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34화 (34/201)

<34화>

훼방꾼들 (2)

그레이스 멜론의 숙소.

“여보세요. 네, 어머니.”

-네가 예전에 만났던 럭비 하는 남자애 기억하니?

“만난 게 아니라…, 그런데 걔는 왜요?”

어머니는 만난 게 아니라 친구를 괴롭혀서 혼내준 거였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세요.

-스트라우드 가문에서 약혼을 제안해왔단다.

스트라우드. 대대로 걸출한 강화계 히어로를 배출하는 가문이라고 들었어요.

“예?”

-우리도 네 결혼 상대를 마음대로 결정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남자 보는 눈도 만들 겸 만나 보기는 하렴. 그리고 시간이 꽤 흘렀으니 그 아이도 좀 달라졌을지 혹시 아니?

“어머니!”

-네가 뉴욕에 오는 날 밤에 시간 잡아뒀다. 정말 싫거든 네가 말한 그 남 교수라는 얘를 우리 앞에 데려오던가.

“남만혁과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래? 그럼 가는 거로 알고 있으마.

뚝.

“…하아.”

* * *

WHA에서 제공한 호텔.

“정말 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레이스. 너는 가문을 대표하는 거야. 이 정도는 당연해.”

룸메이트인 마가렛은 이런 경험이 많은지 저를 치장하는데 망설임이 없었어요.

“이, 이러고 어떻게 나가.”

집에서 보내온 드레스는 가슴 쪽이 크게 파여서 너무 민망하네요.

“이리 와봐.”

저를 거울 앞에 세운 마가렛은 구부정한 제 허리를 강제로 피고 턱을 들어 앞을 보게 했어요.

“어때?”

“…내가 아닌 거 같아.”

“너 맞으니까 자신감을 가져. 그 교수도 한 방에 갈걸.”

“여기서 남만혁이 왜 나와!”

“나는 만혁이라고 한 적 없는데?”

“마가레엣….”

쿡쿡.

“알았으니까 인상 쓰지 마, 화장 흐트러져.”

얼마간의 정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슬슬 F반이 도착할 시간이네요.

참, 저는 아카데미에 가문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마가렛과 하루 먼저 와 있었답니다.

나가야 하는데 어쩐지 문고리를 당기기가 망설여집니다.

등을 살포시 미는 마가렛의 손길에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고 로비까지 내려왔습니다.

약속 시각까지 10분 정도 남았을까요. 저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옵니다.

“남만혁?”

아. 그에게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쥐 잡아먹었냐?”

역시. 별로였나 봅니다. 그래도 한 마디 쏘아주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 관심 끄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예쁘네.”

아.

귀를 울리는 듯한 달콤한 말 이후.

“옷 말이야.”

우윽!

남만혁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 아주 타고났습니다. 나쁜 버릇이에요! 언젠가 제가 따끔하게 고쳐주고 말겠어요.

빵빵-

“마가렛. 그냥 가자.”

…후, 그가 제게 데이트 신청을 해 이 맞선이 물거품이 되길 바란 건. 저의 너무 큰 욕심이었나 봅니다.

“제가 너무 늦었죠? 미안합니다.”

차에서 뛰어나오는 드위츠 스트라우드. 제 손을 잡으려 하기에 뿌리치고 차에 먼저 올랐습니다.

머쓱하게 웃는 꼴이 보기 좋네요. 드위츠가 앞 좌석에 타는 사이 마가렛이 차의 네비게이션을 확인하고는 남만혁에게 가 뭔갈 쥐여줍니다.

저게 뭔지 궁금하지만, 드위츠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에 참았어요.

마가렛은 제 옆에 앉으며 슬쩍 엄지를 세우네요.

“이번에 우리 가문에서 건물을 하나 올렸는데. 최상층을 제가 쓰기로 했습니다.”

“아, 네. 대단하시네요.”

아버지. 남자는 죽음에 준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바뀌지 않는다고 하셨었죠. 말씀대로네요.

드위츠 스트라우드는 럭비부 시절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돈 자랑, 집안 자랑에 슬쩍 맨살을 훔쳐보는 저 음흉함까지.

외모와 말투만 그럴듯하게 바뀌었을 뿐, 속은 그때 그대로입니다.

“제가 LA에 갔을 때 주지사와?”

