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내부의 적
마그마의 열기에 피부가 익어가는 찰나, 내 목숨과 전장의 승기를 저울에 달았고 신속하게 결론을 내렸다.
“샤아, 삼식아. 너희만 믿는다. 미르토스!”
해변을 여러 곳에 구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그만한 숙련도를 쌓지는 못했기에 지상형 언데드들을 속박하고 있던 전장 쪽 바다를 해제하고 내 발아래에 깊게 구현했다.
풍덩!
부글거리는 용암이 끈질기게 나를 추적해왔으나 온도 차가 상당한 만큼 기포와 수증기를 뿜어내며 빠르게 식었다.
떨어져 내리는 검은 덩어리들을 걷어차며 수면으로 향하자 딱딱하게 굳은 용암이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내 힘으로 부수기는 쉽지 않아 근처에 있을 이고강에게 사념을 보냈다.
-자커가 이상한 마법진을 지우고 있어요,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나부터 꺼내야지, 이 자식아!’
-앗. 물러나세요.
쿵!1
수중에서도 느낄 수 있는 큰 충격이 가해졌고 이내 굳은 용암이 완전히 파괴됐다.
“허어억. 흐억. 후우….”
밖으로 나오자 이고강이 긴장한 기색으로 내 앞을 막아선다. 녀석의 정면엔 자커가 마법진을 살피는 자세로 굳어 있었다.
“오, 쥐덫 성능 확실하구만.”
층마다 포탈에 마나를 제공하는 기관이 존재한다. 상당한 넓이를 자랑하는 하층은 몰라도 중층부터는 충분히 탐색을 할 만한 크기였기에 알만한 사람은 위치를 알고 있단다.
부탑주들이 이 기관을 먼저 봉쇄할 거라는 건 반란군 측에서도 쉽게 짐작이 가능한 사실이었다.
쥐덫은 중층의 연구자료를 본 샤아가 영감을 받아 창조한 마법이다.
주입되는 마나를 상대에게 되돌려 대상의 마나 회로를 갈아버리는, 마법사에게는 치명적인 저주.
내가 가까이 가자 자커의 안광이 희미하게 점멸하며 나를 쳐다본다.
“아직 살아 있네?”
-네놈…!
“사람 목소리를 낼 마나도 없나 봐? 그렇게 살아. 사람이 순수해야지. 겉만 가꾼다고 속이 달라지나.”
포탈 마법진에 댄 자커의 손을 발로 걷어찬 뒤 놈의 두개골을 깔고 앉았다.
-끄끄끄,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꼬마야. 네놈들은 평생 중층에서 썩어야 하니.
“뭔 소리야.”
-기관을 오염시켰다. 연결된 모든 마법진은 수 분 내로 소멸한다.
“아하. 상층으로 갈 방법이 없다, 이거네?”
-이제 와서 용서를 빌어도 소용없다!
나는 놈이 볼 수 없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픽 웃고는 이고강을 불렀다.
-네, 계약자님.
“자커랑 부노 대가리만 떼서 가자. 마나 움직인다 싶으면 내 명령 기다리지 말고 깨버려.”
-알겠습니다.
다시 전장으로 복귀하는 길에 마법의 여파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기다란 봉을 찾아 놈들의 두개골을 그 끝에 묶었다.
-감히!
-…….
“꽥꽥, 거 더럽게 시끄럽네. 사내답게 패배를 수용할 줄도 알아야지.”
장대를 바닥에 떨어트려 놈의 입 안에 용암의 열기가 남은 흙덩이를 채워 넣고 나서야 내 머릿속을 울리던 사념이 사라졌다.
* * *
남만혁이 구현한 미르토스가 사라지자 전장은 아주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적아 모두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린 것.
“지금이다!”
“총공격!”
“재활용할 생각 말고 다 쏟아부어!”
상층의 마법사들은 기껏 폐품들을 모아 재활용한 언데드들이 바다에 처박히는 바람에 속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그 걸림돌이 사라지자 상층에 오른 실력을 뽐내듯, 중층 진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우리도 맞받아친다!”
흥분한 히드라의 명령에 반란군 수뇌부는 망설였으나 이미 무전기를 타고 전파되었기에 할 수 없이 호흡을 맞췄다.
그리고 이를 듣고 있던 샤아 나탈리아는 직감했다.
-졌어.
