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43화 (43/201)

<43화>

에플 루인스

예능, 시사, 다큐. 심지어 드라마 카메오까지 출현하며 시민들에게 확실하게 얼굴을 알린 양효민 의원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TV 화면에서 사라졌다.

“오늘도 섭외 연락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흔한 일이다. 화제의 인물을 섭외해 단물만 쪽 빨고 버리는 건 방송계나 정치계나 마찬가지니까.

“자네 잘못이 아님을 아네.”

허리를 숙이는 보좌관의 모습에 손사래를 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은 양효민이었지만, 사실 속이 쓰렸다.

‘조롱마저 감내하고 나선 일이건만.’

대중의 관심은 태풍과도 같아서 몰아칠 때는 대단한 풍광을 자아내나 힘을 잃고 흩어지면 금방 관심을 끊어버린다.

특히 다음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히어로 협회장, 징역!]

[협상가와의 정면승부를 벌인 인질범의 정체는?]

[서히아 1학년 남 모군, 그는 이미 준비된 히어로였다.]

[트윈버스터의 인터뷰, ‘학생답지 않은 판단력과 배짱.’]

남만혁.

그 소년의 이름이 세계적인 화두에 오르자 ‘당 대표 방송인’이라는 캐릭터는 빠르게 잊혔다.

적어도 2년은 끌고 가면서 얼굴을 잊지 않도록 할 계획이었으나 저 사건 하나 때문에 모조리 어그러졌다.

뚜루루—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벨 소리. 가족 전용 홀로폰에 떠 있는 낯선 번호.

-…아니, 이제 당 대표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여전히 건방지고 나이에 맞지 않는 어투.

“무슨 일인가?”

-별 건 아니고. 빌런 하나를 잡았는데. 은사님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야.

“내가 왜 도와야 하지?”

-아, 그리고 보니 요즘 TV에 얼굴이 안 보이던데. 정무가 많이 쌓여계셨나 봐?

“…….”

-엮어줄게.

“뭐라?”

-빌런을 퇴치한 모 정당의 당 대표. 신선하잖아. 혈기 왕성한 젊은 친구들에게는 무조건 먹힐 거고. 전란을 겪은 7080세대도 나라는 지킬 놈이라고 하겠지.

그럴듯하다.

저기에 살 좀 붙이면, 두고두고 회자되며 포지티브 이미지를 뿌릴 수 있다.

보좌관을 보자 그녀는 빠르게 손가락을 놀려 허공에 띄운 홀로패드에 글을 썼다.

[언론에 노출되면 반드시 당 대표님을 칭송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셔야 합니다.]

합당한 의견이었기에 소년에게 그리 전하고 더불어.

“나를 너의 은사라고 소개하도록.”

-그거야 일도 아니지. 그럼 이쪽 일은 잘 부탁할게. 은사님.

너무나도 빠른 수락. 그 말이 어떤 여파를 미칠지 알고 저런 판단을 내린 걸까.

무언가 찝찝함을 남긴 통화를 끊고 소년이 요구한 조건을 들어주기 위해 자신의 대학 동기이자 현 부산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창룡이. 뭐? 내가 언제 부탁할 때만 전화했다고. 됐다, 끊어 끊어. …큼. 거 해운대 쪽에 문제 하나 생겼을 텐데 내가 신원을 보장할 테니까 보내줘. 아, 거래 같은 거 아니라니까.”

* * *

히어로 둘은 동시에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 돌아갔다.

아직도 가랑이를 붙잡고 끙끙대는 에플 루인스를 발로 건드리자.

“죽여버릴 거야. 너, 내가 어떻게든 죽인다!”

“그러든가.”

건성으로 답하며 이 녀석을 빌텔까지 옮길 트럭에 태우려는 순간.

꾹—

놈이 품속에서 뭔가를 누르는 게 보였다. 재빨리 놈의 손을 잡아채 밖으로 꺼내자.

히죽.

“늦었어. 시X롬아.”

“리쳇!”

-신호 가로채기 실패. 미안. 너무 가까웠어.

리쳇은 지도를 띄웠고 남해 연안에 어선으로 위장해 있는 해적들의 모습을 확대했다.

“형님들 오면 넌 뒤졌어!”

한패가 있었을 줄이야. 하기야, 생각해보면 치안만큼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한국에 적색 범죄자가 밀입국하는 것부터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어선에 민간인은?”

