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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42화 (42/201)

<42화>

넥서스

나는 현재 비어 있는 네 번째 슬롯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 중이다. 갈피는 섰는데 그게 지금 시대에 없다는 게 문제다.

약 5년 후. 그 작품이 혜성처럼 나타난다. 사랑과 우정과 배신과 절망. 그리고 낭만까지 담긴 우주 해적 드라마, ‘솔라 파이러츠’.

닷플릭스로 개봉해서 세상이 망하기 직전까지 흥행하는 대 히트작.

“이게 안 된단 말이지.”

회귀 전에는 이 함선 조종사에 낭만을 느껴 슬롯을 채웠었다. 효과는 탈것 대부분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고 사실상 내게는 큰 의미가 없는 능력이었다.

해서, 이번에는 아예 드라마 통째로 넣으려고 시도해봤는데. 역시 반응이 전혀 없다. 이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어쩔 수 없나.”

내 경험상, 인물을 빙의시키는 낭만들은 한계가 명확하다. 바닥은 높은데 천장이 낮아서 성장이 애매한 느낌.

물론, 블랙 위치처럼 예외인 경우도 있지만, 이는 몹시 드문 케이스다.

게다가 최근 교류전 최대 화제였던 로봇과 공룡의 격돌을 다시 보기로 봐서 그런지, 예전과 달리 사람보다는 주변 기계들. 특히 전함에 눈이 간다.

“리쳇, 네 생각은?”

-전에도 답했지만, 나는 협력자가 생기는 거로 만족해. 애초에 내가 좋다고 보스까지 좋은 건 아니잖아?

파이러츠에 등장하는 함선의 종류는 어마어마하다. 태양계의 패권을 두고 벌이는 우주 전쟁이라 시즌마다 새로운 외계 세력이 등장해서 내가 기억하는 것만 대략 1만 척은 된다.

리쳇의 말이 맞다.

좋아, 심장이 반응하는 씬을 추려보자.

“으음….”

장고 끝에 은발의 귀부인이 녹색 피부의 남자에게 구해지는 에피소드가 다른 기억들보다 훨씬 선명하게 남아 있음을 알아채고 깊게 파고들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를 적측 왕자가 구한다는 포장 잘한 불륜 스토리.

말이 많았으나 어쨌건 뷰 수는 해당 연도 탑이었고 등장한 함선들은 모조리 피규어를 비롯한 장난감으로 변해 불티 날리듯이 팔려나갔다.

그 중 ‘엘라크’라고 초기 경계를 우선으로 하는, 다른 함선에 비하면 종잇장 같은 전함이 있다.

여기에 모두의 상상을 뒤엎고 적군 총대장이자 남주인공이 타고 있어서 논란이 됐었다.

‘나도 당연히 모함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나중에 밝혀지지만, 여러 촬영 기법이 도입돼 시청자를 잘 속인 경우였다. 일단 이 부분은 대충 넘어가고.

아무튼 초계함으로 도망치는 척하며 몰래 은발 귀부인과 만나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렇게 끝났으면 그나마 해피엔딩이라고 우길 수 있었겠으나.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초계함을 함포 한 방에 삭제시켜버리는 순양함, 넥서스가 등장한다.

거기엔 귀부인의 남편이 타고 있었고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가 구구절절하게 이어진다.

아내 가문의 압박, 상관의 유혹, 자식들의 반란.

허나, 사연이고 나발이고 당연히 양 주인공에 몰입돼있던 시청자의 마음도 초계함과 함께 폭발.

이후 솔라 파이러츠 관련 커뮤니티는 상당한 홍역을 치렀다.

에피소드 끝에 반전이 있긴 하지만,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두근.

“오.”

왔다.

‘엘라크?’

잠잠하다.

‘넥서스?’

쿵!

그래, 날벌레처럼 돌아다니는 엘라크보다 육각형 스테이터스에 주포까지 갖춘 넥서스가 훨씬 낭만적이다.

쿵, 쿵, 쿵!

【4번째 슬롯 : 솔라 파이러츠, 넥서스】

곧장 실험해보고 싶었으나,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우주전을 위한 전함이기에 중력이 작용하는 곳에서는 함체를 지탱해줄 기반. 즉, 대량의 물이 필요하다.

“미르토스 해변.”

남산 깊숙한 곳. 비스듬한 절벽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 해변을 구현했다.

이어 기대를 한껏 품은 채 넥서스를 호출.

