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교류전 (1)
WHA가 주최 중인 행사의 정식 명칭은 ‘2051 세계 히어로 문화 교류’.
말만 문화 교류지 실제로는 각지에서 모인 권력자들이 주요 안건들을 다른 기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유롭게 합의, 결정하기 위해 만든 행사다.
그러나 의도가 어찌 되었든 히어로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학창 시절에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사인 것도 사실.
띠로로, 띠로로!
“600. 제발. 600점만 넘자!”
행사장 메인홀에 위치한 파워 샌드백은 히어로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룰도 단순해서 매년 도전자가 끊이질 않는다.
이들이 열광하는 이유에는 600점을 넘겼을 때 받는 상금도, 700점을 넘겼을 때 받는 주말 외박권도 있겠지만.
[1위 : 998 점 - 트윈버스터 / 2030]
가장 큰 이유는 최대 점수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999점을 띄워 저 21년째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는 것.
명예.
힘깨나 쓰는 이들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는 데 충분한 낭만 아니겠는가.
물론, 상금이나 외박권에 목숨을 거는 이들도 많다.
[557점 - 순위 등록 실패]
“아!”
얼굴만 소년이고 몸은 우락부락한 사내가 좌절하며 계단을 내려온다.
이어 민머리 학생이 617점을 기록하고 상금을 수령하자 박수를 받았다.
강화계 1학년은 사실 저 점수도 쉽지 않다.
다음 순서인 인도계 소녀가 화려한 돌려차기로 701점을 찍고 외박권을 쥐며 함성을 터트린다.
부러워하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샌드백 앞에 선 장신의 여성. 거대화를 통해 신장을 3.5m까지 키우자 장내가 술렁인다.
“저 특성은…. 걔 아냐? 거인 주먹, 예프소비치.”
“저 땋은 머리에 주근깨. 확실해.”
“올해 강화계 여자애 중에선 쟤가 제일 세다던데.”
쾅!
1분 안이라면 어떤 타격도 수용하는 샌드백이었기에 마가렛은 스택을 최대한 쌓아 59초에 마지막 일격을 터트렸다.
이제까지 무대에 올라온 누구보다도 가파른 수치 상승 속도에 장내의 학생들이 술렁였고.
띵!
[997점 - 2등 마가렛 예프소비치 / 2051]
“쳇.”
마가렛이 손을 탁탁 털고 돌아서 내려오자 링 아래에 있던 한 학년 선배이자 고향 동지, 알렉산드라가 그녀를 맞이한다.
“올해, 아니 작년까지 합쳐도 997점은 네가 처음이야!”
그녀의 위로에 아쉬움이 사라졌다가도 지금 링 위로 올라가는 왜소한 소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분한 마음이 다시 샘솟았다.
‘스택 하나만 더 쌓을걸.’
늘 저 소녀를 상대했던 마가렛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오늘. 새로운 기록이 저곳에 새겨질 것이다.
“너 뭐하냐. 링 위에서 치라는 법은 없잖아. 말 잘 듣는 꼬맹이처럼 굴지 말고 내려와.”
특히 저 남 교수까지 옆에 붙어 있다면, 그 사실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알았어요.”
‘괜히 트레이닝복 입고 나가라고 했나.’
어젯밤.
남만혁과 데이트를 하게 됐다며 어쩔 줄 모르던 그레이스에게 상대에게 맞춰주는 게 가장 큰 호감을 사는 법이라는 걸 알려줬고.
그게 주효했는지, 오늘은 먼저 방에서 나가더니 행사장에 남만혁과 같이 들어오더라.
“돌아. 음속 직전까지. 이제 그 정도 감은 있지?”
남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레이스가 날아올라 메인홀 상공을 돌았고 그녀가 한줄기 분홍색 선이 되기 직전.
꾸궁!
바닥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 이후 굉음이 홀을 울렸다. 그간 누가 때려도 움직이지 않던 샌드백이 크게 출렁였고.
홀로보드의 점수는 0을 세 번 깜빡이고는.
[1위 : 999점 - 그레이스 멜론 / 2051]
와—
학생들의 환호에 쑥스러운 듯.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남만혁 뒤로 숨는 그레이스 멜론.
옆의 경품대에서 외출권과 상금, 그리고 1등에게만 주어진다는 21년째 매년 하나씩 쌓인 희귀 소재들이 튀어나왔다.
