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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59화 (59/201)

<59화>

가일 (1)

“위험하네요.”

그레이스 멜론이 그웬 가에 도착해 사정을 듣고 뱉은 말은 트레이시의 마음을 묵직하게 눌렀다.

어쩌면 이 착한 친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언제까지 오라는 이야기는 없었나요?”

“확실한 건 아닌데, 부검을 맡겨둔 아버지의 손가락이 하나 접혀서 펴지질 않는대.”

절단면이 깔끔해 생체 유지 중인 손이 사후경직 때문에 저절로 접혔을 리는 없다.

일주일에 하나. 5주 안에는 오라는 뜻이 아닐까. 트레이시가 그리 짐작하자 그레이스 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네요. 어른들에게 도움은 요청하셨나요?”

“하는 중이야. 히어로 연합이랑 경찰은 글렀고 우리 가문에 빚진 사람 중에 찾고 있어.”

트레이시는 각성자 채무자들에게 빚 탕감을 더불어 그웬 뱅크가 제공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해줄 테니 갱단과 싸워달라 요청했으나 지금까지 돕겠다고 나선 이는 없었다.

“용병은요?”

“그쪽은 그웬 뱅크의 이미지가 손상된다는 이유로 임원진에서 반대. 솔직히 세간에 알려지면 아버지의 목숨이 더 위험해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렇군요.”

목적한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정보 수집. 남만혁이 입이 닳도록 한 이야기를 떠올린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도테르타 가일에 대한 정보가 있나요?”

“남들 아는 만큼 알지. 차남 쪽은 가문을 이을 것도 아니어서 크게 신경 안 썼거든.”

트레이시는 벽면 전체를 홀로 보드로 전환해 도테르타 가일에 대한 정보를 나열했다.

이름, 나이, 성격, 학력, 여권 기록, 범죄 이력, 최근 행적까지 쭉 붙여놓자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얼핏 짐작이 갔다.

“후계자가 되고 싶은 건가.”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이네요.”

어느 순간부터 나락으로 꽂히는 성적. 범죄도 그때 처음 시작했고 SNS에 총과 마약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 시점에 일어난 가일 가문의 변화를 살피니 차기 가일 금융의 대표를 장남인 수트라 가일로 확정한 것.

도테르타는 차남이 가진 한계를 극단적인 수로 돌파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 야망의 수단으로 경쟁 가문인 그웬의 수장을 상해하고 납치한 거겠지.

“구출 자체는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요.”

“진짜?”

“밤에 유니버스 다이브로 공습하면 아무리 좋은 설비라도 소용없거든요. 다만, 그 이후를 생각해보세요.”

“…복수.”

“네, 가일은 아들이 위협을 받았다는 명분을 얻어요. 미하일의 납치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굴겠죠.”

가일이라는 가문의 역사가 그렇다. 세간에 알리기 힘든 상황을 만들어 상대를 몰아넣고 의도적으로 한 대 맞은 뒤, 철저한 보복과 약탈로 가문을 키워왔다.

“그놈들이라면 분명히 그럴 거야.”

“트레이시, 잘 들어요. 우리는 구조와 공격을 동시에 해야 해요.”

“어떻게?”

복잡할수록 과감한 수를 던져야 성공률이 높다는 빌런의 생존법을 머리에 넣어둔 그레이스는 침을 한차례 삼킨 뒤 입을 열었다.

“트레이시, 당신이 가일 본가를 치는 거죠.”

* * *

미하일 그웬의 납치로부터 4주 후.

“흐아아암.”

과거 네크로 마탑의 최하층이었으나 현재는 최상층이라 불리는 곳에서 남만혁은 브래들리의 부채 시중을 받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안 바쁘십니까.

정식으로 탑주가 된 샤아 나탈리아는 상층의 마법사들이 계획한 대청소 프로젝트를 사람이 아닌 구역으로 바꿔 대규모 개편을 시작했다. 언데드가 아니었다면 업무량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기에 옆에서 한가로이 하품이나 해대며 시간을 축내는 파트너를 좋은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슬슬 가야지. 조져놔야 할 놈도 있고.”

-그러시지요.

작은 해변에서 일어난 남만혁은 구현을 해제한 뒤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건 꼭 챙기시는군요.

깔개로 쓰던 망토를 둘둘 말아 품에 넣는 모습을 보고 의문을 담아 말하는 샤아에게 남만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딸이 만들어 준 거라.”

