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두 사람의 각오
활짝 웃는 딥다크마인드라니.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 심지어 목의 밧줄 흉터가 넓게 퍼져서 그런지 그럴듯한 목걸이 타투로 보인다.
“신입은 네가 잘 챙기고.”
“저런 놈은 내 눈짓 한 번이면—”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르자 대번에 살인 직전까지 같던 그 섬뜩한 분위기로 변한다.
역시, 사람이 쉽게 달라질 리 없지.
“쓰읍.”
이놈의 특성은 교감처럼 정신 조작에 특화돼 있어서 늘 조심해야 한다. 앞으로 이곳에 오는 빌런들이 죄다 저놈 쫄따구가 되면 곤란하니까.
긴장감을 주입할 겸 미르토스 해변으로 산소통 없는 수중 체험을 시켜준 뒤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범인은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고 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에플 루인스는 파리한 안색으로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왜 그래? 날 죽인다던 자식이 겨우 이런 거로 떨어서야 쓰나.”
“으, 으으.”
놈은 저 스스로 열려 있는 2번 방으로 기어가 문을 닫는다. 어차피 잠금장치는 밖에 있었기에 소용없다. 내가 다가가자.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엎드린 채 머리를 감싼다. 아니, 진짜 왜 이래.
“야.”
“예, 예!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좀 반항을 해야 적당히 굴리든지 할 텐데 몽둥이찜질을 당한 들개처럼 굴어대니 흥이 나질 않는다.
리쳇에게 두 빌런의 케어를 부탁하고 빌텔을 나오자 전화가 걸려 왔다. 익숙한 번호.
-남만혁 학생, 지금 어디지요?
다짜고짜 위치부터 묻는 교감. 빌텔 인근이라 말하긴 좀 그래서 아카데미로 가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위치를 말하세요. 중요합니다.
교감의 흔들리는 목소리에 뭔가 일이 터져도 제대로 터졌구나 싶었으나 그와 별개로 빌텔의 위치는 불 수 없었기에 말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셔야 협조를 하죠.”
-……잘 들으세요. 남만혁 학생. 스위프트가 실종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가 마운틴 짐이며 당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습니다.
“저는 주말 내내 바깥에 있었는데요.”
-그걸 증명할 수 있나요?
증명하려면 내가 다크 넥서스라는 걸 까야 하는데… 이 일에 그만한 가치는 없다.
“혼자 있었던지라 증명은 어렵겠고. 대신, 스위프트를 제가 찾으면 어떻습니까.”
누명을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벗으려면 문제의 원흉을 제거하면 된다.
-유력 용의자인 당신에게 이 일을 맡기긴 어렵겠군요.
“히어로를 감시로 붙여도 좋습니다. 제가 용의자면 뭘 하는지 보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후후.
홀로폰 저편으로 교감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재밌네요. 그렇게 하죠.
자세한 건 아카데미로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는 교감의 전화를 끊고 서둘러 마운틴 짐으로 향했다.
내 컨테이너로 돌아오니 언데드들과 퓨즈, 번이 모여서 숙덕거리고 있었다.
“아빠!”
“오냐, 스위프트가 실종됐다던데. 너희 뭐 아는 거 없냐? 엥, 너 뭐야.”
언포스에 오식과 육식의 이름이 ‘백무군’과 ‘이고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이고강이 평범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워 묻자.
일식이가 거드름을 피우며 일어나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요약하면, 대련 후 기절한 스위프트를 잠시 매트 위에 방치한 사이 사라졌단다.
“그러니까, 네가 스위프트의 음료수를 훔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는 거네?”
달각?
그런가?
“뭐가 그런가야, 맞구만. 어휴. 그래서 흔적은?”
전부 동시에 고개를 젓는다.
“리쳇, 뭐 없어?”
-전혀.
항상 산을 관찰 중인 리쳇이 발견을 못 할 정도면 십중팔구 각성자 짓이다.
마법은… 매저드가 교내에 버티고 있는 이상 불가능하고.