“마가렛. 저거. 익룡의 꼬리 아냐? 옥션에서 엄청 비싸게 팔리는 거.”
“맞을 거예요.”
선배나 익명의 기부자들이 후배를 위해 기부한 물품들은 블라인드 처리되어 각 행사의 상품으로 무작위 배분된다.
가끔 귀한 소재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 때도 있는데, 그건 대부분 생색내기를 좋아하는 기부자들이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코스튬 걱정은 없겠네.”
입맛을 다시는 마가렛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알렉산드라가 어깨동무하며 씩 웃는다.
“후배, 우리에겐 교류전이 있잖아.”
교류전.
히어로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실력을 겨룬 뒤 그 자리에서 상대의 장단을 논하는 행사.
아이들에게 큰 상처가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하는 이 교류전은 매년 없애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도 지금까지 이어진 이유는.
물리적, 정신적 충격을 동시에. 그것도 다른 문화권의 동년배에게 받는 건 큰 자극이 된다.
나태했던 학생에게는 긍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후에 남만혁은 교류전을 두고 이렇게 평한다.
‘맞으면 철든다는 격언을 아주 훌륭히 재현한 행사.’
-WHA 행사 진행팀에서 알립니다. 곧 교류전 1차전이 시작되오니 참여하는 학생과 관람을 원하는 분들은 지하 경기장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사실상 이곳의 학생들은 아카데미 대표 격으로 선출된 것이기에 참여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행사장의 지하에 마련된 경기장은 오페라하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형상이었다.
무대 중앙에 서 있던 사회자가 목청을 가다듬은 뒤 펜마이크에 대고 경기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흔히 아는 토너먼트와 다르지 않았다.
“단, 예선전에선 같은 아카데미 학생과는 겨룰 수 없습니다. 본선에서도 가능하면 타 아카데미와 경쟁하게 될 거고요. 다들 이 교류전의 취지를 알고 계시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참고로 올해는 학년별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우우—
작년에는 학년별로 치뤄졌다. 청소년기의 각성자는 해마다 성장 폭이 상당하기에 당연한 조치였는데, 올해는 싹 무시하고 랜덤이란다.
취지야 어쨌든 높은 순위를 기록할수록 고급 상품을 받기에 3학년과 1학년의 희비가 엇갈렸다.
개중 1학년이면서도 웃음을 머금는 몇몇이 있었는데.
“잘됐네. 대영제국의 힘을 보여줄 수 있겠어.”
영국 왕립 히어로 아카데미 1학년 수석. 윌리엄 브래들리.
“남만혁…, 흐흐.”
뉴욕 히어로 아카데미 수석, 드위츠 스트라우더.
그리고.
“쓸만한 애 없나.”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의 빌런, 남만혁.
이 셋의 격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파이로스타가 소울밤에게 연달아 스타파이어를 사용합니다!”
요란한 기술에 화끈거리는 히어로명. 17세의 소년, 소녀다운 네이밍들의 향연.
“남 교수, 너는 긴장 안 돼?”
왼쪽에 앉은 마가렛이 자신의 떨리는 다리를 누르며 묻는다.
그녀의 상대는 모스크바에서 보낸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푸테나.
소속은 단순히 러시아라는 국가명만 적힌 소년.
히어로 지망생이기는 하나 자세한 정보를 타국에 공개하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의도란다.
마가렛이 말하길 자신과 알렉세이는 러시아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했던 사이였다고 한다. 결과는 보다시피 마가렛이 졌다.
나의 훈련법으로 성장한 마가렛. 러시아의 정수로 키워진 알렉세이.
둘의 대결이 가장 궁금한 건 아마 당사들도, 러시아도 아닌 바로 나일 것이다.
“나야 여차하면 잠수하면 그만이라. 따라오면? 야자열매 던지면 돼. 퀸도 나가떨어지는데, 쟤들이야 뭐.”
“쿡쿡.”
이제야 웃네.
“다녀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네가 증명해라. 마가렛.
사회자가 둘의 이름을 불렀고 비슷한 방식으로 몸을 풀고 무대 위로 올라간다.
가드, 스탭, 페이크. 기본기가 일치한다는 걸 서로 확인하자 알렉세이가 입가를 길게 늘린다.
두 사람이 무언가 대화를 나눴고 신호가 울리자마자 서로를 향해 돌진.
주먹과 주먹이 부딪쳤고 원형의 무대 중앙이 크게 패였다.