그렇게 한참을 그의 자기 자랑에 시달리며 도착한 곳은 무기 상인이 취미 삼아 만든 것으로 유명한 크럼프 호텔이었습니다.

이곳의 72층을 예약해뒀다고 하네요. 올라가니 제 나이 또래의 남녀가 상당수 모여 있었습니다. 아는 얼굴들이 몇몇 보여요.

현 미국 대통령 외조카의 아들부터 거대 기업의 직계까지. 정·재계 화합 회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그들의 복장은 하나같이 장인의 손을 거친 것들이었습니다. 마가렛의 말을 듣고 집에서 보내온 드레스를 입길 잘했어요.

‘어쨌든 여기서 멜론 가의 얼굴은 나니까.’

긴장됩니다. 남만혁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요.

예약석으로 안내받아 앉자 드위츠 스트라우드가 음식을 주문합니다.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씨익 웃은 직원이 돌아가자 드위츠는 또 본인만 즐거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제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말아쥐자 마가렛이 고개를 젓고는 조금만 참으라고 속삭입니다.

‘곧, 재밌는 일이 생길 거야.’

여기서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요. 저를 달래려는 말로 여기고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때에.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그가 나왔습니다.

홱.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몰라요. 저도 제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십억짜리 정장과 드레스를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눈도 가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는 단번에 제 눈에 각인되었습니다.

“진짜 왔네.”

웃음기 어린 마가렛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까 남만혁에게 이곳의 주소를 알려줬었나 봅니다.

그는 직원에게 끌려 나가는 듯하다가 결국 이곳으로 왔습니다.

드륵, 누가 앉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뻔뻔하게 구석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우리 테이블에 합류합니다.

“당신이 여긴 왜.”

겨우 꺼낸 말이 이런 거라는 게 너무 부끄럽지만 어쨌든 말을 걸었습니다.

드위츠 스트라우드가 눈치 없이 끼어들어 그와 한마디씩 주고받네요.

남만혁은 저를 보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사겸사 너희도 좀 구하고. 오, 이 집 스테이크 잘하네.”

구하다니.

제가 이 상황을 고역으로 여길 거라는 걸 예상했던 걸까요. 혹시 마가렛이 언급을?

…그럴 시간은 없었을 거예요. 저와 계속 붙어 있었으니까.

‘그럼, 남만혁은.’

제가 그의 의도를 추측하는 사이 드위츠 스트라이드가 제게 묻습니다.

“레이디 그레이스. 혹시 불편하시다면 당장 이 무뢰한을 내쫓겠습니다.”

“아니요. 여기까지 왔잖아요. 식사는 하게 두죠. 불쌍하니까.”

“네가 사는 거냐. 잘 먹을게. 퀸.”

“…흥.”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는 게 힘드네요. 고개를 돌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요.

갑자기 막막하고 답답했던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재밌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불이 꺼졌고 폭발음이 들렸습니다.

꺄아악!

“지금부터 비명 지를 시간 3초 주마. 그 이후에 입을 여는 새끼들은 죽는다.”

빌런이군요. 납치하려는 걸까요. 저는 A반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긴급 구조 신호기를 급히 눌렀습니다.

아.

반응이 없습니다. 전기 신호가 차단됐다는 건 저들이 많은 준비를 해왔다는 뜻입니다.

달각, 달각.

모두가 머리를 감싸 쥐고 자세를 낮출 때 전과 다름없이 식기를 놀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네, 남만혁입니다. 정말, 이 남자는 겁이 없는 걸까요.

기어코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쑤셔 넣고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리는 쪽으로 걸어갑니다.

저와 마가렛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어요.

저는 빌런이 총구로 그를 조준하면 가속으로 들이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지켜보기만 합니다.

남만혁은 느긋하게 부상자를 치료한 뒤 자리에 돌아와서 앉았어요.

아마, 이 자리의 모든 이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뭐지?

“하,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네?”

그 당혹스런 마음만큼은 저 흉악한 빌런도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 * *

-끝났어.

오케이.

리쳇과의 통신은 정전과 동시에 끊어졌다가 내가 노부인을 치료하는 사이 복구됐다.

듣자 하니 인근의 신호 교란 장치를 모조리 파괴했단다. 그리고 이 건물의 시스템에 침입해 마스터 권한도 가져왔고.

“어디.”

짝.

내 박수에 맞춰 건물 조명이 켜진다.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총잡이가 움찔하더니 급히 통신기를 붙잡고 떠들어댄다.

