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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58화 (58/201)

<58화>

그웬X멜론

트레이시 그웬은 하층에서 남만혁과 모험 중 가문의 호출로 인해 급하게 집이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컬버 시티로 복귀했다.

컬버 시티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기후가 안정적이다. 한여름이라도 27도를 넘기지 않고 겨울에도 7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물론, 사람이 살기에 이곳보다 더 좋은 지역도 존재하나 서히아가 있는 대한민국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것도 사실이다.

“트레이시. 어서 오너라. 모험은 재밌었느냐.”

사랑을 담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는 캘리포니아의 여름이었고.

“여보. 얘 나이를 생각하세요. 장래가 정해지는 중요한 시기에 여행이 웬 말이에요. 트레시, 잘못한 게 있다면 지금 말해. 나중에 우리 뒤통수 치지 말고. 어머, 입 꾹 다문 것 좀 봐. 여보 얘 버르장머리가—”

사람의 이름을 쓰레기로 발음해 부르는 저 계모는 대한민국의 겨울과 같았다.

“그만.”

미하일 그웬은 늘 낮은 목소리로 계모를 점잖게 만류할 뿐 다그치진 않는다. 트레이시 그웬은 이런 모습을 수년간 봐왔음에도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길버트가 저렇게 될까 걱정이에요. 이리 오렴, 길버트.”

계모는 자기 아들 길버트 그웬을 불렀으나 열 살 남짓한 꼬마는 트레이시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누나! 안녕!”

“응, 안녕.”

길버트는 저런 계모에게서 태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하고 착한 아이다.

계모가 임신했을 때 지나가던 성직자가 성자가 태어날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던데, 마냥 틀린 말은 아닐지도.

말랑말랑한 길버트의 볼을 좌우로 늘리며 인사를 받아준 트레이시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곤 계모 쪽으로 보냈다.

“저는 누나랑 모험 놀이하고 싶어요!”

“나중에. 지금은 들어가.”

“힝.”

몇 번이나 트레이시를 돌아보며 아쉬워하는 길버트의 모습에 미하일이 엄하게 으름장을 놓자 후다닥 계모에게 달려가 안긴 채 2층으로 올라가는 길버트.

인디아나 줄리아 세트를 예약 구매한 것도 길버트가 그런 장난감을 좋아하기 때문. 본래라면 들고 와야겠지만, 남만혁이 중요하게 쓰고 있는 듯하니. 나중에 돌려받기로 했다.

“그래, 모험은 재밌었느냐.”

“재밌어질 예정이었죠.”

당신이 호출해서 재미를 못 봤다. 그리 둘러서 말할 줄도 알게 된 트레이시를 본 미하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 새는 둥지에서 떨어져야 날갯짓을 한다고 했던가.’

고작 반년 남짓한 기간에 불과하나 입학하기 전에 비해 부쩍 성장한 딸의 모습에 감정이 복받쳐오는 미하일이 안경을 벗는 척하며 눈가를 눌러 눈물을 숨겼다.

“다 컸구나. 너의 재미보다 내 부름을 우선시하다니.”

“네? 중요한 일 아니었어요?”

트레이시는 아버지가 호출한 게 아니라, 그웬 가문이 불러서 온 것이다.

“급한 일이 생긴 건 맞다.”

“뭔데요.”

탐색 특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짐작한 트레이시는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웬 뱅크의 데이터가 유출됐다.”

그웬 가문은 금융업으로 부흥한 집안이다. 증권사, 자산운용사, 선물, 신탁, 종합금융, 투자자문, 기회가 되면 헤지 펀드까지 주도하며 급속도로 세를 불렸다.

미하일 본인과 그의 아버지가 돈의 흐름을 보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고, 이는 불행하게도 남성에게만 유전이 되는 능력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계모를 들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

“네 도움이 필요하다. 트레이시. 나를 도와다오.”

세계에서 끌어다 모은, 똑똑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인사들과 대책을 강구했을 텐데도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마땅한 답이 없었다는 거겠지.

