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모의 빌런 격파전 (2)
“항복? 진심인가?”
프로스트 교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진중하게 묻기에 나는 대답 대신 엄지로 등 뒤를 가리켰다.
쾅!
언덕 위에 자리한 가설 거점 하나가 폭발한다. 폭광을 눈에 담는 교수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빌런은 체포했는데, 폭탄이 남은 상황. 폭탄의 위치와 터지는 시간은 저만 알고 있죠.”
사회적으로 빌런에게도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해줘야 한다는 분위기고, 애초에 고등학생에게 고문을 가르칠 것 같진 않기에 둔 수.
단순 육박전이 취약한 나로선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차단하는 게 베스트다.
학생들이 프로스트 교수를 보며 결정을 내려주길 바랄 때, 두 사람만큼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가렛과 스위프트.
둘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나를 앞뒤로 막아선다. 양쪽에 나무가 있으니 도주는 어려운 상황.
얘들은 내가 도망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나는 낙엽이 자박하게 깔린 바닥에 아예 드러누웠다.
“교수님!”
“그만. F반 측 빌런의 의사를 확인한 순간, 상황 시작이다. 지금부터 누구 하나 중상을 입기 전에 내가 나설 일은 없을 테니 너희끼리 해결하거라. 이건 그런 강의다.”
부수고 도망치고 추적하고 포획하는. 빌런과 히어로 간에 흔히 벌어지는 상황에 대처하기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런 매뉴얼은 셀 수 없이 많거든.
그러나 지금과 같이 비상식적인 사건은 그렇지 않다.
어린 히어로가 가장 많이 죽는 것은 첫 실전. 그다음은 예상치 못한 사건에 개입하거나 휘말려서다.
저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감정에만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미래에 본인이 구해야 할 수많은 인명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고로, 나는 이들에게 딜레마를 하나 던지고자 한다.
“거점에는 삼림관리원이 갇혀 있다.”
긴가민가하며 내 말을 의심하는 분위기.
“농담 같냐?”
“음, 남만혁은 없는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 적어도 그런 상황을 연출하려는 거겠지.”
스위프트의 동조에 아이들이 술렁인다.
“고작 점수 때문에 사람을 납치해?”
와중에 안토니오 골드우드는 내가 짠 상황극에 과하게 몰입한 듯하다.
“인질은 어딨어?”
방학 사이 더 커진 듯한 마가렛이 내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묻는다.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만약 마가렛의 입장이었다면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을 언급하며 협박했을 것이다.
“…….”
하지만 이 순한 것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심문하길 주저한다.
나는 이쯤에서 저들에게 간절함을 심어주기로 하고, 홀로 보드를 품에서 꺼내 마가렛에게 넘겼다.
-아, 아악?
-그만 해요. 히히.
번과 퓨즈가 밧줄에 묶인 채 어색한 연기를 한다. 나름 연기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차마 못 봐줄 정도였으나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에 이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충분히 심각한 상황으로 보였는지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미친 새끼. 빌런이냐. 너는.”
자칼이라는 가죽 재킷을 걸친 소년이 독기 충만한 눈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래 나는 이런 걸 바랐다.
“몰랐어?”
자칼이 내 멱살을 붙잡으려는 찰나.
쾅!
또 하나의 거점이 폭발했다. 이걸로 남은 거점은 셋.
“다음번에는 삼림관리원이 있는 거점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나랑 눈싸움만 하고 있을 건가?”
“제기랄, 네로! 나랑 인질들 찾으러 가자.”
“알았어.”
동물계 특성을 지닌 둘이 각각 자칼과 흑표범으로 변해 달려 나가다 스위프트에 의해 막힌다.
“기다려. 이대로 가면 너희도 위험하다. 지금 저 말이 함정일 가능성도 있고.”
크릉….
성격 급하기로 유명한 둘을 멈춰 세운 건 훌륭하다만 이 뒤는 어떨는지.
“7분이다.”
대뜸 시간을 말하는 안토니오.
“음?”
“첫 번째 폭발과 두 번째 폭발 사이의 시간. 정확히 7분이다.”
정답.
그런 설정이다. 폭탄은 7분 간격으로 터지게 해놨다. 뭐, 사실 번이 사식이를 타고 다니며 터트리는 거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21분 밖에 없다는 거군.”
“그냥 때려서 실토하게 하자.”
도슨 칠링의 말에 동물계 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때리게? 그럼 나도 어쩔 수 없는데.”