“어이, 제어실. 어떻게 된 거냐!”

-권한을 박탈당했다. 이쪽 해커보다 실력 좋은 놈이 있어.

“등신 같은 놈들! 플랜 D로 전환해! 다 튀어 올라와. 그놈들 부르고!”

-그놈들까지? 그러면 우리는 정말 빌런이 되고 말 거다. 다시 생각해보는 게….

“전부 가족을 위해서다. 모니카. 네 자식을 생각해.”

-…알았어.

“문제없다. 다들 진행해.”

홀에서 일하던 직원 전원이 품에서 구속포를 꺼내 사람들에게 강제로 입힌다.

비싼 장신구들에는 일체의 관심도 주지 않고 묵묵히 사람을 옷에 구겨 넣기만 하는 사람들.

빌런 대다수가 각성자였고 반항하는 이들이 크게 다치지 않는 선에서 폭력을 행사했다.

‘단순히 돈을 위한 범죄는 아닌가.’

미란다라는 여성이 우리 테이블에 다가왔다.

퀸과 마가렛은 저항 의사를 격렬히 표출하는 반면 빨간 머리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숙여 구속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하는 말이.

“야! 어서 저놈들이 하라는 대로 해. 나까지 말려들게 하지 말고.”

“너 갓 차일드라며. 사람들 안 구해?”

“그런 건 죽으면 아무 소용 없잖아! 어차피 아버지가 구하러 올 건데. 닥치고 머리 숙여!”

너가 빌런 같다야. 미란다 당황한 거 봐라.

그런데 얘도 그렇고, 저 빌런들도 그렇고 내 박수 소리에 조명이 점멸한 건 우연으로 여기는 건가.

짝, 짝.

보란 듯이 일어서서 연달아 박수를 치자 그에 맞춰 샹들리에를 비추는 화려한 조명들이 동시에 깜빡인다.

그제야 빌런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통신기에다 대고 지시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또라이. 이거 네가 한 짓이냐?”

나는 의자를 돌려세우고 다리를 꼬아 앉으며 등을 테이블에 기대며 답했다.

“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몰라?”

“빌런 단체가 귀한 집 자식들 납치하는 중?”

“아는 놈이 그렇게 건방을 떨어도 될까? 이 총은 장식이 아니야. 너 같이 사리 분별 못 하는 새끼들 대갈통에 구멍을 내 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도구지.”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고 꾹꾹 누르는 빌런.

허세다. 이놈들은 사람 못 죽인다.

뉴욕의 5성, 그것도 무기 상인의 호텔. 만약 여기서 사람이 죽으면 세계 각지에서 활동 중인 미국 출신 히어로들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날아오게 되어 있다.

만약 그딴 거 상관하지 않는 미치광이였다면, 구속포 같은 걸 준비하지도 않았겠지.

“그런 건 됐고, 아까 듣자 하니 빌런이 가족이니 뭐니 하던데. 그 이야기나 해봐. 어차피 사람들 포박하고 협상하려면 아직 시간 좀 있잖아.”

“허. 이게 진짜.”

-접근 중인 다수의 헬기 발견.

‘안에 탄 사람들 신원조회.’

-동업자들, 악질.

리쳇이 악질이라면 보통 쓰레기가 아니라는 뜻이었기에 내 결단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격추.”

무기 상인이 건물주인 크럼프 호텔은 옥상에 장식용 터렛이 달려있다. 사람들은 이걸 당연히 호텔의 홍보 수단이자 퍼포먼스 정도로 여기고 있으나.

쾅!

보다시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뉴욕이 난리가 나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대장.

“나도 들었다.”

깨진 창밖으로 검은 연기를 뿌리며 사선으로 지상에 꼬라박는 헬기들을 본 남자가 목울대를 꿀렁이더니 통신기를 바닥에 던지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씨X.”

많은 감정이 담긴 그 욕에 나는 재차 설명을 요구했고 그는 자포자기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들이 친구들과 사과를 훔쳤다. 장난이었지. 과일점 주인도 나와 아는 사이였기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생각으로 내 동의하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도 사정을 알고 적당히 하루만 가둬놓는 거로 넘어가려 했지.”

그는 당시 생각을 하는지 핏발선 눈으로 이를 악물더니.

“다음날 데리러 갔을 땐, 아들의 몸만 남아 있었다.”

“몸?”

“머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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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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