트레이시로서는 몹시 통쾌하고 웃기는 상황이었고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차를 마시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트레이시?”

“생각 좀 해볼게요.”

“…그러거라.”

트레이시 그웬은 다과실을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도와준 대가로 계모의 뺨을 쳐달라고 해볼까?’

이제까지 당한 거에 비하면 약하지만,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 *

다음 날.

“꺄아아악!”

“왜 그러십니까, 마담. 헉!”

저택에 상주하는 경호원이 안주인의 비명을 듣고 침실에 난입했을 때. 미하일이 있어야 할 침대엔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목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계모는 눈을 비비며 방에 들어오려는 길버트를 안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정으로 도망쳤다.

“뭐야. 저 아줌마 왜 저래.”

계모가 뛰쳐나가는 자기 방에서 창문 너머로 본 트레이시가 1층으로 내려오자 경호원이 현재 상황을 알렸다.

“…아버지의 손목이?”

다급하게 침실을 찾은 트레이시는 그 손목을 보자 눈앞이 검게 변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아가씨!”

트레이시 그웬은 절망했다.

‘어제 아버지를 도왔더라면.’

알량한 복수심 따위에 휘둘린 결과가 지금이다.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와 손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녀석이 떠올랐다.

‘뇌가 미친 건지, 내가 미친 건지.’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 남만혁. 그 빌런 같은 녀석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트레이시는 곧장 남만혁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고민한 끝에 집사를 불렀다.

“데이브.”

“예, 아가씨.”

그웬 가문에 52년을 헌신한 집사 데이브는 침음만 삼키며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급히 트레이시 그웬 앞으로 달려갔다.

“경찰을 불러서 저 손이 아버지 손인지 확인해주시고, 주변에 흔적은 없는지….”

찌릿.

특성이 반응한다.

트레이시는 급히 데이브의 면장갑을 빼앗아 끼고 미하일의 손을 살폈고 검지와 중지에 아주 작은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하일을 살리고 싶다면, 그웬이 누린 모든 것을 포기해라.]

레이저로 살갗을 태워 만든 문자에서는 아주 옅지만 묘한 향기가 남아 있었다.

“이 향.”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라는 것을 알아챈 트레이시는 자신의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트레이시의 숨겨진 능력, 기억의 궁전.

각성도 선천적인 재능도 아닌 오로지 노력을 통해 개발한 이 정보의 요람은 트레이시가 살면서 겪어온 모든 정보가 압축되어 담겨 있다.

키워드는 고급 향수.

‘고급 향수가 가장 많았던 곳은…. 3년 전. 금융인의 밤. 하얀 정장에 중절모를 쓴 노인. 지팡이로 내 엉덩이를 때렸었지.’

그때 맡았던 향이다. 단순히 향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는 없으나 조사 정도는 해볼 법하다.

“가일 가문을 조사해줘. 냄새가 나.”

집사, 데이브는 가문 구성원 모두가 패닉에 빠져있을 때 홀로 냉정한 판단을 하는 트레이시 아가씨를 보곤 그간 갈팡질팡하던 마음에 결단을 내렸다.

“아가씨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응? 어. 고마워.”

모두가 나가고 감식반이 당도했다는 소리가 들릴 때쯤. 미하일의 손을 지켜보고 있던 트레이시의 눈에 가죽 아래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글씨가 보였다.

[혼자 올 것.]

혼자?

“가져가겠습니다.”

사건 조사를 맡은 경찰이 정중히 트레이시에게 물었고 그녀는 한 번 더 손을 꼼꼼히 살핀 뒤에 감식반에 넘겼다.

“그런데 거기 글씨요.”

“글씨라니요?”

“손가락 사이에 글씨.”

없어졌다.

“예?”

“…아닙니다. 점을 잘 못 본 거 같네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충격이 크실 텐데, 저희를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데 미하일 씨는 아내분이 계신 거로 아는데….”

“쫄아서 튀었으니까 외가로 가보세요. 참, 해부할 때 뼈 사이사이까지 확실히 확인해주세요.”