-딸? 결혼하셨었습니까?

“양녀야. 참, 선 프로젝트는 리쳇에게 요청해놨으니까 둘이 상의해서 잘 해봐.”

-감사드립니다. 중마협회도 부탁드립니다.

“오케이. 내보내 줘.”

브래들리가 오래된 인쇄기에서 ‘명예 부탑주 : 다크 넥서스, 무기한 외출권.’이라는 묘한 종이를 뽑아냈고 그걸 확인한 샤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에 열쇠를 꽂아 넣는다.

-잘 다녀오십시오.

“갔다 올게.”

* * *

내리쬐는 태양. 기름에 달군 듯한 모래알. 피부를 할퀴는 뜨거운 바람. 저 멀리 춤추듯 흔들리는 선인장.

여기가 빌어먹을 사막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리쳇.”

-왜 불러, 농장주.

“여기서 하이잭은 어렵겠지?”

지나가던 비행기라도 납치하고픈 심정에 한 말이었으나 돌아온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이동 수단 때문에 그러는 거면, 배 타고 가면 되잖아?

“배? 무슨. 아.”

인적이 드문 사막. 어느 정도는 해변과 겹치는 모래들.

“되려나. 미르토스.”

역시 사막이라 그런지 해안은 그런대로 생겨나는데 수심이 매우 얕다. …넥서스의 출력이면 꼭 물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모르것다. 넥서스!”

내 발아래에서 흙과 모래를 좌우로 갈라내며 부상하는 넥서스. 처음에는 그어엉 대는 엔진소리만 들렸으나 차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속도에 맞춰 해변 구현을 갱신해야 했다.

속도는 그냥 달리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

“오.”

다만, 숙련도 상승 속도가 엄청나다. 꾸역꾸역 나아가는 넥서스의 출력은 물론이고 최근 벽에 막힌 듯 지지부진하던 미르토스까지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혹시 몰라서 구름으로도 가렸으니까 계속해도 돼.

나를 주시하는 위성이 없는지 항상 체크하는 리쳇이 만약의 상황까지 대비하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리쳇, 센스가 좋아.

밤이 되자 리쳇이 넥서스 주변으로 안개를 뿌렸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자기도 수련을 해야겠다나.

아무튼 그 덕인지 사헬 사막을 절반쯤 횡단했을 때쯤, 특별한 현상이 생겼다.

“리쳇, 네가 한 거야?”

-아니, 평소대론데? 잠시만.

휴식이 필요할 때는 지금처럼 해변의 구현을 해제해 넥서스가 어느 정도 기울길 기다린다. 땅에 닿기 전에 해제해 뛰어내리는 건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해변을 해제했음에도 기울지 않는다.

-떠 있어.

“뭐?”

-바닥에서 떠 있다고. 내 안개를 이용해 균형을 잡고 있네. 넥서스 조종수가 누군진 몰라도 대단한데.

리쳇의 농담이다. 넥서스 안은 아무도 없다. 없어야 하는데.

“함장님! 착륙 명령을 내리시면 즉각 착륙하겠습니다!”

경계를 올려붙인 중갑병이 차렷 자세로 나타났다.

“누구?”

“넥서스 호 조종수, 중위 기드빈!”

내가 뒷짐을 진 채 다가가 그의 얼굴을 가린 면갑을 거칠게 올리자 흔들리는 동공이 보였다.

“내가 누군지 아나?”

“함장님입니다!”

“정확하게.”

“모릅니다! 군인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기드빈. 우리가 안개 속을 얼마나 날 수 있지?”

“동일 조건상 기동 가능 시간은 35분. 이상입니다!”

“자네 말고 승무원은 없나?”

“없습니다!”

드라마, 솔라 파이러츠에 기드빈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조연만 조명하기도 버거웠기에 대사 없는 승무원들은 대부분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았다. 심지어 매화 얼굴과 덩치가 달라지는 역할도 있었고.

‘창조는 아닐 테고. 대본에 있는 설정을 끌어온 거겠지.’

결과적으로 기드빈 덕에 조종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니 다른 쪽으로 소스를 돌렸다. 넥서스의 속도나 유지 시간, 해변의 완성도 같은 것들 말이다.

“한계까지 전진한다.”

“예, 써!”