폭력에 대한 거부감과 세간의 인식. 그리고 교수가 지켜보고 있다는 압박이 그들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지만, 언제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춘기 아니겠는가.
하여, 나도 내 한 몸 지킬 수단을 강구해왔다.
“전개.”
내 몸을 감쌀 정도로만 영역을 생성했고 이를 알아본 골드우드가 눈을 부릅뜨며 달려들었다.
“이 자식. 언제 그렇게 영역을 압축 할 수 있게 된 거냐!”
영역이 뭐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대답한 골드우드는 마법봉을 꺼내 내게 각종 비폭력적인 소환 마법을 사용한다.
“하늘거리는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는 유혹의 민들레! 오크목 나무 사이의 용감한 병정개미의 톱니! 구름과 구름을 거니는 세 줄기 벼락이여!”
응? 마지막 주문은 번개—
콰르릉!
잠깐 방심한 사이 내 영역을 파고든 노란 줄기에 의해 감전당하기 직전, 혹시 몰라 작게 구현해둔 포이즌을 의식했고, 직후 영역이 초록빛을 띠었다.
다시 투명한 색으로 돌아왔을 때는 번개 줄기를 비롯한 안토니오의 마법들이 힘을 잃은 뒤였다.
“크윽!”
분해하며 마법봉을 움켜쥐는 안토니오 골드우드.
“방금 그건….”
“위험했군.”
전개함과 동시에 내게서 멀어진 두 사람은 침음을 삼키며 다시 접근한다.
쉼 없이 떠들던 아이들도 상황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는지 입을 닫는다.
“목적이 뭐지? 빌런.”
스위프트의 물음에 나는 활짝 웃었다. 이걸 이제야 묻네.
“그 삼림관리원 부부는 내 아버지를 죽였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폭탄의 위치만 알려다오. 그리고 원한다면 그 삼림관리원을 네 앞에 데려다 놓을 테니 두들겨 패도 좋다.”
스위프트. 입학하기 전에 실전 경험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회유가 어색하지 않다.
“법의 심판 따위를 바랬으면 이런 짓은 하지도 않았어. 내가 원하는 거? 놈들의 죽음을 전시하는 거다. 그들의 가족이! 살인범의 가족이라 경멸당하고 무시당하고 쓰레기처럼 되길 바란다고!”
감정을 담아 호소하자 아이들이 실시간으로 질리는 게 보였다. 실제, 야수화했던 둘의 변신이 풀리기까지 한다.
“내가 당했던 것처럼!”
그러고는 나는 상의를 벗었다. 보육원 원장이 몸에 남겼던 온갖 흉터들에 녀석들의 시선이 고정된다.
외면, 두려움, 동정. 여러 감정이 그들의 눈에 담기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고뇌해라, 그리고 결정해라. 지금 확실하게 우선순위를 정해둬야, 빌런에게 끌려다니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스위프트였다.
“살인범이 될 각오를 했다니 더 할 말이 없군. 자칼, 네로. 가지. 남은 3분 안에 인질을 찾는다.”
크릉!
그르르!
셋이 떠나자 마가렛과 칠링 남매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남은 건 프로스트 교수와 삐진 골드우드. 그리고.
“야~ 겨우 강의 하나에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지금껏 존재감을 지우고 있다가 허공에서 스르륵 나타나는 검은 머리칼의 소녀.
이름, 플라주. 국적, 브라질. 밝혀진 특성은 동화. 입학 당시 까다로운 클래스 심사에서 심사관들의 만장일치로 A반에 낙점된 인물.
“눈에는 눈. 피에는 피. 나는 받은 대로 갚을 뿐이다.”
“그래? 그게 네 신념인가 보네. 나도 내 신념이 있는데. 범죄자 새끼들은 무조건 조진다. 어때? 너랑 비슷하지?”
그러고는 어디서 구했는지 자루가 긴 낫을 들고 나를 위협한다. 이를 지켜보던 프로스트가 나서려는 듯했으나 날이 뭉툭한 걸 눈치채곤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댄다.
내가 진짜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는 것처럼 긴장한 기색을 하자 플라주는 씩 웃으며. 말할 생각이 없구나, 라며 내 목을 뭉툭한 날로 그었다.
“방금 죽였어.”
“왜지?”
“범죄자랑은 협상 안 해.”
“내가 죽으면 인질들의 폭탄이 바로 터질 텐데도?”
