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자커
“마스터키?”
“시험을 치르지 않고 최상층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시험을 통과해야 최상층에 올라 마탑의 코어를 소유할 자격을 얻습니다. 저를 포함한 부탑주들이 매년 시도합니다만.”
거기까지만 말하고 뒷말을 삼키는 부노.
“잘 안됐나 보네?”
“말씀대로입니다. 클리어하라고 내어놓은 시험이 아니라는 게 우리의 판단이었습니다.”
나는 열쇠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섰다.
“내일 하는 거 보고 줄게.”
“다크 보이. 저는 마법사로 52년을 살았습니다. 말장난에 놀아날 시기는 지났다는 뜻이죠.”
그러고는 허공에 수평으로 마법진을 그리더니 그 위에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가 써진 종이를 올려놓는다.
“계약서?”
“약속에 믿음과 신뢰를 더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사인하시죠. 독소 조항은 없습니다.”
내용은 심플. 반란군의 선전포고 후 적으로 특정된 집단의 전력 30% 또는 부탑주 2인을 처치할 시 내가 이 열쇠를 저놈에게 주는 계약이었다.
이 어리숙한 마법사는 무력을 동원할 심산이었는지 마력을 한껏 끌어모아 내 주변에 뿌리고 있었는데, 아마 속박계열인듯하다.
내가 곧장 부노가 내민 펜을 잡고 계약서에 사인하자 응집되던 마나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흩어진다.
“…결단이 빠르시군요?”
놈의 당황 섞인 어투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내게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물건인지라.”
“샤아 나탈리아를 탑주로 만든다는 건?”
“없어도 돼. 시험에 통과하면 되잖아?”
“후후, 맞는 말씀입니다.”
“볼일 끝났으면 좀 꺼져줄래? 이제부터 비싼 고기 먹을 거라.”
“…알겠습니다. 내일이 기대되는군요.”
* * *
-전쟁을 선포한다!
거창하게 선포한 것까지는 좋다. 문제는 중층에서 상층으로 갈 방법이 없었기에 부탑주들이 무시하면 계획 대부분이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본래라면 아무리 자극해도 외면했을 상층 마법사들이었으나 샤아 나탈리아를 중심으로 뭉치는 모습과 중급 마법사들이 골든팁을 윤활유로 삼아 급속도로 성장하자 이쯤에서 제재할 필요성을 느껴 대청소라는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목적이야 어찌 되었든, 두 집단의 의지가 일치한 셈이다.
그으어어어.
우우우.
끼하하핫!
네크로 학파답게 언데드의 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탑주들을 비롯한 백여 명의 상급 마법사들이 중층으로 내려와 수집한 언데드들을 풀었고 그 숫자가 무려 천에 달했다.
소규모 언데드 웨이브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재앙의 현장에 모두가 당황할 때 다크 보이를 둘러싼 한 무리는 서로를 돌아보며 모종의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다수를 상대하는 네크로 학파의 마법들은 뻔하지요.
-언데드, 저주, 독.
샤아 나탈리아의 예견대로 그들은 언데드를 앞세워 저주를 뿌리고 다녔고 미리 비밀리에 아군에게 유리한 지형을 설치한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크 보이, 부탁하지.”
“그놈에 보이. 차라리 넥서스라고 불러.”
“보이! 믿고 있다!”
“보이!”
“가자, 보이!”
친해진 마법사들과 오드스컬이 한목소리로 보이라 외치자 남만혁은 욕을 뱉지 않을 수 없었다.
“저저, 염병할 놈들. 미르토스.”
모래사장은 짧게 바다는 넓게 구현하자 지상에서 달려오던 언데드 무리가 물속으로 빨려든다.
스펙터, 고스트, 본 뱃 외 수십 종의 비행형 언데드만 공중에 남았고, 히드라가 목청이 터져라 소리친다.
“1소대 시전!”
상급 다섯에 중급 45명이 소대 하나. 반란군은 총 11개의 소대가 존재하며 현재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방호하는 중이다.
총 6개 소대의 마나를 털어내고 나서야 간신히 비행 언데드 절반과 뭍으로 느릿하게 올라오는 보행형 언데드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동안 준비를 마친 다크 보이가 무전기에 신호를 보낸다.
