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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63화 (63/201)

<63화>

하나 보육원, 주나라

며칠 후. 멕시코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진흙 꽃의 효용을 공개하더니 맡겨주면 국토복원 8년 프로젝트를 진행하겠다며 대놓고 재임을 요구했다.

“그래, 정치를 하려면 저렇게 뻔뻔해야지.”

대통령의 연설 이후, 지금까지 언데드를 파괴하거나 돌려보내던 주에서도 파견을 요청하거나 숫자를 늘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해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이 사업을 샤아에게 넘겼다. 그녀는 내가 하층에서 만났던 IK 카라반과 협력해 멕시코까지 이어지는 언데드 라인을 구축하겠다며 자신감을 보였고.

“리쳇, 우리는 슬슬 손 떼자.”

-수익이 보장된 모델인데?

“돈줄 하나 정도는 쥐여줘야 앞으로도 말을 잘 듣지.”

-보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번 일로 네크로 학파와 언데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진 못했으나. 데드레드스컬이 생전에 이루려고 했던 과업을 일부 달성한 것에 만족한다.

“뭐, 이만하면 스컬러 값은 했지.”

* * *

간다 간다 하던 것이 결국 개학 전날 밤에서야 하나 보육원에 들를 수 있었다.

지각한 학부생이 강의실 뒷문을 열듯,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니 바로 앞에 소민 누나가 부스스한 차림으로 도끼 눈을 뜬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소민 누나는 거실 불을 켜고는 홀로폰을 조작해 영상 하나를 띄운다. 문 앞에서 기웃거리다 극한의 기술로 소음을 죽인 채 현관문을 여는. 누가 봐도 도둑놈으로 보이는 사람. 나였다.

“이야, 요즘 기술 좋네.”

“네가 설치하고 간 거야. 도둑 들면 신고하라고.”

“…잘 지냈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소민 누나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소파 손 걸이에 앉는다.

“오늘이 며칠이야.”

“8월 31일?”

“20분 뒤면 9월이고. 9시간 뒤면 강의 시작이네?”

“그…렇지?”

매섭게 노려본다. 어린 시절, 누나가 해준 밥 먹기 싫다고 땡깡 부리며 나왔다가 슈퍼에서 빵을 훔쳤을 때. 딱 한 번 저런 눈을 했다.

“미안.”

“연락도 안 되고.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안 그럴게.”

“약속한 거다. 너. 앞으로 전화 안 받기만 해봐.”

“누나 전화는 무조건 받을게.”

“으휴, 이리 와. 누나가 한 번 안아보자.”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가녀린 누나의 품인데도 어째서인지 몸 전체를 감싸는 듯한 느낌.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

툭툭, 등을 두드리고 나를 떼어낸 소민 누나는 잠시만 기다려보라며 찜닭 재료를 꺼내더니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다.

“밤인데 먹게?”

“가끔 야식도 먹어야 잘 크지.”

“누구, 나?”

“우리.”

소민 누나가 곧 달그락거리며 요리를 시작하자 잠들었던 아이들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누나, 밤에 뭐…. 혁이 형? 언제 왔어!”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게 달려와 안기는 김태양. 국대가 되겠다던 녀석답게 몇 달 만에 벌써 팔다리가 딴딴해졌다.

녀석의 근황을 묻던 중 어느새 맞은편 소파에 와 앉아 있는 주나라.

“나라야, 너도 별일 없지?”

“있어.”

어째 뾰로통한 녀석의 얼굴. 통통한 볼을 건들자 내 손가락을 잡고는 송곳니 쪽으로 깨문다.

“악.”

“흥.”

그러고는 안쪽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바퀴가 달린 아기침대를 끌고 왔고 거기엔 얼마 전 여기에 맡겼던 마리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마리가 왜?”

“소민 언니는 공부하느라 바빠. 태양 오빠는 운동하느라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안 해. 아인이는 친구들이랑 논다고 집에 늦게 와.”

“마리를 네가 맡고 있어?”

“당연, 악!”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나라는 태양이에게 꿀밤을 얻어맞고 머리를 붙잡는다.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형, 나랑 누나가 신경 많이 쓰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라 저거는 자기 인형 한두 개 넣어 두고는 생색 부리는 거야.”

“이 씨!”

“씨? 오빠한테 씨?”

“흥.”

그러고 방으로 들어가는 주나라.

“주나라!”

태양이가 눈을 부라리며 따라가려 하기에 내가 붙잡았다.

“인형을 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너도 알잖아.”