빌어먹을. VZ를 빨리 만들던가 해야지. 내 황금 같은 주말을 남자 찾으러 돌아다니는 데 써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때 발신 번호가 없는 메시지 하나가 도착한다.
[스위프트를 찾고 싶다면 블라디보스토크 프리모르스키 오키버거로 혼자 와라. 이 메시지는 10초 후 자동 삭제된다.]
‘저기 어디야.’
-여기.
지도를 띄워 예상되는 지점에 점을 찍는 리쳇. 대충 알겠다. 나는 곧장 교감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 내용을 전했다.
-정보가 없는 우리 입장에서는 안 갈 수가 없겠네요. 좋습니다. 마침 남만혁 학생을 감시할 교수분도 모셨으니 본관 옥상에서 합류해 출발하세요.
“알겠습니다.”
혼자 오라는 말까지 전했는데도 교수를 보낸다는 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옥상의 착륙장에 도착하자 과연. 그럴만한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네 짓이냐.”
고스트핸드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비행기의 문을 열며 나를 탓한다.
“제가 그런 게 아니고.”
“변명은 됐으니까 타라.”
교감의 전용기는 순식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를 떨구고 돌아갔다.
가장 최근에 전란을 겪었던 국가답게 거리엔 아직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고스트핸드에게 러시아에 온 적이 있는지 묻고자 돌아봤을 때는 이미 모습을 숨긴 뒤였다.
언제부터였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마 후 리쳇이 찍은 위치의 건물로 들어서자 저 멀리 아는 얼굴들이 사이좋게 햄버거를 뜯고 있었다.
“스위프트.”
컥, 큼.
녀석의 어깨를 짚으며 부르자 빵이 목에 걸렸는지 콜라를 한참 들이킨 다음에야 나를 돌아봤다.
“남만혁인가. 빨리 왔군. 이쪽은 너도 알겠지?”
“마가렛은 잘 있나?”
알렉세이. 교류전에서 마가렛과 격돌하고 패배했던 인물.
둘이 왜 같이 있는지는 잠시 후 이 테이블로 오는 또 한 사람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네가 남만혁? 반갑다, 나는 앱솔루트레터. 네게 문자를 보낸 게 나야.”
앱솔루트레터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창백한 얼굴이었다.
-앱솔루트레터, 39세 남자. 배송을 생업으로 삼음. 특성은 보관. 얼마 전 하이잭 테러에서 살아남음.
“예, 남만혁입니다. 스위프트 데려가려는데 괜찮죠?”
이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 봐도 느낌이 온다. 여기에 엮이면 무조건 고달파진다.
스위프트의 손목을 잡고 일으키려 하자 알렉세이가 내 어깨를 끌어당겨 강제로 소파에 앉힌다.
“곤란하다.”
“뭐가, 아니. 알고 싶지 않아. 그냥 스위프트만 보내주면 안 될까?”
고개를 젓는 세 사람. 스위프트 너까지 왜 그러냐.
“나는 러시아 스파이로 교육받았다.”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아무렇지 않게 극비사항을 고백하는 알렉세이.
하아….
저 눈, 저 말투, 저 분위기.
나는 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과거 나를 살리고 홀로 적진에서 죽음을 각오하던 퀸. 그것과 닮아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뒤를 생각지 않는 인간의 모습.
“말해 봐.”
“나는 누군가에게 약점이 잡혀 그를 위해 일하고 있다. 세뇌를 당해 정체를 밝힐 수도 없지. 이분도 마찬가지다.”
앱솔루트레터가 알렉세이의 말을 받는다.
“스위프트를 훔친 건 나야. 강제로 재각성이 된 이후에는 모든 걸 보관할 수 있게 됐거든. 생물도 시간도. 나 자신도.”
그의 배가 불룩해지더니 이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난다.
사긴데 저거.
그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앱솔루트레터는 쓴웃음을 머금고는 입을 열었다.
“느껴져. 나는 아마 오늘이 한계일 거야.”
그는 강제로 각성한 부작용으로 인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정리하면, 알렉세이는 X에게 약점이 잡혔고 세뇌 때문에 X와 관련된 정보를 발설할 수 없다.
