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훼방꾼들 (4)
인질극 생중계 1시간 전.
“안돼. 이런 식으로는 실패한다. 장담하지.”
“어린놈이 뭘 안다고!”
“많이 알지. 됐고. 도와줄 테니까 내 말대로 해. 어차피 계획도 틀어졌잖아? 당장 탈출부터 문제 아니야?”
‘각성자 19명. 대단한 전력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혀놓으면 그블린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
지금 굴려놓은 스노우볼이 그때쯤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겠는가.
츠즉
-울프. 나는 저 소년을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해.
“모니카.”
-방금 크럼프로부터 72층만 분리해서 폭파시킬 수 있으니까 허튼 생각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어.
“인질들도 다칠 텐데?”
-자기는 상관없대.
“미친….”
“빨리 결정해. 시간 없어.”
잠시 먼 곳을 바라보던 이들의 대장, 울프는 총의 손잡이를 부서져라 꽉 쥐더니 바닥에 내려놓는다.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고는 내게 무전기를 건네는 울프.
“잘 생각했다. 먼저 우리 귀한 집 아들 딸내미들에게 채운 구속포부터 빨리 풀어줘.”
그들이 이 사건의 중요한 증인이 될 테니까.
미란다를 제외한 이들은 울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말대로 움직였다.
“네놈들 전부 뒤졌어!”
“우리 외할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전부 고소할 거에요!”
예상대로 반발이 거세다.
“자, 치즈.”
찰칵.
리쳇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있던 홀로폰으로 그들의 모습을 일일이 찍었다.
“뭐, 뭐야!”
“초상권 침해예요! 당장 지우세요!”
“너!”
유독 시끄러운 세 놈을 내 앞으로 불러와 꿀밤 한 대씩 먹였다.
윽, 악, 꺅!
“이것들이. 좋게 말하니까 상황 파악이 안 돼?”
“끅….”
총을 집어 들며 말하자 삼인방의 입이 쑥 들어간다. 이후 피해자 부모의 사연을 상세히 읊자 동조하는 이가 반, 어쩌라는 식의 반응이 반이었다.
‘아직 어려서 공감하기 어려우려나.’
구슬려서 협력을 얻어낸다는 최선의 선택지를 포기하고 차선을 고르려는 때에.
“여러분. 형제나 부모님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날 소중한 가족이 없어졌어요. 수소문 끝에 간신히 찾았더니 머리가 사라진 채 죽어 있다면요? 병원에서는 이래요. ‘유전자는 일치하나 머리가 없어서 신원을 완전히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요. 말이 안 되잖아요! 이 어이없는 일을 이분들이 당하신 거라고요.”
퀸이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절절한 목소리로 호소하자 인상을 구기고 있던 남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인다.
쟤는 나중에 정치해도 성공하겠네.
여자 중 몇몇은 가족이라는 단어가 유효했는지 옆에 있던 희생자의 부모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고 있었다.
전원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듯했으나 한 명만은 끝까지 고개를 저었는데.
“드위츠 스트라우드. 정말 이럴 거예요?”
“저들이 범죄자인 것은 변함없잖아!”
“드위츠! 협조 좀 해!”
그는 그레이스 멜론이 미들스쿨 시절의 모습이 나오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저놈이 살짝 불안하긴 해도 퀸의 말은 들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지.
‘리쳇, 어떻게 됐어.’
-찾았어. 이야 이 대머리 자식 대범한데?
처음 WHA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리쳇이 내부를 조사했고 몇몇 수상한 곳이 발견됐다.
히어로 협회는 큰 단체이니만큼 그런 곳이 없는 게 이상했기에 흔적이 남을 걸 우려해서 적당히 하고 그만두라 했었다.
지금 다시 조사해보니 은밀한 장소에 협회장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단다.
“울프.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하자. 협회장이 범인이라 특정한 이유는?”
“WHA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였다. 그가 내 옆을 지나가며 고맙다고 하더군.”
“그게 끝?”
“그거 말고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가?”
핏발선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 자식이 죽었는데 눈 돌아가는 건 이해한다만…. 저건 증거도 뭣도 아니다.
‘네 생각은?’
-맞는 거 같은데?
그러면서 사진 두 장을 내 망막에 띄우는 리쳇.