“으음. 네. 전달하겠습니다.”

트레이시는 얼굴을 찡그리며 쳐다보는 경찰을 뒤로하고 방으로 올라와 남몰래 집사를 불렀다.

“데이브, 솔직하게 말해. 우리한테 불만 같은 거 있어?”

“아니요.”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오는 듯한 데이브의 답과 특성이 발동하지 않는 것에서 거짓이 없다고 판단한 트레이시는 마지막에 봤던 글씨를 그에게 알렸다.

“혼자 오래.”

“예?”

“아버지 손에 말야. 혼자 오라는 글씨가 나타났어.”

“절대 안 됩니다!”

데이브는 딸과도 같은 트레이시가 혹여나 범인의 협박에 무모하게 나설까 하여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렸다.

“윽, 안 갈 테니까. 좀 놔.”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내가 거길 왜 가.”

“제 눈을 봐주십시오.”

“안 간다니까.”

인큐베이터 안에서 꼼지락거릴 때부터 트레이시를 지켜봐 온 데이브였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아, 아가씨. 차라리 언론에 공개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죽여서 증거를 없애겠지. 가일이 라이벌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데이브도 알잖아.”

가일 가문이 소유한 프라이빗 해변이 있는데, 그 근처 바닷속에는 원통형 시멘트가 수도 없이 굴러다닌다.

“…가주님께는 송구한 말이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가씨를 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간 냉정을 유지한 트레이시 그웬은 데이브의 진심 어린 걱정에 순간 코가 찡했으나 고개를 돌림으로써 그 모습을 감췄다.

“내가 미쳤다고 거길 혼자 가? 친구 데려갈 거야.”

“이 일은 장난이 아닙니다. 가문의 존망과 아가씨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신중히 행동하실 때입니다.”

“알아, 나도 신중히 고민해서 말 한 거라고. 아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일걸?”

“아무튼 지금은 안 됩니다. 최소한 감식 결과를 받고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건 그래야지.”

“안 됩니다! …네?”

“그럴 거라고. 이런 말 좀 그런데. 나는 아버지보다 내 목숨이 더 소중해.”

데이브는 트레이시 그웬의 그 이기적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눈을 통해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 * *

일주일 후.

“결과는?”

“도테르타 가일의 DNA와 일치합니다.”

“멍청한 건지, 당당한 건지.”

트레이시의 요구대로 해부를 통해 뼈에 새겨진 글씨를 찾아낸 경찰은 거기에 남은 흔적을 조사. 범인을 가일 가문의 차남으로 특정하는 데 성공했다. 찾아낸 놈의 은거지는 멕시코 서부 미초아칸주였다.

“갱단을 등에 업고 있으니 당당한 것이라 봐야지요.”

다 좋은데, 미초아칸주는 세계 최대 아보카도 생산지라는 점이 문제다. 시간 대비 수익률이 마약보다 높아 농장에선 수십 년째 하루가 멀다 하고 갱단과 농장연합의 총격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도테르타 가일은 그 중심에 있고.

“그럼 나도 친구 업고 가면 되겠네.”

“아가씨!”

“별수 없잖아.”

그웬 가문은 트레이시를 내세워 며칠간 분주히 도움을 요청해왔다. 금융인들을 가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에 뒷걸음질 쳤고 경찰은 ‘멕시코의 협력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히어로 연합은 ‘내부 정비 중이라 좀 오래 기다리셔야 합니다.’이 따위 소리나 해대고 있으니.

“아가씨….”

한숨을 길게 내쉰 트레이시는 홀로폰의 전화번호 목록을 보며 몇 번이나 고민한 뒤에 이름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

-여보세요?

“멜론? 트레이시 그웬인데.”

-응.

“나 좀…, 도와줘.”

-어디야?

“집—”

-갈게.

뚝.

이유조차 묻지 않고 오겠다는 말과 함께 끊긴 전화.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흔들리는 어깨, 눈을 덮는 손, 질끈 깨문 입.

트레이시는 길버트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숨기지 않은 채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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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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