“그전에 구할 거야.”
“어떻게?”
삼림관리원은 3번 거점에 둘을 대신할 마네킹을 뒀다. 인질을 잃었을 때의 좌절도 간접적으로 경험하길 바랐는데. 아쉽게도.
“우리 애들, 생각보다 유능하거든.”
마네킹을 하나씩 등에 업고 달려오는 자칼과 네로. 이윽고 하늘에서 스위프트가 내려왔다.
그리곤 내게 퓨즈가 그린 엉성한 폭탄 그림 세 장을 보인다.
“해제까지 해야 하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 너라면 하늘에서 폭파시키면 될 테고. 그런데…, 나는 두 명만 납치했다고 한 적 없는데?”
거점 두 개를 잃었지만, 인질을 구하고 다친 사람도 없어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어붙는다. 특히 나를 죽인 플라주는 사색이 됐다.
“너….”
“농담이다.”
“휴, 쟤는 씨. 사람 간담 서늘하게 하는 데는 진짜 도가 텄네.”
“엥? 오빠는 익숙하지 않아? 매일 아침 거울 볼 거 아냐.”
“야!”
칠링 남매가 투덕거리자 다시 활기를 띠는 아이들. 나도 첫날부터 구질구질하게 굴 생각은 없었기에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잘했네. 이대로만 하면 A는 어렵지 않겠어.”
프로스트 교수의 칭찬.
“매번 이렇게는 못 하겠지만, 노력하겠습니다.”
“그거면 됐네.”
이후 다수의 드론이 가설 거점과 필드를 수복한 후, A반 빌런 퀸과 내가 없는 F반이 맞붙었다.
* * *
“또 온다!”
하늘에서 사선으로 낙하하는 금빛 선. 지구의 중력을 이용한 그 폭력적인 수단에 남만혁의 사유지인 남산은 지형이 변하고 있었다.
“도수저어엉!”
“이, 이익!”
현시점의 그레이스 멜론은 F반이 가하는 모든 공격을 내구로만 때울 수도 있는 괴물이다.
그나마 대응할 수 있는 건, 트레이시가 공격 지점을 특정하고 도수정의 단절로 그녀가 가져온 충격을 무효화하는 정도.
“얘들아, 나 한계야.”
코피를 흘리는 도수정의 모습에 트레이시는 혀를 차고는 그녀를 평평한 곳에 눕혔다.
“교수님 수정이 리타이어요.”
“아냐, 좀 쉬면 괜찮아져.”
“미안한데 수정아, 나는 너를 데리고 저걸 피할 자신이 없어.”
리얼블루는 하늘색에 숨었고 블리딩블러드는 자기 피를 나무에 뿌려 거기에 들어갔다.
저들 딴에는 거점으로 가서 방호시설을 가동하겠다고 하는데, 트레이시가 보기엔 어림도 없다.
유니버스 다이브 한 방이면 거점은 증발한다.
트레이시 그웬은 그녀가 갱단의 철옹성 같은 아지트를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걸 목도했기에 거점을 지킨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돌보죠.”
버추얼박스와 칸탄테, 클린에어는 시작과 동시에 시야 밖에서 날아온 그레이스 멜론의 습격에 의해 탈락.
소구경과 마인 트래퍼가 나름의 반격을 시도했으나 그레이스 멜론의 내구 앞에서 그들의 공격은 무용지물이었고, 결과. 제대로 된 타격 한 번 성공시키지 못한 채 탈락.
해서 현재 남아 있는 생존자는 리얼블루, 블리딩블러드, 트레이시 그웬.
“조상님, 은 꼰대, 야. 예에.”
그리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기괴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곽재우까지 총 넷.
그레이스 멜론은 유독 멀리 떨어져 있는 곽재우의 후방에서 가속과 부유로 접근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앗!”
숲속의 사각을 철저히 이용해 접근한 공격을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피한 곽재우.
“뻔한 움직, 임. 재미 없, 어. 혹시 그게 전력이, 면 실망이야. 남 교수가 그렇게 가르치, 던?”
다시 부유로 상승하던 그레이스 멜론의 몸이 멎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지상에 있는 곽재우를 쳐다본다.
그 모습은 일전, 아카데미 건물 옥상에서 스위프트를 눈에 새겼던 모습과 일치했다.
눈꺼풀이 두세 번 오르내리자 그레이스 멜론은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높이까지 상승해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곽재우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상님. 망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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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