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훼방꾼들 (3)
이들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아들의 죽음을 조사하다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고 함께 국가에 호소하였으나, 그 후로 하나둘씩 실종되기 시작했단다.
게다가 히어로 협회는 그들에게 빌런을 옹호한다는 프레임을 씌워 사회적으로 아예 말살시켰다.
가족과 직장을 잃은 이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려 했으나 모든 수단이 사전에 차단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테러.”
“아니. 뒤틀린 정의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의 입은 막더라도 상위층의 압박은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골치 아프네.
저들의 동기와 목적은 어느 정도 공감이 된다. 나도 보육원의 아이들이나 소민 누나가 해를 당했다면 이보다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돈 문제는 둘째치고 다친 사람은 거의 없다. 나름 최소한의 희생으로 일을 진행하려 했다는 게 보인다.
추락한 악질 동업자들이 왔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만, 그건 내가 치웠으니까. 아직 선을 넘은 건 아니다.
“그래서 범인이 누군데.”
국가는 숨기고 히어로 협회가 거든다. 둘 중 하나가 주모자일 확률이 높다.
그는 나를 제외한 전원이 포박된 걸 확인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협회장. 헤드라이트.”
* * *
WHA 회의실.
“빌런을 포함한 범죄자들의 뻔뻔한 요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협회장의 강력한 주장에 프로스트가 동조하고 나섰다.
“현재 세간의 풍조를 의식하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정의와 법을 수호하는 우리가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평소라면 빌런의 인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이들이 단체로 반발하고 나섰겠으나 커다란 홀로 보드에 떠 있는 자료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전년도 대비 범죄율 320% 상승]
죄를 저지른 이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목소리를 낸 것만으로 세 배 이상의 범죄가 발생했다.
“보이십니까. 이 자료는 다수의 기관을 통해 얻은 정보를 객관적으로 취합한 결과이고 국가에서도 인정한 수치입니다.”
“…인권 문제는 단기적으로 보아선 안 됩니다. 지금처럼 갱생의 여지 없이 그들을 억압하면, 언젠가 우리 모두가 빌런이 되는 날이 올 겁니다. 우아한 신세계라는 책에선―”
“그건 소설이고!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잖습니까. 당신 자식이 죽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헤드라이트. 자네 말이 과해.”
흥분한 헤드라이트를 프로스트가 만류하자 숨을 길게 내쉰 그가 머리를 숙여 사죄한다.
“목소리를 높인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만, 제 의견은 변함없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역시 의견을 달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지성인들답게. 다수결로 정합시다.”
WHA에 초대장을 받고 모인 서른 명의 학자들은 29:1로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인권 보장 안건을 전면 취소하는 데 투표했다.
당장 이것만으로는 효력이 발생하지 않으나 WHA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새로운 정책 하나가 통과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길어질 듯하던 회의는 헤드라이트가 준비한 자료에 의해 절대다수가 만족하는 결과로 끝맺었다.
얼마 후.
뉴욕 크럼프 인터네셔널 호텔이 점거당했다는 소식이 헤드라이트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하. 뉴욕에서 호텔 점거? 별 미친 빌런이 다 있군.”
“그게, 빌런이 아니라 학생입니다. 그쪽의 요구와 모습이 담긴 영상을 확보했습니다. 전송해도 되겠습니까?”
“음.”
영상은 초동대처를 위해 출동한 경찰과 학생의 대치부터 시작됐다.
-원하는 게 뭐냐.
-딱히 없다.
-…그렇다면 일단 인질부터 풀어줘라.
소년의 담담한 어투와 답변에 당황하는 기색을 그대로 드러낸 인질 협상가의 모습.
“저거 신입인가?”
“그간 보조로 참여하다 이번에 처음으로 전면에 나섰다고 합니다.”
쯧.
혀를 찬 헤드라이트가 영상을 다시 재생하자 72층의 부서진 유리창들 사이에 의자 하나를 놓고 거만하게 앉은 소년이 헬기의 조명을 받고 있다.