-없음. 전원 위장한 범죄자.

“악질?”

-매우.

그럼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인제 와서 용서를 빌어봐야 소용없어. 뒈져라! 크히히히!”

나는 둘째 치고 어선에서 내린 해적들이 이놈을 구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무리하더라도 신속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미르토스 해변.”

공간은…, 아슬아슬한가.

해운대의 바다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지중해가 정면의 내리막길을 따라 길게 구현됐다.

“넥서스.”

내 발아래에서 구현되어 나와 에플을 태운 채 부상하는 넥서스는 이내 도크에서 진수하듯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가 바다에 진입할 계획이다.

“리쳇, 내가 찍은 곳에 스모그.”

-해당 포인트에 스모그 생성 중, 완료.

알다시피 리쳇의 특기는 날씨 조종. 그거 하나로 지구를 지배할 뻔하지 않았던가.

위성뷰로 보니 어선을 타고 있던 해적 놈들이 당황하며 입을 빠르게 놀린다.

새벽 시간대라 사람이 많이 없다고는 하나 크기가 크기인 만큼 들키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목격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넥서스를 가릴 정도의 스모그를 시내 곳곳에 뿌렸다.

선수에 팔짱을 끼고 서 있자 옆을 지나치는 오래된 빌딩 옥상에서 셔터 소리가 들렸다.

빨랫줄에 늘어진 옷가지 뒤로 몸을 숨긴 소년을 발견했다. 녀석의 손에는 오래된 아날로그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저것에 접근할 수 없다는 리쳇의 보고가 들려왔다.

“아.”

나와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검지만 펴서 마스크 앞에 가져다 댔고 스쳐 지나가는 찰나.

“쉿.”

침묵할 것을 요구하자 소년은 카메라를 떨어트리며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바다에 진입. 넥서스의 주포를 어선을 향해 겨눴고.

“파이어.”

인근 건물의 유리창을 박살 내는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스모그를 벗어나지 않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미사일은 시야가 차단돼 허둥대는 어선에 떨어졌다.

폭발, 비명, 침몰.

아마 지금쯤 해안경비대는 난리가 났겠지. 레이더에 어선이 동시에 침몰한 거로 나올 테니까. 솔직히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양효민에게 전화해둬서 다행이네.’

미르토스와 넥서스의 구현을 해제하고 만에 하나를 대비해 복장을 갈아입은 뒤 스모그가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문제없음.

‘서울까지 운전 좀 부탁하자.’

-알았어.

그렇게 에플 루인스는 빌텔의 2번 방에 갇혔고. 훗날 그블린의 수원지를 폐수로 바꿔 이 개 사단을 무력화시킨 공로로 사면받을 때까지 지독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 * *

[일출 갤러리]

[제목 : 오늘 뉴스에 나온 고스트쉽 본 썰 푼다.]

[때는 바야흐로 이 몸께서 몹시 상쾌하게 기침한 순간임. 15년산 와인보다도 깊게 숙성된 베개의 침 냄새를 맡으며 눈을 뜨면서 직감함. 오늘은 무조건 퓰리쳐급 일출을 찍겠구나. 근데 망함. 무당벌레 같은 누나년이 내 카메라를 가지고 나갔더라. 그래서 일단 아빠가 꼬불쳐둔 비싼 카메라를 들고 나옴. 컬렉션이랬는데, 아무튼 이제 본론임.

아니, 옥상에 왔는데 엄청나게 안개가 껴 있는 것임. 망했다 싶었는데 안개 안쪽에서 뭐가 움직이길래 난간 쪽으로 가까이 갔더니.

[사진 첨부]

보임?

엄청 오래된 카메라라 희미한 건 감안하셈. 저 배랑 저 남자가 있었음. 근데 X벌 나랑 눈이 마주쳐버림. 진짜 사람 수백은 죽인 것 같은 눈으로 이럼.

“쉿.”

이게 끝임. 그럼 썰 다 풀었으니 나는 엄마가 소금 얻어 오래서 가봄. 수고.]

[댓글 창]

-저거 합성 아냐?

↳가짜일 수가 없는 게. 아날로그 카메라 필름은 지금 기술로 조작을 못 한다.

↳아아, 이것이 갓스트 테크놀로지라는 것이다.

-연안의 어선이 증발한 게 저거 때문인가?

