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중층 (1)
“신분증의 5191이라는 숫자는 네놈의 식별 코드다. 51년도 91번째 통과자란 뜻이지.”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실실 웃던 남자가 내 발치에 구르는 포블링을 보곤 고개를 기울인다.
“그건?”
“내 애완 마법.”
옆에서 다른 남자에게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받던 샤아 나탈리아가 어깨를 들썩인다.
“애, 애완? …감히 장난을 쳐? 여기가 어디라고,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삐—
내 멱살을 잡은 남자가 목에 걸린 피리를 길게 불자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방을 경계하던 무장 용병이 내게 다가온다.
“무슨 일입니까?”
“이 자식이 불법 휴대 물품을 가지고 왔다. 감방에 처넣어!”
“확인하겠습니다. 이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탄복에 소총을 든 흑인 용병이 내 포블링을 보곤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는다.
“그래. 당장 데려가!”
하.
면전에 대놓고 한숨을 쉰 용병은 내 팔을 붙잡으며.
“협조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제약에 걸려 있는 몸이 아니라면 별 탈 없이 풀려나실 겁니다.”
제약? 그런 건 없다. 있다면, …아하.
“가죠. 저는 당당합니다.”
“예, 바로 앞의 저 건물이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달각.
샤아 나탈리아가 신속하게 사념을 보내왔다. 자기는 마하트마 광장 골동품점에 있겠단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경찰서 비슷한 구조를 가진 건물 안에 들어서자 마법적 검사를 몇 개 받았다.
“기자분이십니까? 이건 해제하셔야 합니다.”
검사를 하던 마법사에게 귀띔을 받은 용병이 내 가슴께를 가리킨다. 아무래도 정밀검사라 그런지 매저드의 마법이 들킨 듯하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상의를 아예 벗어서 넘겨줬고 대신 중층 치안대에 보급품으로 나온다는 셔츠를 받았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마법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반응이 없어졌어.”
“어, 그러네? 왜지? 벗어서 그런가.”
“몸에는 가공된 마나가 없었으니까 이 옷이 확실한데….”
저들은 내 티셔츠를 붙잡은 채 골몰하고 있었다. 매저드가 원격으로 관찰 마법을 파괴한 듯하다.
“끝났죠?”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마법사님들. 이분의 애완 마법은 상관없겠습니까?”
“예, 그런 거야 뭐. 흔하니까요.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목적지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흑인 용병은 친절하게 마하트마 광장까지 나를 안내해주고 돌아갔다.
‘마하트마.’
그 해골 마법사 놈의 스승이라던 작자의 이름이다. 광장까지 있을 정도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데.
‘제자라는 놈은 왜 그 모양이지?’
아무튼 샤아와 약속한 골동품점을 찾아 둘러보는 중 광장의 구석, 녹슬고 기울어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별거 없는 골동품점]
겸손이 미덕인 한국인의 정서 때문인지. 없다고 하니까 더 끌린다. 안에 샤아가 있든 없든 물건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검게 칠해진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안돼!”
달각!
“내가 나이가 몇인데, 너야 언데드라 상관없겠지. 이거 봐! 이 주름. 이 뱃살. 지금의 나는 그때의 히드라가 아니야. …응? 손님?”
“손님 겸, 샤아 준 계약자.”
배불뚝이 노인이 안경 위로 나를 힐끔 살피곤 가게 카운터 안쪽에 앉은 샤아 나탈리아를 돌아본다.
“이 미친 녀석을 수하로 들이겠다고?”
“아직은 아니고 나중에?”
맞냐는 노인의 턱짓에 고개를 끄덕이는 샤아. 그러자 통통한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계약을 할 거면 저 애를 수하로 들여야지 왜 네가 들어가!”
달가각!
그 뒤로 과거사를 들먹이는 둘만의 대화가 길게 이어졌고 내가 거기에 끼기는 좀 그래서 가게 안의 골동품들을 살폈다.
전 네크로 마탑 마법사들이 잔류하는 곳이라 크게 기대했는데, 있는 거라곤 부여 속성에 특화된 마법사나 각성자에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아티팩트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현대 과학으로 만들어진 기기들보다 못한 것들이었다.