높은 광량으로 비춰 압박을 하기 위함이었으나 학생은 이미 선글라스를 착용한 상태라 큰 효과는 없는 듯했다.
-그건 좀 그렇고. 사람 좀 불러줬으면 하는데.
-어렵지 않다. 말만 해라. 대신 그쪽도 내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얼마든지. 준비됐나?
-말해라.
소년은 품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더니 위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드라크 아나믹스, 이비 보스튼, 도슨 막스, 아이라 제네거, 크리스티나 슈….
총 19명의 이름을 불렀고 협상가는 그들이 대단치 않은 인물들이라는 것을 파악하곤 금방 데려오겠다 확언한 뒤 인질범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이쪽이 그쪽의 부탁을 수용한 만큼 인질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길 바란다.
-걱정하지 마라. 잘 있으니까.
소년이 손뼉을 치자 깜깜했던 내부가 잠시 밝아졌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거 뉴스로 나갔나?”
“예, 지금도 실시간 중계 중입니다.”
“경찰의 대처는?”
“인질범의 성격과 내부 상황 등을 고려해 ‘긍정적 협상 진행’으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건 아직 높은 곳까지 요구한 자들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다.
헤드라이트는 소년이 언급한 이들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손에 나는 땀을 뒷짐을 지는 것으로 보좌관에게서 숨기며 입을 열었다.
“내가 나서야겠어.”
“예? 그건.”
헤드라이트가 움직이기에는 사건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한 보좌관이 만류하려 했으나.
“행사가 한참 진행 중이잖은가. 당장 내일부터 학생들이 몰릴 텐데. 위협을 근처에 두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인질범도 학생이라지?”
“네.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1학년입니다.”
“어떤 멍청이가 저딴 놈에게 초대장을 쥐여줬다던가?”
“그랜드 위저드 매저드님입니다.”
“…실수겠지. 확인해봤나?”
“예. 실시간 방송을 보는 중이며 자기 제자가 맞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도.”
“이유는 무슨! 빌런의 과거사에 공감해 동정하는 시대는 오늘부로 끝났네.”
분개하며 히어로 코스튬을 입은 헤드라이트는 곧장 헬기를 타고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크럼프 호텔로 향했다.
72층에 고정 비행하라고 요구하자 난감해하는 조종사 대신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크럼프 호텔에 진짜 터렛이 있습니다.”
“터렛?”
“예, 빌런이 타고 있던 헬기 세 대를 격추해서. 호텔에 접근하려면 우선 저 인질범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씁, 연결해.”
츠즉.
-누구쇼.
“헤드라이트다. 인질범. 이야기 좀 하지.”
-큭큭.
웃어?
-이봐. 쓰레기. 애들 머리는 잘 쓰고 있나?
뚝.
그러고는 끊어지는 통신.
“지금 이 통신을 듣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저밖에 없습니다.”
“미안하네.”
“컥! 회, 회장?”
“윽!”
그 자리에서 보좌관과 조종사의 목을 꺾고 인근 건물의 옥상에 뛰어내린 헤드라이트는 추락하는 헬기를 보며 무전기를 켜 공용 채널에다 대고 말했다.
“헤드라이트다. 방금 인질범에게 공격받았다. 협상은 없다. 무력 진압하도록.”
-당신에게 그럴 권한은 없습니다!
인질범이 요구한 이들의 신원조회를 마치고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 요원들을 파견한 상황.
조금만 기다리면 그럴듯한 실적 하나가 생기는 협상가 입장에서 헤드라이트의 요구는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지금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경찰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고, 신입 협상가 대신 헤드라이트가 현장 최고 명령권자로 임명되었다.
-제기랄….
그 말을 끝으로 협상가의 무전기 채널이 닫혔다.
“진압팀. 도착했나?”
-써. 신호 주시면 진입하겠습니다.
“돌입해.”
그러나 각성자들로 구성된 진압팀이 72층에 진입했을 때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확인해.”
-인질범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테이블 주변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 전원 홀로그램이었습니다.