↳부산 히어로들이 정보 모으는 중이라니까, 오피셜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봐야 할 듯.

-정체 떴다. 다크 넥서스란다. 어선에는 적색수배자들이 타고 있었고.

↳그게 뭔데.

↳몰라. 히어로랑 협업하는 단체래.

↳히어로는 아니다?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음. 범죄자들 죽였으니까 빌런은 아닌 듯.

-아는 히어로가 이야기해줬는데, 다크 넥서스가 할머니랑 애기 괴롭히던 빌런 퇴치했대.

↳진짜 새로 생긴 히어로 단첸가.

↳그럴지도.

-근데 복장이나 컨셉이 멋있긴 하다.

↳다크 히어로 나올 때 되긴 했지.

↳맞아. 너무 착한 애들한테만 포커스가 모여서 답답했어.

-쟤는 빌런의 인권이고 뭐고 없나 보네.

↳과격하긴 해.

↳해적은 죽어도 된다고 봐.

↳그건 아니지, 내 생각에는—

논란을 통해 점화된 이 이슈는 소년이 올린 사진을 기반하여 사실과 거짓이 붙으면서 다크 넥서스가 히어로 협회와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라고 알려졌다.

이런 오해를 받으면 뒷일을 생각해 서둘러 수습하는 게 정상적인 사고회로이나 전 슈퍼빌런 남만혁은 과연 남달랐다.

“냅둬. 여차하면 양효민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튀지 뭐. 부캐가 왜 부캐겠어. 언제든지 본캐로 갈아탈 수 있으니까 부캐인 거야.”

-역시. 세기의 악당답네.

“칭찬 고맙고.”

* * *

“잘 부탁해요. 꼭 제 아들에게 전해주세요.”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스위프트의 가족은 그리 부유한 집안이 아니다. 오히려 스위프트를 히어로로 키우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였고 그게 전부 빚이 되었다.

이를 스위프트도 알기에 학비가 저렴한 서히아를 고른 면도 없잖아 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앱솔루트레터가 언제 약속 못 지키는 거 보셨나요. 짐은 이게 전부죠?”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히어로, 앱솔루트레터. 사실 히어로라기 보단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각성자에 가깝다.

특성은 ‘보관’. 완벽에 가깝게 밀봉된 물건을 배에 달린 주머니에 넣으면 꺼내기 전까지 시간이 정지한다.

앱솔루트레터가 탄 비행기가 중국 상공에 진입하자 일이 벌어졌다.

상주하던 용병이 돌연 목에 피를 뿜으며 죽었고, 승객들이 도미노처럼 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쓰러지는 모습에 앱솔루트레터는 재빨리 비상탈출 장치를 눌렀다.

탁.

“미안하군.”

딱딱하고 두꺼운 손에 잡혔다. 곧장 목을 꺾으려던 괴한이 돌연 행동을 멈췄다.

츠즉.

-알렉세이, 살려서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으읍, 읍!”

이날. 비행기 하나가 전쟁을 원하는 테러리스트에 의해 나포되었다는 뉴스가 세상을 잠시 떠들썩하게 했고 다행히 안에 타고 있던 승객과 히어로는 무사히 탈출했다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줬다.

* * *

며칠 후.

“이상하군.”

스위프트는 부모님이 보내주신 영양음료를 분명히 마운틴 짐의 본인 전용 냉장고에 넣어뒀었는데 지금 보니 깨끗하게 없어졌다.

주변을 돌아보자 열심히 훈련에 매진 중인 이들과는 달리 유독 이쪽의 눈치를 보는 언데드 한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식.”

달, 달각?

흔들리는 안광, 부자연스러운 몸짓. 결정적으로 갈비뼈에 묻은 음료 자국.

“여기 있던 음료수. 네가 먹었나?”

달각!

일단 부정부터 하는 일식의 모습에 스위프트는 미간을 좁히며 몇 가지 정황증거를 들이밀자 어깨를 늘어트리며 자백했다.

“왜 먹었지?”

바닥에 어색한 문자로 글을 쓰는 일식.

-두식, 삼식 먹었다. 나만 못 먹었다.

일식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순 없었으나 제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는 점은 알아챈 스위프트는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대련장 쪽으로 고갯짓한다.

“내가 이기면 100만 원을 받겠다. 대신 네가 이기면, 없던 일로 하고 나머지 한 병도 넘겨주지.”

달각!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