츠측.
-엎드려.
요격당할 것을 염려해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맨땅을 때리며 숫자를 불린 삼식은 계약자의 마나 5할을 빨아먹은 매직 미사일들을 전방으로 뿌렸다.
목표를 조준하는 데 소모되는 마나 마저도 미사일을 생성하는 쪽으로 돌렸기에 그 숫자는 도저히 눈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남만혁만이 자신의 소모된 마나를 계산해 대략 2만에 근접한 개수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
“어….”
“이럴 수가….”
처음부터 대규모 마법을 전개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상층 마법사들이 당황한 사이 반란군이 거금을 주고 고용한 용병들이 활약했다.
“흐억!”
“너는, 컥!”
마법사 사냥꾼, 스미스를 필두로 한 용병대는 상층 마법사가 내려올 법한 지역에 숨어 있었고 그들이 삼식의 매직 미사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신속하게 목숨을 끊어냈다.
히드라는 무전기로 그들이 몇이나 처리했는지 실시간으로 보고를 듣고는 주먹을 꽉 쥐며 환호했다.
“샤아. 너도 들었겠지? 상층 마법사 절반을 죽였다! 이 전쟁…, 우리의 승리다!”
-히드라, 아직 안 끝났어.
“흐흐, 알아. 아는데. 우리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잖나.”
첫 전투에서 적 전력의 절반을 붕괴시켰다면, 사실상 승리를 가져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하다.
하지만 한때 마탑주 자리를 두고 자신과 경쟁한 상급 마법사들의 저력을 직접 체감한 바 있는 샤아 나탈리아는 알고 있었다. 지금 죽은 이들은 그들의 시선에선 애송이들이나 마찬가지다.
진짜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마음을 놓는 반란군 리더의 모습에 샤아는 안광을 좁히며 시선을 돌렸다.
-잘해 주셔야 할 텐데.
* * *
-부탑주 흔적 발견. 지원 요청.
삼식에게 전장을 맡기고 명상으로 마나를 회복한 나는 스미스의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즉시 답했다.
“내가 갈게.”
-물주? 상급 마법사 셋만 데리고 와주십쇼.
이 자식 이거 나 못 믿네. 셋이나 빠지면 위험하다. 매직 미사일로 대부분 쳐내긴 했지만, 저쪽 마법사들의 소환 능력도 보통이 아닌지라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 명만 빠져도 위태롭지 싶다. 간간이 넥서스의 포를 꾸준히 날려줘야 우세를 점하는 수준.
“제가 가죠.”
내 어깨를 잡으며 말하는 해골, 부노. 히드라는 이놈을 끝내 못 믿겠다고 전장에 나설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내 전전긍긍했으니 지금 같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겠지.
“헛짓거리하면, 알지?”
열쇠가 든 주머니를 툭 치며 겁박하자 놈은 안광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고 입을 열었다.
“계약 안 지키는 마법사 보셨습니까. 믿으세요.”
믿기는 개뿔.
스미스가 찍은 위치로 이동하자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입에 손가락을 올린 채 손가락으로 골목 안쪽을 가리킨다.
“제발 좀. 자커가 시킨 대로 하자니까!”
“너는 자커의 부하냐. 홀랜.”
“부하는 아니지만, 놈이 우리 중 가장 현명한 건 사실이잖나.”
“자커가 정말 현명했다면, 그 괴물 놈이 진작 찾아내 죽였겠지.”
“그의 언급은 금기다. 마하트마.”
“흥. 음? 누구냐!”
들켰나. 스미스는 벽 뒤에 숨어 손짓하는 게 우리가 숨길 바란듯했으나 나와 부노는 정면으로 나섰다.
직후 부노가 마나를 끌어들이자 상대 마하트마와 홀랜도 주문을 읊는다. 나는 그들을 번갈아 보다 벽에 기대고 서서 물었다.
“그놈이 누구지?”
“알 거 없다! 워터 캐논!”
“프로스트 바이트!”
“이고강, 두식아.”