“――!”
거친 욕을 뱉은 헤드라이트는 그딴 거 하나 구분 못하냐고 추궁하는 대신, 주변을 샅샅이 뒤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직접 72층으로 향했다.
“오.”
그곳에는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진압팀에 의해 속박당한 채 엎드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헤드라이트의 언사에 소년의 얼굴이 일순 구겨졌다.
“나는 그 말을 싫어해. 마치 당신이 나를 끝장낼 수 있는 것 같잖아.”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애송이. 너 같은 범죄자에게 이제 인권은 없다.”
“글쎄.”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닐 텐데. 서히아 F반 남만혁.”
“너야말로 그럴 때가 아니지 않나? 보좌관과 조종사를 그렇게 죽여 놓고.”
그 소리에 남만혁의 등을 무릎으로 누르던 대원의 손에 힘이 잠시 빠졌다.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킨 남만혁은 자신에게 달려들려는 대원들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며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았다.
“진정해. 난동부릴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고는 품에서 아주 천천히 손바닥 크기의 작은 호울 캠을 꺼내 어깨에 얹는 소년.
“생방송 킨다. 누가 진짜 잘못했는지 하나씩 따져보자고. 거, 협상가 양반. 댁도 이쪽으로 와.”
옆에 멀쩡한 테이블을 놔두고 바닥에 앉은 세 사람.
이 자리의 누구보다 여유로운 인질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협회장.
방금 인질범이 요구한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부하에게 듣고 사색이 된 협상가.
“공식적으로 내 죄가 뭐지?”
“납치, 기물파손, 무단 점거, 불법 무기 설치 및 사용.”
“터렛은 내가 설치한 게 아니지만, 일단 좋아. 내가 그걸 전부 인정했다 치고 나와 연쇄 살인범을 비교하면 누가 더 중형을 받나?”
“당연히—”
“빌런과 잡담을 나눌 생각은 없다!”
헤드라이트는 협상가가 답하기 전에 일어나 남만혁의 멱살을 잡으려 했으나 그의 옆에 있던 진압대원이 복면을 벗으며 그의 팔을 잡아챈다.
“헬기의 조종사가 내 형이었다. 정말, 네가 죽였나?”
“네 형이 죽었다면 이놈이 헬기를 공격한 탓이다!”
“같이 탈출할 수도 있었잖아!”
“대화 중에 미안한데, 그렇게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어. 내가 찍어뒀거든. 리쳇, 전송.”
남만혁이 바닥에 내려놓은 홀로보드에 헤드라이트가 타고 온 헬기가 나왔고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 생중계되었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조종사와 보조관의 목을 비트는 헤드라이트의 모습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조작이다! 저건 내가 아니다!”
“헤드라이트!!”
“빌런이 제시한 증거일 뿐이다!”
“뭐 그렇다고 치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협상가 양반, 아까 내가 말한 사람들 조회해봤어?”
“그래. 모두 노브레인 사건 피해자더군.”
“그 애들 부모가 어떻게 됐는지도?”
“사회적 말살.”
“좋아. 그쪽은 머리가 좋은 거 같으니 하나만 더 물어보자. 내가 찾을 수 없는 사람들 이름을 언급하고 협회장이나 되는 양반을 여기에 불러다 앉힌 이유가 뭘까?”
“그를 범인으로 생각해서겠지.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해도 이렇게 인질을 잡아서 해결하려 해선 안 됐어. 정식으로 절차를 밟았어야지.”
“나는 겁이 많아.”
“뭐?”
“국가에 호소하면 이 양반이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는데. 어떻게 그래.”
“평생 사람들을 위해 헌신해온 나다. 고작 17살짜리 빌런이 하는 말에 넘어가지 마라!”
“아.”
대뜸 남만혁이 탄성과 함께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뱉었다.
“마리.”
한참 아울 캠의 카메라에 대고 자신의 청백함을 호소하던 헤드라이트의 입이 거짓말처럼 닫혔다.
“협회장. 네 딸은 잘 있나?”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