이후 안개 속을 날다 시간이 다 되면 다시 충전될 때까지 해변을 구현하는 식으로 이동해 단 이틀 만에 아프리카 대륙 서쪽 끝, 누악쇼트라는 인구 100만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좀 멀리서 내린 뒤에 도시로 들어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선박장을 찾았다.

“이거 얼마요?”

낡고 오래된 배. 연안에서 넥서스를 소환했다간 난리가 날 게 뻔했기에 바다로 나간 뒤에 구현할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선 배가 필요했고. 막 하선하던 어부는 침을 탁 뱉으며 불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00만 달러. 싫으면 꺼, 컥! 끄륵.”

복어 독 포이즌을 매개로 영역을 전개하자 놈은 감전된 사람처럼 전신을 바르르 떨더니 그대로 무너진다.

놈이 쓰러지자 등허리에 꽂힌 총이 눈에 들어왔고 그걸 바다에 던져 넣은 다음 총집에 이 배의 값으로 적당한 달러를 쑤셔 넣었다.

“마비는 내일이면 풀릴 테니까, 쫄지 말고.”

어부를 인적이 드문 곳에 숨겨두고 밤까지 기다렸다가 바다로 나와 넥서스를 구현. 그대로 북대서양을 가로질렀다.

온전히 속도에만 집중하자 플로리다에 닿는 건 순식간이었고 멕시코만을 지나 미초아칸주에 도착했다.

리쳇이 안개와 구름으로 철저히 가리고 이동했기에 어지간하면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방금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리쳇이 내 망막으로 전송했고 해당 게시글엔 한 줄만 쓰여 있었다.

‘ghost ship.’

좋아요와 하트의 수가 엄청난 속도로 오른다. 그중 다수의 추천을 받은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dnf14 : 다크 넥서스!]

[ㄴdnf650 : DN, DN, DN!]

[ㄴthoisK : 다크 넥서스가 뭔데.]

[ㄴdnf1 : 그는 안개 속에서 유령선을 타고 나와 사람을 구하지! 정의의 해적이야! 링크 : 대한민국 부산 다크히어로 영상]

차마 그 뒤로는 읽을 수 없어 눈을 빠르게 깜빡여 창을 껐다.

-정의의 해적.

“큭.”

-파이러츠 오브 저스티스!

“차라리 욕을 해!”

-깔깔깔.

리쳇의 웃음소리가 고막을 간질인다. 날숨을 길게 뱉을 때쯤, 기드빈의 보고가 있었다.

“목표지점 도착! 착륙하겠습니다.”

다크 넥서스의 복장을 갖추고 원할 때마다 얼굴을 바꿔주는 필름 페이스를 착용했다.

아, 필름 페이스는 자커의 인간 흉내를 내는 음성 마법을 연구해 만든 아티팩트다. 어떻게 저게 이거로 연결됐는지 샤아가 상세히 설명해 줬었는데, 들어도 모르겠더라.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 하나 달라고 해 가져왔다.

이런 형태의 기술은 최소 20년은 지나야 나오는 물건이고 중앙마도협회와 히어로 연합의 동시 인증받아야만 지급된다.

“샤아가 천재는 천재야.”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망토를 뒤집어 착용한 뒤 필름 페이스를 붙였다.

리쳇이 조합한 흔한 중년의 얼굴로 불러온 다음 놈이 있는 농장지대로 은밀히 진입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가일인데.’

가일. 그블린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 토사구팽당한 가문으로 싹수가 노란 놈이 가주가 되는 바람에 일이 커졌었던 거로 기억한다.

지금쯤 한창 빌런 짓을 하고 있을 때니 적당히 처리하면 된다.

‘쓰읍, 가일 가문 전체가 쓰레기랬던 거 같기도 하고.’

“리쳇.”

-예스, 로맨.

“가일에 대해 전에 조사해둔 거 있지. 그거 좀 다시 전송해줘.”

-최근 상황까지?

“어.”

한 놈만 조질지 아예 가일이라는 성을 세상에서 지울지. 결정할 필요가 있다.

얼마 후, 리쳇을 통해 갱신된 정보를 확인한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미하일 그웬. 내가 아는 그 그웬?”

-트레이시 그웬의 친부. 지금 그레이스 멜론과 함께 움직이는 중.

쓰레기 하나 치운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왔는데, 일이 재밌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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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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