나라는 천재다. 내 딸이 혹시 천재? 같은 망상 천재가 아니라. 기억력과 관련된 뇌의 발달이 매우 특출나다.

어느 정도냐 하면 ‘밝은 빛을 향해 머리를 돌렸더니 세상에 나왔고, 너무 추웠다.’라고 할 정도.

일반인에게 이러한 능력은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겠으나 탄생 자체가 부정적인 아이에겐 이야기가 다르다.

나라는 불륜의 결과였다.

남자 쪽 집안이 부자였고 여자는 이를 알고 접근. 임신 후 입을 닫는 대가로 거액을 요구했고 만삭이 되는 순간까지 버티며 강짜를 놓은 결과 어마어마한 금액을 뜯어냈다.

목적을 달성한 여자는 아이를 지우려 했으나 그럴 수 없는 단계였기에 어쩔 수 없이 출산. 태어남과 동시에 나라는 버림받았다.

나라는 병원 관계자들의 호의 속에서 자랐고 간호사들을 엄마, 장기 입원 환자들을 삼촌 이모라 불렀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며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나라는 스스로 보육원에 가겠다고 자처했다.

그때 나라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다.

“모르는데요? 그냥 저 나이대 여자애들은 다 좋아하지 않나?”

소민 누나가 말 안 해줬나 보다. 하긴, 태양이도 아직 어리니.

유치원. 보육원에서 왔다는 걸 철저히 숨겼음에도 부모가 없는 아이는 어떻게든 티가 나기 마련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 자신감 없고 공격적인 말투.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행동.

학부모들 사이에서 격리 교육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매일 나왔으니 유치원 선생들도 스트레스를 꽤 받았을 것이다.

나라가 저렇게 인형에 집착하는 이유는 별거 아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 나라가 높은 곳에 꽂힌 책을 뽑다 실수해 떨어트렸고 옆의 아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이 맞아 망가졌다. 아이의 학부모는 이때다 싶어 나라에게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부모가 버린 이유가 있다니까.’

‘야, 이거 어떻게 갚을래? 뭐? 얼마인 줄은 알아? 한정판이라고 한정판!’

‘이래서 가정교육이 필요하다니까. 어른 모셔 와!’

원장은 이런 일에 절대 나서지 않기에 그때 간 사람은 당연히 소민 누나였다.

당시 유치원 선생과 학부모, 소민 누나가 이야기를 나눴으나 나는 거기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그다음 날부터 소민 누나가 원장 몰래 새벽에 우유배달을 했고 몇 달 뒤 그만뒀다는 것만 안다.

탁.

식탁에 냄비를 내려놓는 소민 누나가 부엌 밖으로 몸을 빼선 높지 않은 목소리로 애들을 부른다.

“야식 먹을 사람, 내려와.”

빼꼼 고개를 내민 나라가 소민 누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형을 안은 채 도도도 걸어와 식탁에 앉는다.

‘저것도 닮았네.’

하나같이 소민 누나를 닮은 인형들. 뭐, 가끔 아이돌 인형도 있다만. 몇 개 안 되니 예외로 치자.

아무튼 나라에게 있어 인형은 소민이라는 버팀목을 만나게 해준 연결 고리다. 그걸 마리에게 줬다는 건, 나라 나름의 지켜주겠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가끔 뒤뜰에 망가진 인형이 파묻힌 채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건 태양이나 늙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만혁아, 수혜 은사님께 감사 영상 하나 올려.”

“누구?”

“수혜. 두 달 동안 매일 생닭 보내준 고마운 분들이야.”

“난 걔 싫어. 형, 운 좋은 줄 알아. 만약 일찍 왔잖아? 그럼 형 입에 생닭 들어가 있을걸? 하, 우리 정말 힘들었어. 소민 누나 요리 실력이 갑자기 퇴보해선—”

“김태양.”

야밤에 나지막이 울리는 소민 누나의 음성에 태양이가 목을 움츠린다. 듣자 하니 내가 도착하기로 한 날부터 계속 닭요리를 했단다.

수혜라는 생닭 파는 브랜드가 있는데 거기서 하나 보육원TV에 PPL을 넣는 바람에 계속 보육원으로 닭이 왔고. 맛없는 걸 맛있게 먹는 영상을 찍느라 곤욕이었다며 내게 하소연하는 김태양.

“…그래도 지금은 먹을 만해.”

“맛있네.”

“그렇지?”