‘실용성보다는 수집용이거나 역사적 가치에 목적을 둔 물건이겠지.’
끌리는 도구들은 좀처럼 없어서 구석까지 이동하다 선반과 벽 사이에 떨어져 있는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뒷면을 보니 발간 일이 무려 ‘11세기 초로 추정’이라고 적혀 있다. 슬쩍 내용을 보려다 돈이 없으면 모를까, 있는데 굳이 그래야 하나 싶어 아직도 고성을 높이고 있는 노인 앞에 내려뒀다.
“얼맙니까?”
벗어뒀던 안경을 다시 쓰고 책을 꼼꼼히 살핀 그가 반세기 전에나 쓸법한 계산기를 꺼내 톡톡 두들겼다.
[590,000$]
“미래의 샤아 계약자래서 할인한 거다.”
“50만을 더한 게 아니고?”
7억을 달라는 미친 소리에 나는 계산기를 들고 0두 개를 지운 가격을 제시했다. 한화로 약 800만.
“이 책의 가치를 모르는 애송이랑 거래할 생각은 없다. 둘 다 썩 나가!”
주인의 외침에도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끼다 똥 된다.”
“뭐?”
“한국 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때가 지나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뜻이죠.”
“흥, 네가 아니라도 살 놈은 많아.”
“먼지 범벅이던데?”
“…청소를 안 했을 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네가 사 봐야 해석도 못 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어르신, 진짜 안 팔 겁니까?”
“59만 달러에 판다니까!”
“계좌.”
“어?”
“계좌 부르라고. 돈 줄 테니까.”
“흥, 어린놈이. 허세는.”
그러고는 종이에 스위스 계좌번호를 적는다. 나는 리쳇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곳에 책값을 넣으라고 했고, 얼마 뒤 그가 특이하게 생긴 홀로폰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 진짜? …가져가.”
상점 주인의 반응에 샤아의 좌우로 길게 늘어난 안광이 노인을 향한다.
“큼, 볼일 다 봤으면 꺼져. 둘 다 신고하기 전에.”
샤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나기에 나 역시 가게를 나왔다.
“어쩔래?”
달각.
살아 있는 유일한 친구가 도와주지 않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단다.
이럴 때 트레이시 그웬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본래 나와 함께 샤아에게 마법을 배워 중층까지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본가에서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서히아에 자퇴서를 내버리겠다고 해 매우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달각.
-어찌 되었든 마법을 익히기 위해선 연구실을 대여가 우선입니다.
이것도 규칙이란다, 타인에게 노출될 우려가 있는 공간에서 마법을 가르치다 걸리면 하층 노동형에 처해진다.
“연구실 대여는 얼만데? 1억?”
돈벌레만 모여있나. 구매도 아니고 대여에 무슨 1억이야.
샤아 나탈리아는 이 비용은 외부인에게만 적용되고 비싼 이유는 탑의 재건을 위해 쓰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참나.
그나마 다행인 건 대여한 연구실은 빌린 마법사가 죽기 전까지는 기한에 제한이 없다고 한다.
사실상 매매로 봐도 되는데 굳이 대여라고 하는 건, 이 중층 역시 마탑의 일부여서 탑주의 결재 없이는 매매가 불가능하기 때문. 지금 탑주는 공석이고 말이다.
‘참 번거롭게도 해놨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가장 싼 대여실이 어디냐고 묻자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그는 손가락으로 새까만 빌라 건물을 가리켰다.
여차여차 계약하고 받은 대여실은 301호.
“아무것도 없네.”
건물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깨끗했다. 구조는 화장실, 거실, 작은 방 두 개. 28평쯤.
나는 작은 방 하나를 샤아에게 쓰라고 한 뒤 곧장 거실 중앙에 앉았다.
“이리 와.”
굴러오는 포블링. 사실 이 애완 마법은 철저히 내 조작에 의해 움직이는 물체다.
모 만화에서 주인공이 1톤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수련하듯. 나도 세 가지 마법을 포블링이라는 형태로 24시간 유지하는 것으로 숙련도를 끌어올렸다.
