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중층 (2)
11세기 마법사 알카서스 흐메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흑마법이 잊힐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본인은 중급 수준의 마법사이고 가능하면 이 책이 자기 후손이나 재능있는 흑마법사의 손에 쥐어지길 바란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책 초반에 기록된 마법들은 음차원 마나만 보유하고 있으면 따라 할만한 것들이라 소리를 내 주문을 읊어봤다.
“다크 볼트.”
손바닥 정도 되는 길이의 검은 화살이 쏘아져 벽에 박힌다. 촉만 간신히 꽂힌 거로 봐서 큰 위력은 아니다.
“다크 라이트닝.”
노란빛을 품은 검은 번개 줄기가 약 1m쯤 뻗었다 사라진다.
“다크 클라우드.”
내 몸을 간신이 덮을 법한 안개가 피어났으나 금세 사라졌다.
“이거….”
이 마법들 하자가 있는 거 같은데.
달각.
명상이 끝났는지 방에서 나온 샤아 나탈리아가 안쓰럽다는 감정을 내게 보내며 생각을 이었다.
-그 책, 사깁니다.
“응?”
달각, 달각….
-돈 많은 사람을 낚기 위해 만들어둔 함정 같은 거지요. 흑마법은 네크로 학파에 흡수되었습니다.
-다크 볼트는 소울 미사일. 다크 라이트닝은 블러디 썬더. 다크 클라우드는 블라인드 미스트로 말이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것들 전부.
“나와는 맞지 않는 마법들이다?”
끄덕.
쩝.
이 책의 마법은 현 네크로 학파 마법의 하위호환일 뿐만 아니라 맞지 않는 옷이라는 소리에 잠깐 골동품점 주인이 적어준 스위스 계좌를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7억. 물론 큰돈이지만, 중립국의 은행을 털 정도는 아니다.
아쉬운 대로 흑마법의 종류 정도는 알아두자는 생각에 책장을 넘기다 이상한 페이지를 발견했다.
“이거 붙어 있는 거 맞지?”
-…그렇군요. 잠깐 기다려 주시지요. 제가 떼겠습니다.
손으로 긁으려 하자 샤아가 만류하고 책에 자기 마나를 주입한다. 봉지에 바람을 불어 넣어 부풀리듯 페이지들이 서서히 팽창하며 부드럽게 떨어졌다.
[나의 비기를 이곳에 남긴다.]
비기?
[젊은 시절. 나는 재능 있는 독 마법사였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그 길은 너무도 험하니 소환계로 전향하라고 충고하셨다.]
이 마법사도 나처럼 포이즌과 궁합이 좋았던 걸까. 괜히 감정이입이 돼서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음 문단을 읽어내렸다.
[한 달의 고민 끝에 스승님의 말씀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소환계 마도서를 장서관에서 빌려왔다.]
이 근성 없는 자식. 한 번 길을 정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봐야지.
그 아래로 이어진 이야기는 소환 마법 또한 쉽지 않았으나 포이즌보다 돈도 되고 실생활에 쓸모가 많았다는 내용이었다.
[…내 나이 91세. 죽음을 앞두고 고백한다. 나는. 한시도 포이즌 마법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소환계로 전향한 이유도 포이즌 마법의 개량할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오?
[후대여. 여기에 내 삶이 담긴 마법을 남기니 언제고 흑마법이 잊힌 시대가 온다면. 포이즌이 메이저 매직이 될 수 있도록 부디 내 이름과 함께 이 마법을 널리 퍼트려다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포이즌이 편견 때문에 제대로 된 취급을 못 받고 있으니 흑마법이 잊힌 후에 포이즌을 다시 꺼내서 빛을 보게 해 달라. 뭐 그런 내용인 거 같다.
안타깝게도 흑마법의 부활은 네크로 학파를 통해 이루어진 거 같고 포이즌은 예전과 별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
그나마 초대 탑주가 포이즌을 강제로 익히라고 한 덕에 누구나 아는 마법이 되긴 했지만.
‘어쩌면, 초대 탑주도 이 책을 봤던 걸지도.’
그 뒤로는 포이즌 마법을 해부해놓은 연산식과 스펠이 적혀 있었고. 얼핏, 내가 샤아 나탈리아에게 배운 포이즌과 별 차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 연산식을 그대로 따라 하니.
