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모의 빌런 격파전 (1)
여름이 머리칼을 바삭이게 하였다면, 가을은 발아래의 모든 것을 바삭이게 한다.
어느 작가가 읊은 짧은 시가 지금 떠오른 이유는 서히아 동상문으로 향하는 숲길에 죽은 낙엽들이 맹렬히 휘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프트. 걸어 다니세요.”
“죄송합니다.”
F반 담임이자 교수진 막내인 데커드가 동상문 앞에서 학생들의 마중을 나왔다.
애들이 오기 전에 교수가 뭐 이런 거까지 하냐고 물었더니. 이게 엄마 직장에 아들이 취직하면 겪는 부당함이라며 장난스럽게 한탄하더라.
아무튼 스위프트가 돌풍을 꼬리에 달고 날아오는 바람에 숲길이 난리다.
“야, 낙엽 저거 우리 애들이 치울 텐데. 너 안 미안하냐?”
스위프트는 데커드 옆에 서서 같이 학생들을 살피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다.
“내가 치우지.”
번퓨즈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지, 라고 말을 덧붙인 녀석이 손짓하자 난장판이었던 낙엽들이 한곳으로 모여 쌓인다.
나는 다른 애들이 장난삼아 걷어차기 전에 재빨리 일식이를 시켜 삽으로 낙엽을 퍼 자루에 담게 했다.
“너는 왜…, 그렇군. 이해했다.”
말을 하다 말고 일식이를 주시하다 고개를 끄덕이곤 강당으로 가버리는 스위프트. 아마 내가 왜 데커드와 함께 있는지 물어보려던 거겠지. 그걸 제멋대로 해석한 걸 테고.
뭐, 대단한 이유는 아니다. 그블린전에서 활약할 인재들이 아무 탈 없이 잘 돌아왔는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 그렇게 미래의 병사들을 흐뭇하게 보던 중. 저 멀리 레게머리를 한 소년이 껄렁한 걸음걸이로 다가온다.
입술과 코에 피어싱을 하고 선글라스를 낀 녀석. 아무리 이곳이 복장 규제가 없는 아카데미라지만 선은 있다.
특히 특성 발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신체 훼손의 경우 퇴학을 당할 수도 있는 중대 사항.
어지간하면 어르고 달래서 가르치겠으나 저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놈은 빨리 걸러져 나가는 게 낫다. 시선도 주지 않고 지나가길 기다리는 그때.
“남교, 수. 잘 지냈, 어?”
묘하게 어미를 반 박자 늦게 말하는 놈이 아는 척을 하기에 고개를 기울이며 쳐다보자.
“…곽재우?”
“반가, 워. 브라더.”
이목구비를 따로 뜯어보자 확실히 곽재우다. 피어싱도 살을 관통하는 게 아니라 물려놓는 입찌 종류였다.
“너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편, 견은 재미없, 어. 브라더. 사람은 언제나 달라지, 는 거야.”
묘한 운율을 실어 말한 곽재우는 레트로 힙합식 인사라며 내 어깨에 자기 어깨를 부딪치곤 안으로 들어간다.
“너도 이만 가라. 도와줘서 고맙다.”
“예에.”
“친구가 달라져서 충격이 큰가 본데. 가끔 저런 애들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강당에 들어서자 반별로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모범생인 퀸이 가장 앞자리에, 그리고 그 옆엔 트레이시 그웬이 앉아 있었다.
둘이 재잘재잘 떠들다 마가렛이 끼어들고 칠링 남매까지 합세해 금방 떠들썩하게 변한다.
“정숙.”
어째서인지 기가 죽은 기색인 게타 교수가 교단 뒤에 섰다. 친구들끼리 뭉쳐서 잡담을 나누던 녀석들이 우르르 흩어져 제자리에 앉는다.
그러다 트레이시가 나를 발견하곤 씩 웃더니 찡긋, 윙크를 날린다. 나는 슥 시선을 피했고 그 와중에 퀸과 눈이 맞았다. 녀석은 나와 트레이시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교감 선생님의 훈화가 있겠으니 다들 조용하도록.”
데커드에게 들었는데 교장은 휴가다. 그간 너무 바쁘게 움직여서 안식년을 가지기로 했다고.
근래 들은 소식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그 노인네는 혼자 방구석에 박혀 있는 게 모두에게 이롭다.
“백일홍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여러분도 아름다운 히어로로 기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수학하세요.”
끝이었다.