“블리딩, 위크니스. …에라이.”
아쉽게도 이 두 마법은 큰 진전이 없었다.
“포이즌. 오?”
카츄의 입에서 튀어나온 독들이 내 의지를 따라 뭉쳐지거나 형태를 바꾼다.
피라냐로 바꿔 헤엄치는 듯한 모션을 취하다가도 날카로운 이를 가진 상어를 구현하거나 미르토스 해변 물속 산호로 위장해 심어보기도 했다.
마지막 건 쉽지 않았으나 대체로 성공. 무엇보다 긍정적인 건 어떤 환경이든 내가 원하는 형태를 유지하고 소실되는 독이 없다는 점이다.
내 포이즌이 어떤지 좀 봐달라고 하기 위해 샤아의 방을 살짝 열었으나 그녀는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거실로 돌아오자 카츄가 대뜸 기침하더니 물건 하나를 뱉는다. 풀풀 날리는 먼지. 골동품점에서 샀던 그 책이다.
포이즌의 놀라운 숙련도 상승에 흥분한 나머지 거금을 주고 산 물건을 잠시 잊고 있었다.
책을 조심스럽게 펼치자 알아먹을 수 없는 글자가 가득하다. 번역 앱을 켜도 마찬가지.
“이런 일이 한 번은 있을 줄 알았지.”
나는 당황하지 않고 인디아나 줄리아 세트에서 돋보기를 꺼내 쥐었다. 눈앞에 가져다 대고 책을 비추자.
[나는 알카서스 흐메르. 잊혀진 흑마법을 이곳에 남긴다.]
흑마법?
* * *
-멍청한 자식!
깊게 눌러쓴 후드로 얼굴을 가린 이가 남만혁을 치안서로 보낸 마법사에게 호통을 친다.
“언제 언데드라고 하셨는지.”
-녹화된 거 돌려봐라 이 쓸모없는 제자 놈아. 처음에 언데드는 다 주의 깊게 살피라고 내가 그렇게! 어휴. 당장 추적해!
“지금 업무 중인데요….”
-이 자식을 확!
“가, 갈게요.”
-무조건 잡아. 샤아 나탈리아가 다시 상층에 오면, 다 죽어. 알아들어? 너도, 나도. 네 부모도! 다 죽는다고!
샤아 나탈리아의 사후맹약에 마나를 기여한 인물들은 그녀를 늘 주시하고 있었다.
기묘한 열쇠를 가진 소년과 함께 중층 시험을 치렀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그들에게 전해졌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입층 심사관인 자기 제자를 이용, 트집을 잡아 하층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선후배들 앞에서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어이없는 착각으로 실패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잘난 척만 할 줄 아는 어리석은 제자가 허둥대며 달려가는 모습에 한숨을 쉬며 수정구를 껐다.
“잘 해결될 겁니다.”
근거 없는 그의 말에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이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퍽이나.”
“…큼.”
“기대하지 말고 다음 수를 생각합시다.”
스륵.
후드를 벗은 마법사는 언데드였고 원탁에 앉은 이들도 마찬가지.
“죽입시다.”
“안돼. 그건 하책이다.”
“동의, 죽이는 건 쉽다. 언제든 할 수 있지.”
“멍청한 소리. 그래선 샤아의 연구를 가로챌 수 없잖나.”
원탁에 모인 다섯 명 중 세 명이 샤아를 죽이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다.
“자커 선배. 가로채다니요. 말씀이 과하십니다. 설득해서 공유받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이 지경이 되면서까지 기다렸다. 내놓는 게 당연하지! 부노야, 너는 그러니까 아직도 쓸만한 마법 하나 개발을 못 하는 거다.”
자신이 자기 두개골을 깡깡 때리며 언데드임을 강조하는 자커의 말에 부노는 무어라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선배 넷이 샤아만 두고 입방아를 찧을 때, 부노는 소년에게 눈길이 끌렸다. 정확하게는 그가 가진 물건에.
‘저 열쇠…, 어디서 봤더라.’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