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가일 (2)
멕시코의 항구도시, 아카풀코에 위치한 가일 가문의 별장 지하에서는 남자의 신음과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잘 안되나?”
“으, 말씀드렸잖습니까…. 집은 훔쳤는데 문을 열 수가 없다고요.”
찰칵.
구식 리볼버 약실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어깨를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백색 재킷을 걸친 중년이 소형 리볼버에 총알을 끼우고 있었다.
“곤란해.”
“어떻게든 뽑아내겠습니다.”
답은 컴퓨터 앞에 앉은 남자가 아니라 중년의 옆에 서 있던 장정에게서 튀어나왔다.
“그래야지. 두 가문의 흥망이 걸려있지 않나.”
찰칵.
가일 컴퍼니의 회장이자 가문의 총수인 나파 가일은 미래를 염탐하는 특성을 보유한 인물이다. 본인 주변에 한해서이긴 하나 이 특성 덕에 갖은 암살과 보복으로부터 살아남았고, 대부호가 될 수 있었다.
각성 이후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서른 즈음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웬.’
미하일 그웬. 그놈이 사사건건 가일 컴퍼니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물론, 미하일 그웬은 그저 본인의 길을 간 것에 불과하나 나파 가일 입장에선 치밀하게 짜낸 기획이 번번이 불발하니 어찌 보면 저 분노는 합당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름이 드레이드 닷. 이랬나?”
“예, 예.”
본인이 개발한 해독 프로그램을 돌려놓고 긴장하고 있던 키보드 앞의 해커는 사람 목숨을 파리쯤으로 여긴다는 악명이 자자한 나파 가일의 부름에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답했다.
“도저히 안 되겠나?”
미래를 엿본 나파 가일은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만 저 해커가 가일 가문에서 빼낸 데이터를 쓸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틀이나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그게.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해독에는 시간이 걸, 걸립니다.”
눈알을 굴리며 변명을 대는 젊은 해커의 모습에 나파 가일은 옆의 장정에게 리볼버를 건넸다.
“아 해. 아. 살고 싶으면 더 크게.”
공손하게 리볼버를 받아든 장정은 해커에게 다가가 입 안에 총을 쑤셔 넣었다.
그극, 으각.
탕!
끄아아아악!
안쪽에서 앞니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끔찍한 소리와 비명이 회색빛 공동을 울린다.
“긴말하지 않겠네. 3시간 안에 고객 명단을 내놓게.”
“으아, 아으으.”
“프베타. 3시가 넘으면 처리해.”
“예.”
해커는 장정이 던져준 수건을 꽉 깨물고 전신을 덜덜 떨며 제발 이번에는 해독 프로그램이 성공하길 빌었다.
얼마 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는 해커를 보며 나파 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군. 진행해.”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도테르타 도련님 쪽 일은 어떻게 할까요.”
“미하일 그웬 말인가? 당연히 살려둬야지. 놈을 죽이는 건 너무 아쉽잖나.”
찬란하게 빛나던 가업이 구멍가게로 전락해 절망하는 놈의 표정을 반드시 눈에 새기고 싶었던 나파 가일이 끌끌 웃었다.
“바퀴벌레처럼 기어 다닐 때 밟아 죽여야 제대로 된 복수 아닌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츠즉.
그때 장정은 별장의 입구를 지키는 경호원에게서 무전을 통해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뭐? 잠시만. 가일 회장님.”
“뒷방 늙은이에게 언제까지 의지할 참인가. 웬만하면 자네가 해결해야지.”
“죄송합니다. 그웬 가문의 장녀가 찾아와서.”
“장녀라면, 트레이시 그웬?”
“예. 인상착의가 일치합니다. 회장님을 뵙고자 별장까지 찾아왔고 만나주지 않으면 이미지고 뭐고 세상에 알리겠답니다.”
“허, 저 나이대다운 치기로고. 잘됐군, 잡아다—”
순간 나파 가일의 눈에 주변이 온통 불바다로 변하고 불길 사이에서 금발 청안의 여인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거절—”
거절을 입에 담자 시꺼먼 물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저편에 검정 일색의 사내가 이쪽을 내려다보는 광경으로 바뀌었다.
“음.”
이대로 있으면 머지않아 두 가지 상황 중 하나에 부닥친다. 지금 같은 일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나파 가일은 맹렬히 머리를 굴려 하나의 답을 내놓았다.