하나는 머리가 없는 시신이고 다른 하나는 행사장 입구에서 본 반쪽짜리 휴머노이드였다.
언뜻 달라 보이나 겹쳐놓으니 몸의 외곽선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진다. 억지로 맞춘 게 아니라 정말 자연스럽게.
-참고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데드레드스컬의 책에 이런 이야기도 있어.
-‘사자를 고등 언데드로 되살리기 위해선 생전의 육체를 최대한 보존 또는 복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과 육체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계열이 다르기는 하나 생명을 연구한다는 부분만큼은 비슷하기에 그럴듯하긴 하다.
“가보자. 그게 빠르겠네.”
아니면 어쩔 수 없지.
“가다니?”
“WHA 행사장에 비밀스러운 장소를 발견했다. 거기에 너희 자식들이 있을 확률이 높아. 쟤들 데리고 같이 갔다 와. 내가 여기서 시간 끌고 있을 테니까.”
시간이 촉박했기에 곧장 위치를 넘겨주고 쫓아내듯 그들을 내보내려는데, 울프가 들고 있던 무전기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제 건물에서 저만 모르게 재밌는 일을 벌이면 곤란하죠.
“누구?”
-호텔 주인입니다.
“오. 그렇게 궁금하면 와서 관람하지 그래.”
-그러고 싶기는 합니다만, 지금은 바빠서 말이죠.
“원하는 게 뭐야?”
-생중계. 그것만 해주시면 호텔에서 내보내드릴 뿐만 아니라 돈이 필요한 모든 소송은 제가 막아 드리죠.
협회장을 싫어하는 인간인가. 아니면 단순히 재미로? 뭐, 그런 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딜?
“딜.”
그렇게 호텔의 보안 해제와 동시에 은밀히 외부로 연결된 길이 열렸다.
“퀸. 마가렛.”
“응?”
“왜 그러시죠.”
두 사람의 눈빛에서 걱정과 우려 그리고 약간의 기대감 같은 것이 보인다.
“너희는 저 사람들 따라가서 허튼짓 못 하게 해.”
“피해자 부모 쪽 말하는 거지?”
“둘 다. 특히 저 빨간 머리.”
“알았어요. 제가 지켜볼게요.”
“오냐, 부탁하자. 가라.”
“저, 그런데.”
흘낏 퀸이 마가렛의 눈치를 본다. 왜 이래.
“아. 나는 먼저 가 있을게.”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머금고는 총총 뒤로 물러나는 마가렛.
“그….”
“빨리 말해.”
“데이트!”
“어?”
“이번 일 무사히 끝나면. 데이트 하, 하자고요.”
새빨간 얼굴로 말하는 퀸.
“알았으니까. 너도 가봐.”
“약속이에요!”
그러고는 가속까지 사용해서 계단을 내려가는 퀸.
나는 아까 찍어놓은 인질들 사진으로 만든 홀로그램을 테이블 주위에 설치하며 중얼거렸다.
“…크흠.”
-큭.
이 순간만큼은 리쳇의 조롱 어린 웃음도.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 * *
리쳇의 안내를 받아 행사장에 은밀히 진입한 피해자 팀.
“여기라고? 진짜?”
드위츠 스트라우드는 그 검은 머리칼의 동양인이 나타났을 때부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앞의 아름다운 여성 두 사람이 그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 하며, 빌런의 테러 역시 그에 의해 좌절되어 자신이 끌었어야 할 사람들의 이목을 그놈이 전부 가로챘다.
게다가 당당히 업적을 세워 히어로 협회장 자리까지 앉은 헤드라이트 님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폄하하기까지.
‘이대로는 안돼.’
다른 건 다 참아도 무단 침입이라니? 히어로 커리어에 오명을 남기는 짓거리에는 동참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결정적일 때에 아버지를 부르자.’
호출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건 확인했다. 마침 아버지는 오늘 휴무. 자신의 부름이라면 3분 내로 날아오는 게 가능하기에 기꺼이 이들의 허튼 수작질에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 화장실이 입구인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그러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와.”
드위츠를 전담하기로 한 그레이스 멜론이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거?”
마이크로 드론을 통해 마가렛이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리쳇이 긍정했다.