마리가 앵글에 걸리지 않게 주의하며 넷이 먹방을 찍었고 리쳇을 통해 적당히 편집한 뒤 하나 보육원TV를 도와주는 스튜디오에 보냈다.

태양이는 물려서 그런지 닭에 손도 안 대고 자러 갔고 소민 누나는 아침 강좌를 들어야 한다며 아카데미 가기 전에 깨워 달라하곤 방으로 올라갔다.

“오빠.”

음소거에 가깝게 소리를 낮춘 TV를 보는 내 옆에 와 앉는 나라. 녀석이 먼저 살갑게 굴 때는 항상 내게 바라는 게 있었기에 나는 기계적으로 답했다.

“뭐 사줄까?”

“…아니. 이거.”

품에 안고 있던 인형을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각, 또각.

일어나서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 움직임이 몹시 자연스러운 게, 마치 자아를 가진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

각성이다.

“언제부터냐.”

“일주일 전. 다락방.”

턱을 당기고 슬쩍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나라. 답지 않게 눈치를 보기에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됐네. 다른 사람한테 보여줬어?”

도리도리.

마음에 상처를 가진 아이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어떤 것을 계기로 또 미움받을지 모르니까. 설령 그게 각성이라 해도.

“숨기게?”

“도움이 되면,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잘 안돼서.”

“오빠가 도와줄까?”

“응.”

결과부터 말하자면, 조작계와 빙의계, 소환계가 섞인 묘한 특성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성자의 특성이 복잡다양해지고 있다는 통계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뒤섞인 능력은 처음 본다.

발동방식은 이렇다. 소민 누나를 닮은 인형을 의식하고 집중하면 거기에 무언가가 깃든다. 대부분 무작위 속성의 정령이고 가끔 유령도 빙의된다.

무엇이 깃드냐에 따라 인형의 행동이 천차만별이었다. 입에서 냉기를 쏘거나 눈에서 빔을 발사하기도 하고 날아다니며 괴기한 웃음을 흘리는 놈도 있었다.

“11종류?”

“하나 더 있는 느낌인데, 아직 인형에 들어온 적은 없어.”

각성자 당사자가 자기 특성과 관련되어 무언가를 느꼈다면, 어지간하면 그 감이 맞다.

해가 뜨기 전까지 마지막 한 종류를 깃들게 하려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봤으나 소용없었다.

좀 더 봐주고 싶었으나 곧 개학식 시간이었기에 주말에 다시 오기로 하고 방으로 데려다주는 와중.

-될 거 같은데.

‘뭐가.’

-저 인형에 들여보낼 수 있을 거 같아.

“뭔 개 소리야.”

“개?”

“아니, 너한테 한 말이 아니고 리쳇이. …잠깐만.”

-보스, 인형에 집중하라고 해.

리쳇의 반응을 전하자 눈을 빛내며 계단을 오르다 말고 인형에 정신을 집중하는 나라.

한참이나 그대로이기에 안되나 싶었는데, 돌연 머리가 360도 돌아가며 움직인다.

그러다 허리를 더듬더니 액세서리로 달린 검을 빼 들곤 허공을 찔러댄다. 얼핏 봐도 보통 솜씨가 아니기에 언제 이런걸 배웠냐고 리쳇에게 묻자.

-내가 아니라 백무군.

“걔가 저기에 들어갔다고?”

그렇다며 언데드 클럽 컨테이너 내부 상황을 망막에 전송하는 리쳇. 거기엔 안광을 꺼트린 백무군이 정좌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 꼬마가 집중할 때 유독 크게 튀는 파장이 있길래 잡아다 백무군에 연결시켰지.

그런 파장을 알아채는 것도 신기하지만, 언데드에게 붙일 생각을 하는 게 더 놀랍다.

‘리쳇, 저거 무력 수준은 어때.’

-백무군은 강해. 저 상태여도 어지간한 히어로는 상대할 수 있을 걸?

“음. 하지만 나라는 아직 어린데 그런 상황이 되면 차라리 내가 날아오는 편이.”

“나, 안 어려. 언니는 지금 나이에 나를 구했어. 나도 할 수 있어.”

“정말?”

“우리 집은 내가 지킬게. 대신, 이것들 사줘.”

엄청나게 비싼 인형들을 요구하는 주나라.

이 녀석.

처음부터 이 말을 하기 위한 빌드업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도저히 거절한 명분이 없는 ‘사줘’였다.

“…나라야, 너는 나중에 정치해도 성공하겠다.”

“알아.”

뻔뻔한 것까지. 완벽하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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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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