반란군이 시가전이 아니라 도시 외곽에서 회전을 벌인 이유는 다크 보이의 바다와 전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게 사라졌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이 간다.
그럼 아군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퇴각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짧은 승리에 도취된 히드라는 이러한 단순한 사고조차 못 하는 듯 보였다.
샤아 나탈리아는 자신을 호위하는 한 소대만을 이끌고 후방으로 물러나던 중, 포탈을 여는 기관에 설치해둔 함정이 발동했음을 알아차렸다.
-이만한 마나량이면, 자커?
이내 도시 안쪽에서 장대를 든 해골을 앞세워 걸어오는 소년을 발견했다.
-다크 넥서스!
“어, 샤아.”
남만혁은 샤아 나탈리아에게 전황을 전해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도착한 전장은 상층 마법사 측의 언데드가 중층 마법사가 불러낸 언데드를 학살하고 있었다.
반란군 중앙 지휘실이 있는 천막까지 불과 1km도 되지 않았고 독려랍시고 높은 단상 위에 올라 뭐라 외치고 있는 히드라의 모습에 남만혁은 샤아를 바라봤다.
“네 친구 왜 저래?”
-…저도 모르겠습니다.
남만혁은 저리 멍청한 녀석이라도 반란군의 대장이었기에 구하고자 해변을 전방에 깔았고 언데드의 진격을 늦췄다.
“으윽.”
비틀거리는 남만혁을 부축하는 샤아와 이고강.
-쉬셔야 합니다.
마나와 의지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무전으로 신호를 보냈다.
“다크 보이다, 물러나라. 자커를 사로잡—”
츠측.
-내 명령 이외의 발언은 모두 무시해라! 지금이 기회다, 모든 마나를 짜내 공격을 퍼부어! 승리가 목전이다!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그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고 했던가. 샤아를 통해 히드라가 저주에 당하지도 약물 상태도 아니라는 것을 들은 남만혁은 이를 갈았다.
“끝나고 보자. 넥서스. …윽.”
회전하는 시야,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피. 그리고 이명까지.
남만혁의 희생 덕에 승기는 단숨에 반란군 측으로 넘어왔고 기세를 몰아 상층 마법사 대부분을 처리하는 것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 * *
“자커를 사로잡았다고? 왜 말 안 했나!”
내가 조금만 젊었다면,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토해냈겠으나 일단 작전 중이었기에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됐고. 상층 마법사에게 연락할 수단은?”
“본 스피어를 수직으로 쏘면 대화를 요청한다는 사인이다. 상대도 응한다면 같은 방법으로 본 스피어를 쏘겠지.”
중세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그 뒤로 오래전부터 내려온 네크로 학파의 전통이니 뭐니 떠들길래 대충 듣는 척하다 물었다.
“자커가 붙잡힌 건 상대측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신호가 안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부탑주라고는 하나 상층 마법사쯤 되면 그들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그럼 전쟁에는 왜 참여했을까?”
“우리 물주님 때문이지.”
“나?”
“골든팁.”
상층 마법사가 중층 마법사의 연구자료를 원한다는 소리였다.
“욕심이 대단들 하네. 그런 거 때문에 목숨을 거나.”
“그런 거라니.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지?”
어찌 되었든 반란군 리더는 히드라였기에 그의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다.
“그건….”
* * *
다음 날.
정오 무렵에 반란군이 본 스피어를 쏘아 올리자 상층 진영에서도 본 스피어가 하늘로 솟구쳤다.
전통대로 수장들이 전장 중앙에서 만나 협상을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나와 샤아는 보좌라는 명목으로 협상 자리에 참여했다.
“자커의 두개골이 우리에게 있다.”
“필요 없다. 우리는 중층 마법사 전원의 연구자료를 원한다.”
“연구자료는 마법사의 영혼과도 같은 것. 이런 식으로 넘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상한 주제가 나왔고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협상이 이어지다 천장의 조명이 어두워질 때쯤에야 상층 마법사가 본심을 꺼냈다.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상층에 올라올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새벽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중층의 포탈은 자커의 마법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음. 어쩔 수 없나. 어억!”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히드라가 수락하려 하기에 나는 놈이 앉아 있던 의자를 걷어차고 다른 의자를 가져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히드라가 얼굴을 구기며 무어라 하려 했으나 샤아 나탈리아가 그에게 언어 상실 저주를 걸어 무력화시켰다.