달각?
갑자기 샤아 나탈리아가 뒤로 물러섰고 방금까지 그녀가 있었던 발아래에 녹색의 마법진이 구현. 그 위로 사람의 신형이 솟구쳤다.
“이게 어떻게 포이즌이야.”
꾸물럭.
거기엔 좀비의 형태를 한 반투명한 녹색 액체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언포스를 켰으나 스테이터스 창이 나타나진 않았다.
“이거 자체가 마법이라는 건데….”
책을 다시 상세히 살피니 주석으로 쓰인 글이 보였다.
포이즌을 진화시킨 마법이고 이름은 서몬 애시드 좀비.
말년에 창안해 제자와 가문의 식솔에게 가르쳤으나 익힌 이가 없다며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달각!
샤아가 놀라며 애시드 좀비와 나를 번갈아 보다 안광을 번뜩였다.
내가 발현한 마법을 검사할 때 가끔 저러는데, 완성된 마법을 해부하는 마법인 듯했다.
그녀는 일전 하층에 진입할 때 만난 이름 모를 마법사가 열쇠를 처음 봤을 때처럼 턱을 크게 열고는 중구난방인 사념을 내게 쏘았다.
-고대 흑마법.
-소환과 포이즌의 결합?
-어떻게. 불가능한.
-…재능.
결론은 고물에 포이즌을 씌우는 것의 연장이었다. 좀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이 마법이 성공하는데, 알카서스 흐메르에게 전수한 마법사들은 이게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음.”
녹색 액체를 연구실 바닥에 떨어트리는 애시드 좀비. 저 방울 하나하나가 내 의지에 지배받기에 원하지 않는 물질은 녹이지 않는다.
“잘하면, 될 거 같은데.”
공식은 어렵지 않다. 광역으로 구현한 미르토스 해변에 비하면 정신적 피로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 게다가 마나 소모량은 100Mg에 불과하다.
내 총 마나량은 현재 7천. 이 중 2천은 언데드 클럽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고 있으니….
“크리에이트 애시드 좀비.”
연구실을 가득 채우는 수십 개의 마법진들. 직후 그 위로 나타난 50마리의 좀비가 일시에 나를 바라본다.
“되네.”
크리에이트 애시드 좀비는 기존 포이즌과 달리 매개체가 필요 없다. 샤아가 말하길, 좀비 자체가 가진 시독을 증폭시키는 연산이 압축되어 들어 있단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무력 수단이 생겼다는 점이 몹시 만족스럽다.
달각.
-상층 시험은 ‘융합’입니다. 크리에이트 애시드 좀비는 훌륭한 융합 마법이니 쉽게 통과하실듯합니다.
“그래? 그래도 마법 몇 개만 가르쳐줘.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시험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겠다는 샤아 나탈리아의 사념이 내게 닿기 무섭게.
쿵!
연구실에 하나 달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
“안에 있는 거 아니까. 나와!”
내가 턱짓으로 뭐 아는 거 있냐고 묻자 샤아가 고개를 젓는다.
작은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한 뒤, 애시드 좀비를 현관에서는 볼 수 없는 사각에 배치하고 불을 껐다.
문을 열자 신분증을 건넸던 그 마법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뒤쪽을 살핀다.
“불은 왜 꺼놓고 지랄. 어딨어!”
“뭐를.”
“너랑 같이 온 언데드.”
“나야 모르지.”
“모르기는, 같이 다닌다는 제보를 듣고 왔는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알려줄 의무는 없지?”
“야 이 새끼야,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거 같아?”
무영창 다크 파이어를 다섯 손가락에 하나씩 피워 올리며 위협하는 마법사. 나는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찾아보든가.”
그리 말하여 문 옆으로 비켜서자 마법사는 로브 자락을 털고는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달칵.
문을 신속하게 닫고 잠그자 마법사가 돌아본다.
“불 켜! 뭐야, 문은 왜 잠그—”
원하는 대로 불을 켜자 벽에 주르륵 붙어 있던 50마리의 애시드 좀비가 그를 향해 다가간다.
“어….”
뒷걸음질하는 마법사의 어깨를 내가 잡자 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거 다 뭐야.”
나는 대답 대신 활짝 웃었고. 놈은 급히 주문을 읊었다.