“무시한다. 일단 자리를 뜨지.”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볼 수 있는 미래는 사흘 안쪽. 유일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자리를 벗어난다는 선택지만이 자신의 생명을 보장했기에 나파 가일은 망설임 없이 도망쳤다.
“해커 놈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데려와.”
얼마 후 헬기에 올라타 별장을 떠나는 나파 가일의 눈에 손가락 욕을 날리는 그웬 가문의 장녀가 들어왔다.
무장헬기였기에 한발 날려주면 좋겠으나 금발 청안의 여인에 의해 죽는 미래가 스쳐 지났기에 살짝 벌렸던 입을 닫았다.
해안가에 안개가 끼어 있는 이상한 광경에 고개가 기울어졌으나 휴양지인 만큼 또 각성자들이 장난을 치는 것으로 흘려 넘긴 나파 가일은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다 여기서 가장 멀고 그나마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괌의 은신처로 향했다.
“회장님, 수상쩍은 안개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방금 해안에서 봤던 그것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따라오고 있었다. 바다에서 저런 속도로 움직일 정도면 평범한 각성자는 아니었기에 나파 가일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헬기에 장착된 온갖 무기들이 안개 속으로 쏟아졌으나 어떤 폭발도 충격도 없이 계속해서 헬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프베타. 자네가 해결하게. …잠깐, 이상하군.”
선택지를 말로 하면 특성이 미래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이것에 변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어떤 미래도 나타나지 않는다.
직감적으로 어느 때보다 큰 위기라는 것을 알아챈 나파 가일은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말을 중얼거렸다.
“조종사를 죽인다, 문어를 잡는다, 상어에게 물린다, 안개에 뛰어든다. 음? 허.”
그제야 발동하는 특성. 예의 그 검은 옷 사내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광경.
수많은 경우의 수 중 안개에 뛰어드는 것만이 생존과 연결되었기에 나파 가일은 유언 비슷한 것을 트베타에게 남겼다.
“수트라에게는 할 일을 하라 전하게.”
“회장님, 제가 같이 가는 건 어떻습니까.”
“자네는 죽어.”
조종수는 나파 가일의 요구대로 안개 위로 되돌아왔고 문을 연 뒤 잠시 기다렸다. 낙하산을 챙긴 나파가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해커가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다.
“가티 듁다아!”
“미친놈! 당장 놔라!”
“으아아!”
“회, 회장님!”
나파가 자기 몸에 매달린 해커를 팔꿈치와 무릎으로 급소를 공격해댔으나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를지언정 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
“쯧.”
적정 높이가 되자 낙하산을 펼쳤고 기다리고 있던 안개는 하강하는 둘을 잡아먹듯이 받아들였다.
* * *
한편 안개 속에서 넥서스를 탄 채 나파 가일을 추적 중이던 남만혁은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저거.”
마치 포도나무 아래에서 하품했더니 포도알이 저 스스로 껍질을 벗고 알맹이만 입에 쏙 들어온 듯한 상황.
당혹스럽긴 하나 굳이 뱉을 이유도 없었기에 기드빈에게 저걸 선수로 받으라 지시했고 얼마 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갑판으로 올라오자 앞니가 없는 젊은 남자가 중년의 몸을 부둥켜안은 채 기절해 있었고 중년은 그런 사내를 걷어차는 중이었다.
“후욱, 후.”
나파 가일은 해커를 자기 몸에서 떨어트리고 나서야 낙하산을 벗고 남만혁을 쳐다본다.
“이제 진정됐나. 나파 가일.”
“너는 누구지?”
“다크 넥서스.”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이냐.”
남만혁은 입가를 길게 늘이며 답했다.
“아무것도.”
“뭣? 그럴 리가. 네놈이 바라는 게 있으니 나를 미행했던 것 아니냐. 그걸 미행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래, 본래라면 내가 네놈들을 정리할 셈이었다만 우리 회원님들이 알아서 나서주니 뒤에서 지켜보기로 했지.”
“회원?”
“알 필요 없다.”
고대로부터 우두머리의 부재는 분열을 낳았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기에 남만혁은 중갑병 기드빈에 의해 포박당한 나파를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뒷짐을 졌다.
“애들 실력 좀 볼까.”
남만혁의 심중에 미하엘 그웬의 안위 따위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 * *
쾅!
