.”

자꾸 히죽대는 마가렛이 테이블 아래로 내 무릎을 툭 치고는 입 모양으로 말한다.

‘남교수, 남자네?’

그럼 여자겠냐.

‘조심해.’

내가 엉뚱하게 답하자 고개를 기울이는 마가렛.

고스트핸드 교수는 돈이 많은 이들이 모이는 공간일수록 감시하는 눈이 늘어나게 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도 마찬가지일 게 뻔하니 언사에 조심하는 게 좋겠지.

적어도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순간 나와 접촉했던 미란다라는 여자가 배신자로 찍힐 가능성이 있다.

“이것 좀 드시죠.”

메인디쉬로 나온 요리를 덜어 퀸 앞에 내려놓으려는 녀석의 팔을 잡아끌어 내 앞에 가져왔다.

“뭐 하는 짓—”

촤라락! 쾅!

그 순간 불이 꺼졌고 동시에 엘리베이터 쪽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꺄아악!

“지금부터 비명 지를 시간 3초 주마. 그 이후에 입을 여는 새끼들은 죽는다.”

방금 나를 안내한 직원이 소란 속에서 들릴 듯 말듯 말했고 그의 주변에 있던, 우리를 포함한 이들 대부분은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사이에 이 아까운 음식을 한 점이라도 더 입에 쑤셔 넣기 위해 팔을 신속히 놀렸다.

진짜 꿀맛이네 이거, 레시피 좀 얻어갈까.

“하나, 둘.”

탕, 타탕.

셋 대신 쏘아진 두 발의 총성이 모든 이들의 비명을 목젖 안으로 쑤셔 넣었다.

총구가 향한 방향의 끝으로 바들바들 떠는 노부인이 보였다.

‘죽일 생각은 없는 건가.’

나는 들고 있던 식기를 놓고 일어섰다. 노부인에게 가려고 하니 퀸과 마가렛이 내 옷깃을 붙잡곤 고개를 젓는다.

‘미쳤어?’

‘안 미쳤으니까, 놔.’

작은 목소리로 그리 말한 나는 녀석들의 손을 억지로 떼어 놓고 움직였다.

“거기. 뭐 하나.”

나는 놈이 뭐라 하건 종아리에 총알이 스쳐 피를 흘리는 노부인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카츄에게서 응급키트를 꺼내 상처를 소독한 뒤 붕대를 감아 지혈.

자글자글한 손이 내 손을 잡는다. 고맙네, 고마워.

감사의 말이 전해져오는 듯한 노부인의 일렁거리는 눈.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중 총질한 놈이 가장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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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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