엄청난 양의 물을 밀어내며 수면 위에 자리하는 순양함.

떨어져 나간 장갑이나 긁힌 자국까지. 드라마에서 봤던 그대로다.

“흐흐. …어?”

좋아하는 것도 잠시.

“이거 조종은 어떻게 하더라.”

모른다. 매뉴얼도 없고 순양함에 말을 걸어도 내장되어 있어야 할 AI는 반응도 없다.

-거기까지는 낭만이 아녔나 봐?

나는 웃음 섞인 리쳇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안에 탄 사람들에게선 조금의 낭만도 못 느꼈거든.

일단 순양함의 내부를 살피기로 했다.

나중에 리쳇을 동원하든 따로 AI를 만들든 이 순양함이 어찌 돌아가는진 파악해야 하니까.

* * *

“에라이.”

새벽까지 살펴본 결과.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최악인 것부터 말하자면.

“기능이 두 개뿐이라니.”

이동과 공격.

명령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 리쳇에게 방법을 알아보라니까, 단호하게 없단다.

넥서스는 자기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조란다.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우주에서 온 거 같다나 뭐라나.

뭐, 그래도 긍정적인 점도 있다.

“공격.”

콰콰쾅!

절벽 안쪽을 붕괴시키는 함포 연사. 초계함을 지운 그 공격을 제한 없이 10회 사용할 수 있다.

리쳇의 하이퍼이온캐논과 비교하면 반의반 수준도 안 되는 위력이지만, 지금껏 나 혼자 즉시 타격이 가능한 공격수단이 없었기에 이 부분은 아주 만족스럽다.

“숙련도에 따라 미사일 개수가 늘어나는 듯하고.”

게다가 리쳇이 띄운 지도의 위치를 지정하면 그 좌표에 정확하게 착탄시킬 수도 있다.

아직 먼 곳에 쏴보진 못했으나 리쳇이 말하길 한국의 바다 정도는 쉽게 커버할 거란다.

‘그리고 보니 그블린이 처음 침공할 때 우주에서 왔었지?’

그때쯤이면 충분히 숙련도가 쌓일 테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각할수록 괜찮네.”

-동감이야. 선장.

삐—

구현을 해제하고 컨테이너로 돌아가는 길. 고막에 짧은 경고음이 울렸다.

-마이너리티리포트 19호. 지도 적색 마크 확인.

그거 맞다. 미래의 빌런. 19호는 내가 19번째로 기억한 놈이란 뜻이고. 위치가…, 부산?

“이놈이 부산에 어떻게 왔지.”

에플 루인스.

지금 시대에서도 적색 수배자다.

동정심을 자극하는 과거사가 유명한데 신파 다 빼고 핵심만 요약하면, 살려고 공장 폐수를 먹다 각성. 깨끗한 물을 폐수로 만들 수 있게 됐다.

각성하자마자 자신의 특성을 자각하고 인근의 수원지를 모조리 폐수로 만들다 잡히자 한 말이 가관.

“나도 먹었으니까, 너희도 먹어. 그래야 공평하잖아?”

놈은 당시 13세였다.

이 잡범을 리포트 19호로 지정한 이유는 재각성 후에 세계적으로 엄청난 민폐를 끼쳐서다.

2018년만 해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면 이상하게 봤으나 2020년엔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이 눈총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앞으로 6년 후엔 누구나 수질 정화 키트를 휴대하고 다닌다.

음식점에서 나온 물이든 공원의 식수대든, 무조건 키트를 통해서 섭취하게 된다.

원인은 에플 자식이 지구의 물에 ‘오염’이라는 개념을 풀어버리기 때문.

그리고 감옥에서 자살. 유서엔 사과는커녕 ‘FucX it all.’이 전부.

정화와 관련된 각성자와 과학자들이 힘을 모아 극복해내지만, 그동안 겪는 고통과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빈곤국들은 엄청난 타격을 받아 나라가 사라지기도 했었다.

저 정신 나간 놈 하나 때문에 말이다.

“신고는?”

-대응은 하겠다는데, 알잖아.

대한민국 경찰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매스컴을 탄 사건이면 거의 뭐 자기부상열차처럼 내달리지만, 지금처럼 이슈가 없는 상황에서는 반응이 느리다.

어느정도 이해는 한다. 신고 하나하나에 전력을 기울이긴 쉽지 않겠지.

“이러니까 세상은 아직 히어로가 필요한 거야.”