“포근한 지붕 아래로 돌아가고자 하니 빛과 어둠과 수면과 공간의 정령이여 나를 도와, 윽! 응? 어, 어어. 으아악!”
대충 들어봐도 이동 주문이었기에 결정적인 순간 애시드 좀비의 주먹을 놈의 복부에 먹였다.
물리적 피해는 없었으나 서서히 옷이 녹고 독이 피부에 닿자 살이 보라색으로 물들더니 짓무르기 시작했다.
발버둥 치며 제 배를 긁어대는 마법사. 이런 상태에서도 내가 독을 제어할 수 있나 싶어 독만 뽑아낸다는 의지를 일으키자 놈의 배에서 독이 흘러나와 허공에 포이즌을 쓴 것처럼 녹색 구체가 생겨난다.
‘좋아.’
나머지 애시드 좀비를 불러 마법사를 둘러싸게 한 다음 녀석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금 말하면 살려준다.”
“뭐든지 할게! 살려줘.”
“저 친구를 찾는 이유는?”
작은 방에서 이쪽을 살피고 있는 샤아 나탈리아를 가리키며 묻자 그는 목울대를 꿀렁이고는 입을 열었다.
“스승님은 샤아 나탈리아가 하층에 있길 바라셨다. 이유는 나도 몰라.”
“거짓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자세에서 일어나 손가락을 까닥였다.
애시드 좀비 둘이 깍지를 낀 손으로 마법사의 주요 부위를 내려치려 하자.
“자, 잠까아안!”
급히 소중이를 가리며 엎드린 놈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후 맹약을 건 게 우리 스승님이다. 그래서 그녀가 상층에 오는 걸 바라지 않아. 그게 내가 아는 전부다!”
나는 샤아를 불러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물었고 돌아온 답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힘을 기를 만한 환경을 배제하겠다는 거네?”
“그, 그래.”
어지간히도 그녀가 두렵나 보다. 내가 보기엔 매저드랑 비슷하게 연구 좋아하는 학자풍 마법사인데.
그런 내 생각을 전하자 마법사는 기겁하며 부정했다.
“뭐? 광기의 샤아를 학자? 하! 으윽! 죄송, 죄송합니다.”
샤아가 고물로 만들어진 지팡이로 놈의 배를 쑤신다. …뭐, 거친 면이 없지는 않다만.
“죽어서도 죽음이 두렵다는 건가.”
네크로 학파. 전생에는 들어 본 적도 없는 단체다. 그블린 전에 활약을 못 했다는 건데. 저런 겁쟁이 놈들이 대가리로 있어서 그랬나.
“내 생각인데, 샤아 나탈리아 님의 연구 성과를 탐내는 거 같아.”
아예 이쪽으로 돌아선 건지, 그는 눈치를 보다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달각?
-무슨 연구 성과를 말하는 겁니까?
“마나 없이 마법을 쓰는…, 히익.”
타오르는 듯한 안광으로 남자를 노려보던 샤아 나탈리아가 이내 어깨를 늘어트리더니.
-당신의 스승과 제 사후맹약에 관련된 마법사 전원을 이곳에 데려오십시오. 알려드리겠습니다.
“정, 정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하면 스승님께서는 반드시 오실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샤아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고 남자 마법사는 나를 간절한 눈으로 쳐다봤다.
“보, 보내주실 거죠?”
애시드 좀비를 물리자 놈은 잠긴 문고리를 분잡고 한참 씨름하다 간신히 열고는 뛰쳐나갔다.
그들을 불러오는 것이 과연 상책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니 샤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사념을 보낸다.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해 그게 뭐냐고 묻자.
-히드라가 올 겁니다.
히드라, 어디서 들었는데. 아!
“그 배불뚝이 골동품점 주인?”
달각.
-그는 예전부터 말과 속내가 달랐습니다.
나는 그 인물을 잘 모르기에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미르토스와 넥서스, 그리고 언데드 클럽까지 한 번에 불러낼 각오를 하며 그들을 기다렸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 일련의 무리가 내 연구실을 방문했다.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찬 해골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하관을 열었다.
“샤아 나탈리아.”
언데드임에도 인간의 말소리를 낸 해골은 자신이 차고 있던 목걸이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사과의 증표다. 부디 받아다오.”
그 간의 과오를 깨우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듯한 절절한 목소리였다.
이놈 봐라?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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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