컨테이너에 마련해둔 훈련용 방패를 집어 들고나온 이고강이 내게 날아오는 워터 캐논들을 막았고 두식은 블랙 팽을 불러냄과 동시에 거구를 이용해 퇴로를 틀어막았다.
“마그마 토네이도!”
이내 부노의 마법이 완성됐고 마하트마와 홀랜은 코웃음 치며 속성 실드를 전개하는 듯했으나.
“멍청이 들개.”
부노가 시동어를 외우자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가 새파랗게 빛나며 점멸한다.
“큭, 네놈!”
“이익!”
순식간에 그들의 마나가 목걸이로 빨려들었고 마그마 토네이도를 막고 있던 실드는 소멸. 그대로 용암을 허용해 전신이 녹아내리는 두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부노가 비웃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선배님들. 그러게, 후배의 연구를 왜 멋대로 훔치십니까.”
대충 돌아가는 꼴을 보니 연구를 빼앗길 걸 알아채고 함정을 심어둔 듯했다.
이놈. 술수가 제법이네.
용암에 파묻혔음에도 빛을 잃지 않은 목걸이 두 개를 회수한 부노는 흐릿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두 쌍의 안광을 쥐고 있던 스태프의 끝으로 찍어 부쉈다.
두개골이 박살 나자 빛이 사라졌고 부노는 만족한 듯, 허리를 펴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가시죠.”
“쌓인 게 많았나 봐?”
“잘난 후배는 언제나 선배의 질시를 받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의 언사에서 지독한 음차원 마나를 느낀 나는 고개를 내젓고 스미스를 불렀다.
“끝났으니까 너도 이리 와. …스미스? 에이씨!”
빠가각.
위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마나 덩어리에 부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옆으로 몸을 던졌고.
쏴아아아!
내가 방금까지 서 있었던 자리에 커다란 빙벽이 내리꽂혔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공중에 목이 돌아가 주검이 된 스미스를 양탄자처럼 밟고 서 있는 해골이 보였다.
“부노.”
“자커 선배.”
“놈을 죽여라.”
“저는 반란군에 가담한 몸입니다.”
“큭, 큭큭. 정말 하나같이 아둔하구나.”
“…선배가 강한 것은 알지만, 그리 여유 부릴 상황은 아닐 텐데요.”
부노의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유황 지대에서 대체 뭘 하는 건지 부를 때마다 강해져 있는 두식이와 블랙 팽. 그리고 일식이를 가르칠 정도로 강한 이고강까지.
“네놈들 따위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
“그건 해 봐야—”
“부노, 다크 보이를 죽여라.”
빠르게 움직이던 부노의 입이 닫히고 이쪽을 돌아본다. 붉었던 안광이 탁한 보랏빛으로 변한 부노가 주문을 읊는다.
이를 간파한 이고강이 방패로 부노의 턱을 쳐올려 두개골을 몸에서 분리시키곤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투포환 던지듯 방패를 자커에게 투척.
“이깟 잔재주 따위.”
방패를 피해 고속으로 이동하는 자커. 빠르기는 하지만 궤적은 단순한 선. 중간지점쯤에 서몬 애시드 좀비들을 구현.
“어서 오고.”
워낙 속도가 빨라서 연달아 여섯 개의 독 좀비를 통과하고 나서야 경로를 틀어 회피한다.
얼굴과 로브에 묻은 독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던 놈은 뼈에 침투한 독이 해독되지 않음을 알아챘는지 안광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본다.
“네놈!”
내 독은 해독이 안 된다. 엄밀히 말하면, 네크로 학파의 해독 주문은 안 먹힌다. 아마 흑마법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대단한 효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적을 꾸준히 괴롭힌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스러운 마법.
이대로 시간을 끌면서 꾸준히 좀비로 타격하면 아무리 고강한 자커라도 결국은 뼈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어 있다.
이고강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승기를 점치던 그때.
“—마 토네이도.”
“어?”
골목 저편으로 날아간 부노의 두개골이 달각거리며 주문을 완성한다.
팔방에서 밀어닥치는 시뻘건 용암. 하늘 저편에서 울리는 자커의 웃음.
“X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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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