“윽, 뭔. …X발?”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충격에 벌떡 일어난 도테르타 가일은 창밖의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을 감기 전에 봤던 울창한 숲과 심혈을 기울여 설치한 마당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커다란 크레이터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 경보음이 울렸고 강한 조명이 켜지며 크레이터를 비춘다. 표적지나 마찬가지인 빛줄기를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여기며 부상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금발 청안의 소녀는 주변을 살피다 도테르타와 눈이 마주쳤고 곧장 들이닥쳤다.
뒤늦게 갱단이 쏜 탄환들이 소녀를 쫓았으나 회피 기동으로 모조리 피하고 도테르타의 침실로 난입.
창틀을 깨부수고 침입한 소녀에게 매그넘을 겨누며 묻는 도테르타.
“누구냐.”
무어라 하려던 소녀는 잠시 머뭇대다 답했다.
“퀸. 히어로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목소리를 알아챈 도테르타는 상대가 애송이임을 간파하고 매그넘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퀸은 측면으로 재빨리 굴렀으나 총알의 궤적이 휘어 그녀의 목에 박혔다.
“이 쥐X 만한 년아. 히어로가 나를 찾아온 게 처음인 줄 알아?”
도테르타 가일, 24세, 특성 필중.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을 5m 이내라면 반드시 상대에게 적중시키는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도테르타는 허공에 아무렇게나 쏴 갈겨 매그넘의 탄창을 비웠고 튀어나온 탄두는 모조리 쓰러진 퀸의 전신에 박혀 들었다.
“치워.”
“예, 보스!”
갱들은 불 꺼진 어둠 속에서 퀸에게 다가가던 중 전원 명치에 커다란 충격을 느끼고 꼬꾸라졌다.
꺽꺽대는 그들을 걷어찬 퀸이 호흡을 고르며 일어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테르타는 입에 문 시가를 뱉었다.
“어떻게 서 있는 거지?”
말을 하면서 신속하게 탄창을 갈아끼는 모습에 퀸은 매그넘과 도테르타의 손을 같이 쥔 채 힘껏 우그러트렸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이고 짓뭉개진 손가락.
“끄아아악! 으, 으으. 원하는 게 뭐냐.”
“미하일 그웬.”
도테르타는 이 일이 아버지가 준 마지막 기회로 알고 있었고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무척 공을 많이 들였다.
지금과 같이 히어로가 찾아올 것을 대비해 함정을 만들어뒀으나 저 크레이터 한방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도테르타가 입을 다물자 놈의 반대편 손을 움켜쥐는 퀸.
“끄아아악!”
“미하일 그웬 어딨어!”
“흐흐, 냉동창고에 있다. 지금 가 봤자 소용없어. 놈은 이미 얼어 죽었을 테니까!”
안색이 굳은 퀸이 도테르타 가일을 인질로 삼아 갱들을 뿌리친 후 실토한 냉동창고로 날았다.
창고를 지키던 경호원을 제압하고 문을 열자 천장에 매달려있는 사람이 보였다.
몸통이 묶인 채 축 늘어진 모습.
창고 입구에 깜빡이는 온도계는 영하 2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실종되고 열흘. 처음부터 이곳에 계셨다면.’
이미 죽었다.
그리 여긴 퀸은 입술을 깨물고 도테르타의 목을 잡아 쥐었다.
콜록!
도테르타의 입에서 나온 기침이 아니다. 홱 고개를 돌려 천장을 올려다보자 한쪽 눈을 뜬 채 이쪽을 바라보는 미하일 그웬.
급히 도테르타를 내팽개친 퀸이 그를 묶은 사슬을 풀어 인근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의사는 임시 보호자인 퀸에게 한 가지 사실만은 알린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습니다.”
“하아.”
퀸이 미하일 그웬을 구조했다는 사실을 트레이시에게 알리자 그녀는 곧장 가문의 전용기를 타고 병원으로 왔다.
“고마워, 그레이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들어가 봐.”
드륵.
“트레이시.”
지금껏 본 적 없었던 아버지의 쇠약한 목소리와 희미한 웃음에 트레이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미안해, 미안. 내가 그날 알겠다고만 했어도.”
“아니다. 너는 아무 잘못도 없단다.”
트레이시는 아버지와 대화를 얼마 나누지도 못하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에 특실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진통제 투여하겠습니다.”
남자 간호사를 본 미하일의 눈이 급속도로 커진다.
“…너.”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금융인의 밤 이후 처음인가요? 뭐, 이런 상황에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수트라, 가일….”
“잘 가십시오. 그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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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