“…내란인가?”
“바지사장 상대하느라 고생 많았다. 쭉 들어보니까, 이게 너희한테는 엄청 중요한 건가 본데.”
홀로 보드에 연구 목차를 띄워 위아래로 드래그하자 그의 안광이 가늘게 떨린다.
“내놓는다면 상층으로 향하는 포탈을 만들어주마.”
“그딴 건 필요 없고. 내 요구는 하나다. 샤아 나탈리아의 사후맹약에 참여한 놈들의 숙청.”
“뭣이라?”
“너도 거기에 마력을 보탰나?”
“흥, 그딴 졸렬한 행사에 내 마나를 버릴성싶으냐.”
“그럼 상관없잖아.”
나는 홀로 보드를 테이블 위에 두고 상층 마법사 대표를 향해 밀었다. 해골 손으로 보드를 만지며 연구자료를 확인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좋다. 그날 자리를 비웠던 상급 마법사를 처리하지.”
샤아 나탈리아를 제재하는 건 일종의 이벤트처럼 진행됐다고 한다. 방명록이 남아 있다는 말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계약서를 쓰겠나?”
“당연한 소릴.”
그는 내일이 되기 전까지 놈들을 처리하기로 약속하고 떠났다.
그리고 반란군 진영으로 돌아오자 샤아가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본다.
-마나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래? 어디.”
【이름 : 샤아 나탈리아】
【종 : 인간】
【힘 : 10】
【지 : 75】
【마 : 91(130)】
【잠 : —】
【특성 : 마나세이브(S), 잠재력돌파(A), 마나 허브(C), 봉인(C)】
【설명 : 사후맹약에 의해 스테이터스와 특성이 영구 봉인됨, 잠재력 돌파 재각성함, 체외에 마나가 흐르는 통로를 생성해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을 터득함, 전 하층 슬럼가 리더, 최근 여러 마법사의 연구를 도우며 많은 깨달음을 얻어 즐거움, 방금 사후맹약이 완화됨.】
언포스를 통해 확인해보니 확실히 봉인의 등급이 내려가고 마력 스텟이 크게 늘었다.
“몇 명 정도 남은 거 같아?”
처음에는 스물이라는 사념을 보내왔으나 잠시 멈칫하고는.
-4명 남았습니다.
실시간으로 그놈이 칼춤을 추고 있었던 모양.
다시 하루가 지나 협상장에서 그와 만났다. 참고로 히드라는 전장에서 용을 너무 쓴 나머지 탈이 난 거로 해뒀다. 물론 실상은 우리가 수를 써서 재운 거고. 그래서 지금 협상 대표는 샤아다.
“계약을 지켜라.”
“물론.”
이 연구자료의 공유는 이미 동의받은 사항이다. 한번 골든팁을 통해 어느 정도 퍼진 자료들이었기에 강하게 거부하는 이는 없었다.
적당히 어르고 달래니까 다들 오케이 하더라고.
“대단하군…, 좋아. 호오. 이런 방식으로 에이드 주스를 자동 수급을 한단 말인가. 쓸모는 없지만, 과정 자체는 참신해.”
학생을 평가하는 교수처럼 혼자 주절대던 그가 나의 시선에 헛기침하며 묻는다.
“큼, 정말 포탈을 열 필요가 없나?”
포탈 기관은 상층에만 있는 소재를 상당량 소모해야 복원할 수 있다고 한다.
“상층에서 중층으로 오는 마당에 무슨. 너도 그 자료 얻으려고 전쟁에 참여한 거 아냐?”
“그야 그렇다만…. 좋다. 그럼 전쟁은 끝이다.”
“그래. 피차 생각 없는 대가리 때문에 고생이 많았어.”
“네 말대로다.”
“아, 참. 상층에 존재하는 모든 사후맹약 참여자는 다 죽인 게 맞나?”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내 혼과 마나를 걸고 맹세컨대. 모두 죽였다.”
확인 삼아 샤아를 슬쩍 보자 녀석의 안광이 위아래로 살짝 움직인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는 그대로 협상장을 나왔고 반란군 진영으로 돌아가며 샤아에게 말했다.
“찾을 수 있지?”
사후맹약에 참여한 나머지 4명은 아군 중에 있다. 이를 깨달은 샤아가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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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