도입부에서 긴 훈화를 예상했던 학생들은 기쁜 반전에 환호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교감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쿨하게 한 손을 드는 것으로 아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존나 멋있어. 저러니까 교내 최강 권력자지.
-로맨, 백일홍은 멕시코가 원산지인 거 알지?
안다.
‘몰라. 알아도 모른 척할 거다.’
-후후, 누가 누구보고 뻔뻔하다는 건지.
이내 공지용 홀로 보드에 각반으로 이동하라는 메시지가 떴고 우리는 반년 전과 같이 F반으로 향했다.
데커드는 이미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2학기입니다. 여러분은 곧 수강 신청을 하게 될 테죠.”
그러고는 정면의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홀로 보드 중앙에 손바닥을 대는 데커드.
“하지만 그 전에 히어로 협회에서 지정한 필수 교육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정의관 확립]
[특성 체육]
1학기 때 반드시 들어야 했던 두 강의가 홀로 보드에 크게 떠오른다. 첫날부터 종강까지의 교육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렬되었고 데커드는 하나하나 읊으며 강의 내용을 재차 학생들의 뇌리에 새겨 넣었다.
“우리 F반은 여러분의 성실함 덕에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습니다. 이는 오전 강의가 비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이해를 못 해 잠시 멍 때리던 아이들이 곧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곤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요?”
“어메이징!”
“강의를 더 들을 수 있다는 거네?”
“조용. 다른 반은 적게는 둘, 많게는 다섯까지 낙오했기에 강의를 새로 만들기가 애매해졌습니다. 그래서 회의 결과, 우리 반은 A반과 같은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선택과목은 아닌가 보네요?”
트레이시 그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데커드.
“예, 강의 숫자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교감 선생님의 결단이 있으셨죠. 그리고 장담하건대, 오전 강의에서 여러분이 고득점을 얻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경쟁이거든요.”
술렁이던 반이 쉽지 않을 거라는 한 마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17살. 육체는 급속도로 성장하나 내면은 아직 아이인 나이.
또 호승심을 자극하는, 저 의도된 멘트에 격정적으로 반응할만한 연령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도수정과 버추얼박스가 A반을 꺾겠다며 호기롭게 나섰다.
“엘리트 히어로로 키워낼 자신이 있고 아카데미가 총력을 다해 서포트하는 A반. 히어로로서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어 창설된 어중이떠중이 F반. 차이는 명백합니다.”
왜 우리 애들 기를 죽여! 라고 나서기에는 데커드의 시선이 학생 못지않게 뜨거웠다.
응? 나를 왜 봐.
아이들의 시선도 데커드를 따라 내게 닿는다.
“한 명이 잘해준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죠. 남만혁 학생.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들어 보고요.”
날 선 내 말투에 큭 웃은 데커드가 홀로 보드 귀퉁이를 눌러 화면을 전환한다.
“남산?”
수십 년간 내 사유지로 인정되는 산이 드론의 시점으로 찍힌 사진 몇 장이 화면에 떠오른다.
그리고 보니 멕시코에서 한창 일을 벌일 때, 아카데미 내 나의 사유지 일부를 이용하는 대가로 원하는 시설을 지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마운틴 짐과 컨테이너 구역을 제외한 구역을 제공하는 대가로 대규모 요새를 요구했더니 기각당하고 대신 외부로 통하는 지하도와 주차장을 만들어주겠다기에 바로 콜 때렸다.
정문의 경비 용병과 내통하는 건 한계가 있는 데다 또 비밀통로는 요새의 필수요소 아니겠나. 게다가 남의 돈으로 만들 기회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오전 강의, 모의 빌런 격파전이 벌어질 필드입니다. 빌런은 상대 반에서 선출되죠. 저는 만혁 학생을 빌런으로 내보낼 생각입니다.”
“좋네요!”
내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일에 어이가 없어 무어라 하려는 때 반장, 도수정이 손을 번쩍 든다.
“A반에서는 누가 오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석이나 차석은 아닙니다.”
1학기 수석은 스위프트 차석은 마가렛이다.
“그래서 누군가요?”
“그레이스 멜론.”
아이들이 웅성거린다.
“걔 조용하던데.”
“얌전한 스타일 같더라고.”
“딱히 도발 같은 거만 안 하면 적당히 할걸?”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건 쉽지 않았다.
얌전? 조용? 하!
지금 멕시코에선 ‘디스트럭터’라 불리는 미스터리한 히어로가 있다. 나타날 때마다 크레이터가 생겨서 붙여진 별명.