-예, 그 물 내림 버튼이 맞습니다.
남만혁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깍듯한 AI 흉내를 내는 리쳇의 목소리는 신뢰성이 아주 높았고 마가렛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듯한 이 더러운 버튼이 몹시 찜찜했으나 눈을 질끈 감고 눌렀다.
그러자 좌변기가 좌우로 갈라지며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다.
“…여기 확실하지?”
-예, 이곳이 가장 사용 빈도가 낮으며 해당 위치까지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만들어 놓고 사용하지 않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악취를 풍기는 통로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수준이었다.
모두가 리쳇의 지시를 따라 이동하던 중. 그레이스 멜론이 들고 있던 무전기로 협상가와 헤드라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작했구나.”
누군가의 원한을 대신 짊어지고 선뜻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사건이 그의 생각대로 마무리된다면, 더는 그를 히어로 지망생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레이스 멜론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나도. 언젠가는….’
-여깁니다.
리쳇이 두꺼운 문을 앞에 두고 그리 말하는 순간.
쾅!
걸어온 통로 뒤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드위츠! 거기 있느냐!”
“아버지!”
“이 녀석!”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다가와 드위츠 스트라우드를 끌어안는 중년의 남성.
“트윈버스터?”
“이 몸을 알아보는구나. 살고 싶으면 엎드려라! 빌어먹을 빌런 놈들!”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쳤다가 하나씩 접는 트윈버스터.
그의 특성은 히어로명과 같다. 손가락을 하나 접을 때마다 양팔에 막대한 힘이 축적되고 주먹을 내지름에 따라 이 힘이 부채꼴로 방출된다.
같은 강화계이기에 그의 특성을 잘 아는 마가렛과 퀸이 서로 눈짓할 것도 없이 각자 트윈버스터의 앞을 막았다.
“트윈버스터! 오해입니다! 저희는 학생이라고요.”
“으음? 아들아. 사실이냐?”
“아니요. 이제는 빌런 협조자일 뿐입니다.”
“드위츠!”
퀸의 외침에 드위츠는 싸늘하게 웃으며 중지를 올린다.
“사연이 있는듯하군. 그건 제압한 뒤에 듣도록 하지. 인질분들은 뒤로 비키시오.”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트윈버스터가 손가락을 두 개 잡은 손을 휘둘렀다.
강력한 폭발이 통로를 휩쓸었고 이에 대비하고 있던 퀸과 마가렛은 한순간에 넝마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네놈들도 빌런이군.”
착용한 장비와 반응을 통해 구분한 트윈버스터가 그들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찰나.
미란다가 피어싱 형태로 위장한 카메라를 뽑아 들며 나섰다.
“저는 종군기자, 미란다입니다. 모든 것은 이 영상이 증명할 겁니다. 그러니 멈추세요!”
“그런 건 나중에 확인하면 될 일.”
카메라는 받아들되 제압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한 트윈버스터가 비명을 지르는 미란다에게 주먹을 뻗자 인질들 뒤에서 부축을 받던 노파가 앞으로 나왔다.
“제닉스야.”
“누가 내 이름을! …장모님? 장모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이 방종 맞은 것아. 역시 너 같이 성질 급한 놈에게 딸을 내주는 게 아니었다. 아이고, 내가 빨리 죽어야지 이런 꼴을 안 볼 텐데! 소피아는 지금 뭘 하고 있느냐!”
“장모님. 그게 아니라.”
“그리고 너는. 손자라는 놈이 할미 얼굴도 못 알아봐?”
“그게. 너무 늙…. 죄송합니다.”
“입 다물고 따라오너라.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알겠습니다.”
태산과 같이 앞을 막아서던 정상급 히어로가 남만혁이 응급치료를 했던 할머니 앞에선 작은 공벌레처럼 몸을 숙이는 모습에 쓰러져서 끙끙대던 퀸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끝났다 싶었는데.’
너무 허무하리만큼 간단히 일이 해결되었다. 의도 없는 선행은 행운으로 돌아온다더니.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다.
리쳇이 보안 장치를 풀고 문을 열자 그 안은 어지간한 대형 연구소 못지않은 시설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로로 세워진 커다란 시험관 안에 들어 있는 둥근 구체들.
“저거 설마….”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