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언데드 클럽 발족
남만혁에게 스컬러를 부여받은 유일한 언데드, 일식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산의 제1 노동력이었으나 두식과 블랙 팽의 등장으로 인해 노동 수익이 크게 줄고 말았다.
당시에는 그간 노동력을 너무 값싸게 팔고 있다는 생각에 잘되었다고 여겼으나. 전투에 특화된 삼식이까지 등장하며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게 변하자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대규모 언데드 계약이 진행됐던 날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활동 시간을 연명하고 있는 상황.
달각.
일식은 오식, 생전에 백무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칼잡이 해골을 불렀다.
그는 계약자에게 받은 부지깽이 끝으로 바닥에 글을 썼다.
-무슨 용무지?
일식은 후배 주제에 손가락이 아닌 도구를 쓰는 백무군의 모습이 고까웠으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기에 서둘러 본론을 전했다.
-이대로는 우리, 잊힌다.
-관계없다.
백무군이 살았던 이계에는 무공이라는 기술이 존재하고. 그 중엔 이 세상의 마나 호흡법처럼 에너지를 체내에 축적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이를 통해 스스로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일식처럼 남만혁에게 크게 얽매여 있지는 않다.
한때는 그 기술을 탐냈던 일식이었으나 삼재심법이라는 기본적인 공부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포기했다.
-잊히면 너도, 나도 지워진다. 우리는 언데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잔류하고 주기적으로 관찰당해야 한다.
백무군은 일식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우선 이야기는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너는 본좌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본좌라는 단어 선택에 안광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백무군을 쳐다본 일식이 글을 이었다.
-계약자는 이곳을 찾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음. 어린 동량들을 가르치는 건 좋은 일이지.
-우리도 하자.
-뭣이라?
바로 어제 인근의 작은 협곡의 절벽을 파내 겨우 수련동을 만든 백무군은 일식의 제안이 몹시 불쾌했다.
-계약자의 눈에 띄어야 한다.
앞서 했던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반복하는 일식.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백무군에게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법칙이었으나 이 둘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 굴. 나 아니었으면 못 만들었다.
일식이 돕지 않았다면 굴의 완성에 몇 달은 더 걸렸을 터였기에 백무군은 턱을 열고 나오지 않는 숨을 길게 뱉었다.
-알았다. 본좌가 어찌하면 되겠나.
-아이들의 대련 상대면 충분.
안 그래도 박투를 주력으로 삼은 두 아해의 군더더기가 남은 움직임이 눈에 걸렸던 백무군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다른 언데드 하나가 생각나 이를 언급했다.
-그러지. 그 녀석은?
흘낏. 지금도 언데드 숙소라 적힌 컨테이너 안에서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작은 체구의 해골.
본명 이고강. 이세계로 전생해 마왕을 무찔렀으나 믿었던 이들의 배신으로 인해 멘탈이 터진 언데드.
매저드마저도 이는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식은 그의 상태가 심각함을 알았으나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무시하려 했으나 갑자기 녀석의 동공이 움직이는 게 아닌가.
하여 시선을 쫓아가니 공용 냉장고에 주황색 음료를 넣는 스위프트가 있었다.
소년이 떠나도 한참 그 자리에 머무는 이고강의 안광. 스위프트를 상징하는 회오리 스티커가 붙은 주황색 음료를 꺼내자 이고강의 눈이 따라온다.
-본좌의 살기에도 꿈쩍 않던 녀석이거늘. 먹여보는 게 어떤가.
일식은 잠시 망설였으나 나중에 자기가 값을 치르면 된다는 생각으로 뚜껑을 따고 이고강에게 다가갔다.
올려다보는 녀석에게 음료를 건네자 멀뚱히 바라보기만 한다. 그래서 언제나 반쯤 열려 있는 입 안으로 주황색 액체를 흘려보냈다. 그러는 과정에서 상당량을 흘렸고 일식의 뼈에도 튀었다.
-흡수하는군.
척추를 타고 흘러내린 음료는 뼛속으로 빨려들었고 이내 회색의 흐리멍덩하던 안광이 음료와 동일한 색을 띠며 손톱 크기의 원으로 압축되었다.
절걱.
뻑뻑한 턱관절이 힘겹게 움직이더니 이내 무어라 말을 하는 듯했다.