그건 퀸이다. 내가 잔챙이라 신경 쓰지 못한 소규모 갱단 몇 개를 정리했더라. 당시 디스트럭터가 맨몸으로 총알을 받아낸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어 리쳇을 통해 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녀석의 궁극기인 다이브는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강해진다. 동시에 몸에 가해지는 충격도 증가하고. 이를 버티게 도와주는 것이 내구.
즉. 내구의 숙련도 상승은 파괴력과 직결된다.
고작 17세의 나이에 유니버스 다이브를 성공시켰다. 물론, 전성기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학생 수준에서 나올만한 위력은 결코 아니다.
그걸 애들이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부정적으로 본다.
손을 들었다.
“남만혁 학생, 질문인가요?”
“빌런 역할인 학생의 점수는 어떤 방식으로 매겨집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빌런은 빌런. 얼마나 많은 히어로를 쓰러트렸냐와 거점을 점령했느냐로 포인트를 얻습니다. 반대로 히어로 역할인 학생들은 거점을 사수하거나 빌런을 막는 것으로 점수가 매겨지죠.”
“빌런이 불리하지 않나요? 아무리 개인 역량이 뛰어나다고 해도 다수를 상대하긴 어려울 텐데요. 특히 F반의 빌런이 A반의 엘리트를요.”
트레이시가 나를 힐끔 돌아보곤 데커드에게 반쯤 따지듯 묻는다.
“그것 역시 고려해서 채점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남만혁 학생이라면 그리 쉽게 당해줄 것 같지는 않군요.”
“그야, 그렇죠.”
“확실히 남 교수라면….”
“특성 체육 때 하던 것의 반만 해도 괜찮을걸. 우리는 그레이스 멜론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자.”
“네 말이맞, 아. 클린에, 어.”
“재우, 근데 너 말투가 왜 그래. 혹시 전염성 저주 같은 거면 미리 말해라.”
평소 그와 친하게 지내던 버추얼박스가 그의 어깨를 치며 농담을 던지자 곽재우가 정색하며 답한다.
“나는 멀쩡, 해.”
곽재우의 싸늘한 반응에 다시 돌아앉는 버추얼박스.
“그, 그래.”
“자! 곧 모의 빌런 격파 강의가 시작되니 보내준 좌표로 이동하세요.”
각자의 방식대로 목표지점까지만 도착하면 된다기에 나는 여느 때처럼, 다른 세상의 초원을 내달렸던 해골 말. 사식이를 불러 느긋하게 산을 올랐다.
부러워하는 아이들의 눈을 음미하며 거리를 벌리던 중, A반 옆을 지나게 됐다.
사식이에게 적당히 쟤들이랑 걸음을 맞추라는 지시를 한 뒤, 프로스트 교수에게 인사를 건네고 퀸에게 다가갔다.
“야, 살살해.”
“그쪽이야말로 제 친구들 괴롭히지 마세요.”
나는 팔뚝을 걷어 올리고 흐물거리는 알통을 보이며 답했다.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최근 한국어 하나를 배웠어요. 남만혁 씨에게 잘 어울리는 뜻이더군요.”
“뭔데.”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모두 당신과 연관되는 말이었어요.”
“그러니까, 뭔데.”
“요설.”
쓸데없이 말이 많은 사람이나 말을 잘하는 혀를 가리키는 단어.
어쩐지 의심이 담긴 듯한 퀸의 눈빛에 나는 순수하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구현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해야. 나는 쓸모없는 말은 안 해.”
“지금도 봐.”
퀸 옆으로 마가렛과 케롤라인 칠링이 다가와 내게서 떨어트린다. 쉭쉭 거리며 손을 터는 게, 마치 파리를 쫓는 듯하기에 낄낄 웃으며 거리를 벌렸다.
“내가 언제 요설을 했는진 모르겠는데, 하나 확실한 건. 너희는 나 이상의 괴물들이야. 이길 자신도 잡히지 않을 확신도 없어.”
“지금 포기하지 그래.”
안토니오 골드우드가 뾰족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러려고. 강의가 시작되면 바로 항복할게.”
그러곤 사식이에게 지시를 내려 최고 속도로 달리게 했다. 뒤에서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고 나아갔다.
얼마 후. 모의전 시작 휘슬이 울렸고, 나는 공언한 대로 A반 히어로 진영에 스스로 출두했다.
“약속한 대로 항복하러 왔다.”
“…진심이냐.”
의심 어린 눈들.
“난 언제나 진심이란다. 애송이들아.”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