-꼭 자기가 히어로인 것처럼 말한다?

“한가하다 보면 빌런도 가끔 좋은 일 하고 그러는 거지.”

-거짓말. 빌런 수집이 목표면서.

“오, 어떻게 알았냐?”

-그렇게 사악하게 웃으면 안토니오 골드우드도 눈치챌걸.

…그 정도였어? 좀 충격인데.

* * *

툭.

“오메. 미안혀, 총각.”

“야 이 할망구야. 그냥 가려고?”

“응? 뭐라꼬?”

“에이 씨. 시대가 어느 시댄데 통역 앱도 안 켜고 다녀! 아프니까 돈 내놓으라고, 돈. 머니!”

혼자서 손녀를 키우는 박태연 할머니는 젊은이의 윽박에 놀라 주저앉았고 그 과정에서 수레를 놓치고 말았다.

“할무니~ 어어, 악!”

하필이면 할머니를 돕기 위해 언덕 아래에서 달려오던 손녀가 그 수레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치였다.

다행히 빈 수레라 아이에게 큰 충격이 가해지진 않았으나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정신을 잃어 조치가 필요한 상황.

박태연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구시대 유물인 스마트 폰을 꺼내 119에 신고려는 찰나.

탁.

“돈 내놓으라고!”

“어, 어? 내, 내 손녀가.”

떨어진 스마트 폰을 붙잡고 다시 전화를 걸려는 할머니의 팔을 잡아채는 에플 루인스.

“이 노인네가! 돈, 꺼억—”

“말끝마다 돈. 돈. 돈. 거지새끼라고 자랑하냐.”

망토를 걸치고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에플 루인스에겐 소중한 급소를 걷어찬다.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꼴사납게 꼬꾸라지자 눈에 초점이 잡힌 박태연 할머니가 신고하는 것도 잊고 손녀를 향해 달렸다.

“쉐, 쉐리야!”

“응급처치는 했으니까, 걱정 마쇼. 곧 구급차도. 아, 저 오네.”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와 손녀와 할머니를 싣는다.

“고마워, 젊은이. 고마워!”

그렇게 앰뷸런스와 횡액을 당할 뻔했던 두 사람이 떠나고 이곳에는 네 명의 남자가 남았다.

신고받고 온 히어로 둘과 뽀개진 에그가 괜찮은지 눈물을 머금고 확인하는 에플. 그리고 정체불명의 망토남.

“너도 저놈과 한패냐.”

백의가 시그니처인 화이트윈소드는 자신과 반대되는 복장의 남자에게 기묘한 껄끄러움을 느꼈다.

“전혀. 나는 이 빌런 놈 잡으러 왔다.”

망토남이 에플 루인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답하자 그 앞에 있던 쫄쫄이를 입은 여자 히어로, 헤비플라이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코스튬은 낯설군. 어디 소속이지?”

방패와 철퇴. 타이즈와는 어울리지 않는 장비를 착용한 그녀가 앞으로 나선다.

“내 소속은…, 다크 넥서스다.”

* * *

칸탄테에게 언급했다시피 부캐는 한 번 만들어두면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오니까, 적당히 생각해둔 게 있다.

-다크 넥서스.

“다크 넥서스.”

어?

그냥 넥서스라고 하려 했는데. 리쳇이 속삭이는 말을 따라 하고 말았다.

‘아오. 야!’

-깔깔깔!

미친 듯이 웃는 리쳇. 그게 그렇게도 좋나.

“다크 넥서스? 처음 듣는군.”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쪽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서민의 안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넓게 보면 나도 서민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소속부터 복장까지. 지금 네 모든 게 수상하다는 건 알고 있나? 서에 가서 이야기하지.”

부산은 아직 경찰과 연계하고 있는 건가.

수도 쪽은 킬링랫 사태 이후로 히어로들이 공무원을 믿을 수 없다며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에 따라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데, 이건 저들끼리 치고받다 보면 해결되기는 한다.

부산도 서울의 영향을 받아 혼란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이러면 일이 좀 복잡해진다.

‘어쩔 수 없지.’

“통화 좀 할게.”

“갑자기 무슨.”

뚜르르—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내 가족뿐이다. 넌 누구냐.

“이야, 그간 잘 계셨습니까?”

한순간에 말투가 변한 내 모습에 주춤하는 두 히어로의 반응이 재밌다.

-누구냐고 물었다.

“접니다, 하얀 은사님. 아니, 이제 당 대표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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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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