일식은 자신이 처음 언데드가 되었을 때 이러했음을 떠올렸고 바닥에 글을 쓸 수 있도록 백무군이 반응하기도 전에 부지깽이를 빼앗아 이고강에게 쥐여줬다.
한참 머뭇거리던 이고강은 자기 몸을 내려다보곤 천천히 바닥에 글을 썼다.
-저는 죽었나요?
끄덕.
-그렇군요. 지구는. 이 세상은 멀쩡한가요?
끄덕.
-다행… 이네요.
백무군은 이고강의 손에서 부지깽이를 가져와 그의 글 위에 덮어쓴다.
-고향이 어딘지는 기억나나?
-고향….
-기억나는 대로 써보게.
-갈매기 소리, 바다, 포말, 수학여행… 맞아요. 저 수학여행 중이었어요.
수학여행이 뭔지 모르는 백무군이었으나 그 역시 자신처럼 어느 정도 생전의 기억이 있다는 걸 떠올리곤 고개를 주억였다.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나?
-가보고 싶어요.
-그렇다면 체력을 길러라.
일식은 잘 나가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백무군을 쳐다봤다.
-체력이요?
-그래, 천 리를 쉬지 않고 달릴 체력은 있어야 응당 사내라고 할 수 있지.
-저, 여자인데요.
-뭣이? 실례했군. 난 이만 가볼 테니. 일식. 뒷일은 부탁하지.
일찍 강의가 끝나 마운틴 짐에 오는 마가렛과 대련을 하겠다며 자리를 뜨는 백무군.
일식은 없는 혀를 차고는 백무군에게 했던 제안을 이고강에게도 했다.
-그러니까, 학생들을 가르치라는 건가요?
-그러면 계약자가 일당을 줄 거다. 그 돈을 모아 네 고향에 다녀오자.
-…괜찮을까요. 저, 이렇게 돼 버려서.
-확답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멀리서 보는 건 문제없다. 부모님은 계시나?
이고강은 오늘 날짜가 이세계로 떨어진 날과 같다는 걸 알고는 기뻐했다가 다시 어깨가 처진다.
-네, 엄마랑 동생…… 보고 싶어요. 그런데 얼굴 기억이 안 나요.
-그래, 가자.
-저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일식.
-아니요, 그거 말고. 진짜 이름이요.
-모른다.
-네?
-나는 너희처럼 생전 기억. 없다.
-죄송해요.
-괜찮다. 익숙. 그보다 너는 싸울 줄 아나?
-네. 저 꽤 강해요.
반달을 그리는 주황색 안광. 일식은 이고강의 실력을 테스트할 겸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백무군이 마련해둔 훈련장으로 데려왔다.
일식이 방어용 미트를 들고 공격해보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잠시 머뭇대던 이고강이 허공에서 장식 없는 새하얀 바스타드 소드를 소환한다.
하단세를 취하고 체중을 앞꿈치에 실은 이고강. 이후 안광이 확장됨과 동시에 사라졌다. 일식의 뒤편에 다시 나타났을 때는 그의 왼팔이 떨어진 뒤였다.
달각.
-엄청난 속도.
-헤헤, 초신속이라고 제 특기예요.
이름, 이고강.
특성, 이계전생 외 다수.
특이사항, 용사.
이세계 마왕 단신 토벌.
상시 스테이터스, 카모플라주 외 다수.
일식은 대충 상대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팔을 다시 조립해 끼우고 스컬러를 의식해 검은 머리칼을 빳빳하게 세웠다.
-다시.
흉부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검격을 온전히 흡수한 일식이 이번에도 자신의 뒤로 지나가는 이고강의 팔을 잡아채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러자 이고강이 놀라 입을 벌린다.
-보였어요?
받은 충격에 비례해 종합적인 능력이 향상되는 블랙 컬러였기에 가능한 일이라 설명하자.
-신기하네요. 제가 쓰러트린 마왕도 비슷한 힘이 있었는데….
-무기를 잘 다루나?
-네. 날붙이, 둔기, 채찍, 방패. 가리지 않고 썼어요.
이 정도 수준이면 학생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창 활약할 때보다는 감이 떨어졌다는 이고강의 말에 며칠간 백무군과 일식이 번갈아 가며 쉬지 않고 대련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오늘.