앱솔루트레터는 비행기 테러 사고 때 X에게 세뇌당해 스위프트를 납치했다.
그 외의 공통점은 둘 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 정도.
“그놈의 목적은 뭐지?”
“모른다. 나는 앱솔루트레터를 활용해 스위프트를 살려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 그간 지켜본 바로는. 큭. 역시 말할 수 없군.”
제약이 치밀하게 걸려 있는 듯하다. 점점 더 엮이기 싫어지는데.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하지?”
“유언을 가족에게 전해주고, 가능하면 돌봐다오.”
알렉세이의 요구는 어렵지 않다. 리쳇의 마이크로 드론 한 기만 보내도 유언을 전하는 건 물론이고 민간에서 벌어지는 어지간한 일은 다 해결되니까.
“나도. 쿨럭, 나도 부탁할게. 오하이오주에 할머니가 계신데……”
길게 유언을 남긴 앱솔루트레터는 스위프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세뇌당했을 때의 일이 기억났어. 그 주황색 음료수, 먹지 마. 독…”
알렉세이와 스위프트도 그가 갑자기 쓰러질 줄은 예상 못 했는지 놀라며 부축해 소파에 눕혔으나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도 곧 가지.”
의지가 담긴 말로 그의 죽음을 위로한 알렉세이는 가족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게 넘긴 뒤, 앱솔루트레터를 업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를 부른 이유는 겨우 유언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남만혁.”
저들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음에 준하는 고초를 겪었을 스위프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무섭다.”
“그럴 수 있지.”
“거악이 이렇게 활동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직 학생이잖아.”
“알렉세이는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었다.”
“어.”
“나는 알렉세이처럼 내 목숨을 버리거나 가족을 외면할 자신이 없다.”
“누구나 그래.”
“만약… 내가 적이 되면. 남만혁, 네가 나를—”
“그래. 죽여줄게.”
그제야 희미하게 웃는 스위프트. 떨리던 손도 진정된다.
“단호하군. 협회장 사건 때도 그렇고 너는 언제나 결정이 빨랐지.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것처럼.”
반세기 정도 빌런과 부대끼다 보면 대충 다음이 그려지는 건 사실이다. 나쁜 짓이라는 게 사실 또 파고들면 거기서 거기인지라.
지금처럼 사람 조종해서 죽이는 새끼들은 둘 중 하나다.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신분이거나 비겁하게 살아남은 경험을 가진 쓰레기거나.
뭐가 되었든 둘 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다. 저런 놈들이 그블린의 침략이 시작되면 십중팔구 인류 팔아먹는 앞잡이가 되거든.
* * *
그렇게. 스위프트와 나는 외견상 어떤 상처도 없이 아카데미에 복귀했고, 지금쯤 명을 달리했을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감에게 전했다.
“…알겠어요. 조치하죠.”
사색이 된 교감은 즉시 교내 치안을 기존의 두 배로 끌어 올렸고 나 역시 본격적으로 VZ개발에 착수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남이 내 새끼들 빼가는 건 못 참지.”
어디 내가 찜한 걸 날먹하려고.
후문으로 일식이가 말하길, 스위프트가 자신의 음료를 대신 먹어준 덕에 죽지 않았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한다.
일식은 쿨하게 대련 때 약속했던 음료만 받으면 된다며 스위프트가 가져왔던 현금 가방을 거절했다.
나중에 그 가방에 1억이 들었다는 걸 알고는 반나절을 멍때리더라. 자기는 내가 늘 주던 천 원짜리 다발이 들었을 줄 알았단다.
멍청하긴. 그래서 나중에 고민하더라도 주는 건 일단 받고 보는 거다.
* * *
엔들리스의 모처.
“이보게, 강이.”
사복 차림의 매저드가 엔들리스를 홀로 찾았다.
“선배가 여긴 어쩐 일로?”
“내가 아직 멀쩡히 눈뜨고 살아있는데도 이럴 텐가?”
“무슨 말씀이신지.”
“고스트핸드 놔 주고. 내 제자에게서도 손 떼게.”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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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