“힘내, 마가렛!”
오른쪽에 앉은 퀸이 뒤로 밀리는 마가렛을 보며 크게 외친다.
그리고 로우킥에서 이어지는 레프트 훅까지. 거울을 앞에 둔 것처럼 완전히 똑같은 두 사람의 콤보는 마가렛이 넘어지는 것으로 알렉세이에게 승기를 넘겨주며 끝났다.
그러나 마가렛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알렉세이. 그 모습에 확신했다.
‘너 졌어.’
기사도 정신인지 스포츠맨십인진 모르겠으나 승리에 대한 염원이 절박하지 않은 건 확실하다.
놈은 바로 파운딩을 갔어야 했다.
뒤늦게 뭔갈 알아차렸는지 마가렛에게 달려들었으나.
한참 늦었다.
마가렛은 첫 격돌부터 축적을 시작했다.
내가 훈련 도중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은밀함.
‘나 힘 모은다!’라고 알리면 그걸 누가 맞아주겠나. 그러니 최고 단계에 이르기 직전까지는 여러 수단을 동원해 외부로 표출되는 모든 현상을 숨기는 것에 집중했다.
여름임에도 긴 옷을 입은 것과 우스울 정도로 커다란 글러브를 착용한 게 연구의 결과다.
숙련도가 쌓일수록 광채를 몸 안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으니까 정식 히어로로 활동할 때까지만 저렇게 고생하면 된다.
“흐아압!”
기합과 함께 내지른 알렉세이의 정권은 마가렛의 무릎에 의해 막혔고 이어 글러브를 찢으며 터져 나오는 백광에 휩싸인 주먹을 안면에 허용하며 그대로 녹다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잠시 느린 재생 화면으로 부정이 없었는지 판독한 심판은 마가렛의 손을 드는 것으로 승리를 확정 지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퀸의 물음에 주변에 앉은 학생들의 이목이 내게 쏠린다.
“초반에 알렉세이가 마가렛이 특성을 사용할 시간을 줬다는 건 다들 알 테고. 어떻게 금방 다시 섰냐고 묻는 거지?”
“네.”
“마지막 연계에서 일부러 힘을 빼고 넘어진 거야. 파운딩 들어오게 하려고. 순간적인 상체 근력은 마가렛이 더 좋으니까 무조건 뒤집을 수 있거든. 안 들어오면? 상대적으로 약점인 체력을 회복하는 거지.”
퀸이 감탄하는 사이 뒷자리에 앉은 초면의 학생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파운딩이 한 번 당하면 풀기 무척 힘든데, 그 부분도 고려하셨는지요?”
“어, 못 풀어도 상관없어. 맷집은 자신 있는 데다 마가렛은 맞아도 스택이 쌓이거든.”
“와…, 전술이 좋았네요.”
전술이라고 할 것도 없는 단순한 수였지만, 근래에 급격히 성장한 마가렛의 피지컬과 알렉세이 방심이 그걸 극대화했다.
“그럼 내 헬스장 고객인데 그냥 보내겠냐.”
이후 깨어난 알렉세이와 서로의 장단점에 대해 의견을 나눈 마가렛이 다시 내 옆자리로 돌아왔다.
“잘했어.”
“고마워.”
상기된 얼굴로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마가렛. 뭘 또 그렇게까지.
“오냐. 알렉세이는 뭐래?”
“옛날이랑 다름없이 예쁘다고.”
“…그런 거 말고. 경기 내용에 대해서 별말 없어?”
“아! 음, 특성을 숨기는 게 좋았고 발 기술은 아직 부족한 거 같다 정도?”
정확하게 봤네. 키가 좀 더 클지 몰라서 하체는 적당량의 운동만 시키고 있다.
관절에 무리가 가는 기술은 나중에 가르칠 예정이고, 이는 카우 교수도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다음은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1학년, 그레이스 멜론과 영국 왕립 히어로 아카데미 1학년 윌리엄 브래들리!”
후웁.
숨을 길게 뱉으며 호흡을 고른 퀸이 마가렛에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나를 바라본다.
“저는 조언 같은 거 없나요?”
나는 한껏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두식이 부른 나 상대한다고 생각해.”
꾸득.
장갑이 일그러지도록 양 주먹을 부딪치고 비빈 퀸이 싸늘하게 웃고는 무대로 내려간다.
…브래드 뭐시기, 쟤 괜찮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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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