냉장고에 음료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스위프트가 일식을 추궁하다 대련을 신청한다.
“내가 이기면 100만 원을 받겠다. 대신 네가 이기면, 없던 일로 하고 나머지 한 병도 넘겨주지.”
100만 원. 일식은 백무군, 이고강을 하루 보살피는 대가로 5천원을 받는다.
활동 시간에 필요한 돈을 제하면 1년 연봉 수준. 그걸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는 스위프트의 잔혹함에 치를 떤 일식이었으나 자신이 훔친 게 맞고 회피할 생각이 없었기에 대련을 받아들였다.
“규칙은 항복하는 쪽이 지는 거로.”
달각.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언데드에게 유리한 조건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스위프트 역시 상대가 언데드였기에 봐줄 생각이 없었고, 회전하는 칼날이 달린 구슬 수백 개를 허공에 뿌렸다.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빨리 끝내지.”
남만혁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쳤을 건방진 대사였으나 일식에게는 긴장감을 끌어올릴 만한 위협이었다.
한 방이 강한 공격은 능력을 큰 폭으로 올려주지만, 저렇게 자잘한 공격은 운동능력이 조금 상승하는 게 전부다.
키이잉!
맹렬히 회전하는 칼날들이 일식에게 쏟아졌고 이를 맨몸으로 막아내던 일식은 오늘 오전 이고강이 사용하던 방패술을 떠올렸다.
-원거리 공격의 궤적을 읽었으면 받아내기보다 상대 쪽으로 튕겨내는 게 나아요. 제 기술 중에 투사체 반전이라는 게 있는데—
그녀처럼 원거리 공격을 발사지점까지 돌려보내지는 못해도 쳐내는 노하우 정도는 익힌 덕에 칼날 구슬을 전부 떨어트리는 데 성공했다.
스위프트는 그의 선전에 당황하였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게 일식의 공격을 자연체로 변해 흘렸다.
일식이 의미 없는 주먹질을 하는 동안 스위프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구슬들을 염력으로 제어해 공중에 띄운 뒤, 서른 개 이상의 구슬을 뭉쳐 둔기처럼 활용하자 일식이 대응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난다.
그때 일식의 시야 끝에 이쪽을 지켜보는 백무군이 보였다.
-검에 힘을 담는 법? 내공을 말하는 건가. 언데드인 자네에게 혈맥이니 떠들어봐야 이해하기 힘들 테지. 간절하게 염원해보게. 내공도 결국 내 신체의 일부일 뿐이다.
블랙.
스컬러를 통해 부여된 힘. 외부의 충격이 복합적인 능력을 상승시키는 이유는 뼈 전체로 퍼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한 일식은 지금 내지르는 이 주먹에 모든 힘을 모으겠다는 의지를 일으켰다.
일순, 일식을 덮고 있던 검은 아우라가 주먹에 모조리 빨려들어가며 묘한 소리가 대련장을 울렸다.
그우우—
스위프트는 지금껏 본 적 없던 현상에 당황하기보다 재빨리 구슬들을 전부 끌어모아 전면에 벽으로 세웠다.
이윽고 검은 주먹이 쇠구슬로 이루어진 벽을 때렸고. 충격파가 한차례 퍼진 뒤, 구슬들은 먼지가 되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가루들 사이로 일식의 검푸른 안광이 빛났고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일식이 나타났을 때는 스위프트의 관자놀이에 팔꿈치를 박아 넣을 때였고 찰나의 당황에 자연체가 풀린 스위프트는 그대로 일격을 허용. 기절하기에 이른다.
넘어지는 스위프트를 백무군이 받아내 매트 위에 눕히며 일식에게 물었다.
-방금 그건?
-모르겠다.
-이고강의 보법 같았다만.
-그럴지도.
백무군은 성가신 이웃 정도로 여겼던 일식에게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다.
‘생전에도 연이 없었던 무재를 여기서 보는구나.’
이는 일식을 응원하던 이고강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내 초신속을…!’
* * *
스위프트가 일식이에게 털리고 있을 무렵 남만혁은 오래간만에 빌텔을 순찰 중이었다.
“살만해?”
초췌하고 우중충했던 딥다크마인드는 어디 가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남자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는 얼굴로 답했다.
“당연하지!”
누구냐 너. 내 작은 딥다크마인드가 이렇게 활기찰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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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