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곽재우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의 의병장으로서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그는 늘 불합리와 맞서왔다.
수적 열세, 부족한 보급, 억울한 오명.
그러한 악조건들 속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언제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골몰했기 때문이다.
“조상님.”
-지금이니라.
곽재우가 등허리에 감추고 있던 월도를 꺼내 운석처럼 내려꽂히는 그레이스 멜론을 향해 겨눈다.
거인과 다윗의 싸움이 이러했을까. 지켜보던 모두가 곽재우의 행동이 오만이라 여겼다. 이윽고 그레이스가 지면에 꽂히자 땅이 크게 출렁이더니 폭발과 함께 일대가 뒤집힌다.
그레이스는 뿌옇게 피어난 흙먼지가 가라앉자 곽재우를 찾아 주변을 살폈는데. 놀랍게도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떻게?”
놀란 그레이스 멜론이 빈틈을 보였고 근처에 숨어 이 순간만을 노리고 있던 리얼블루와 블리딩블러드가 달려들었다.
리얼블루는 그레이스의 뒤에서 나타나 팔로 그녀의 목을 조였고 블리딩블러드는 자기 피로 양 발목을 묶었다.
탄환을 튕겨내는 내구 특성이라도 다이브 이후에는 잠시 취약해지기에 이 둘의 합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대로 손발이 묶여 바닥에 쓰러지는 그레이스.
“빌런 포획 완—”
월도를 든 채 멍하게 서 있던 곽재우가 정신을 차리곤 무전기를 들어 데커드에게 보고하려는 찰나.
투둑, 뚝.
사슬 형태의 피수갑을 순수한 완력으로 끊고 곽재우를 향해 쇄도하는 그레이스. 이에 질겁한 그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자.
-이럴 거 같았, 어. 영감. 그러게, 내게 맡기라니, 까.
-떽! 그 고약한 말버릇 고치래도!
-켁. 트렌드, 를 모르네. 재우 몸 내놔.
-어허, 정식으로 종손의 허락을 받거라.
레게 머리를 한 흑인 유령과 붉은 의복을 걸친 유령이 말싸움을 한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약 10m 내부는 모든 것이 정지한 상황.
-몸 안 바꾸면. 저거 맞는, 다? 나는 상관 없, 어. 아픈 건 너야.
둘의 대화를 관망하던 곽재우는 홍의장군에게 허리를 푹 숙이고는.
“조상님, 죄송합니다. 에이지, 도와줘!”
-에잉. 쯔쯔.
-올라, 잇. 돈 워리 브라더. 형이 다 해결해 줄, 게.
찰칵.
정지된 공간 속에서 홀로 움직인 곽재우가 그레이스 멜론의 주먹 궤도를 저 자신의 뺨으로 돌린다. 그리고 옆으로 한발 피해서. 눈꺼풀을 내리자.
퍽!
“윽?”
자기 얼굴을 때린 충격에 의해 옆으로 굴러가는 그레이스 멜론.
“이 감각…. 처음에도 이렇게 피했군요?”
“데츠롸, 잇. 그런데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걸?”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으며 일어선 그레이스 멜론은 내구를 최대한 의식한 채 전과 같이 쏘아져 나갔고.
“소용없다니, 까?”
또다시 주먹의 위치가 수정 당해 얼굴을 맞았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고 그것이 서른 번이 넘었을 땐. 늘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던 곽재우가 처음으로 항복을 권유했다.
“너 여기서 더 맞으, 면. 위험해 그러니, 까.”
“그만하라고요? 그럴 일은 없어요. 차라리 저를 기절시키는 게 빠를 겁니다.”
무작정 달려든 게 아니다. 그레이스는 규칙을 찾는 중이었고 실제로 몇 개 발견했다.
“그럼 나도 할 말은 없, 지.”
“이유는 모르지만, 당신은 직접 저를 공격할 수는 없어요.”
“오?”
“그 ‘멈추는 공간’도 점점 좁아지고 있고요.”
“관찰력이 좋, 네. 그래서?”
그레이스 멜론은 대답 대신 재차 멈춘 공간에 몸을 던져 넣었다.
-포기를 모르는 처자구먼.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어.
-조상님의 젊은 시절이면, 임진왜란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 때는, …음?
유령화된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가던 중 지금껏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있기만 하던 그레이스 멜론의 동공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 런.”
당황한 에이지가 물러나기 직전. 그레이스 멜론의 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한다.
바닥에 쓰러지는 곽재우를 팔로 받쳐 누이곤 나머지 둘을 불러내는 그레이스.
“리얼블루, 블리딩블러드. 계속하실 건가요?”
두 사람은 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츠측.
곽재우가 떨어트린 무전기에서 데커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황 종료. 움직이는 데 문제없는 사람은 자력으로 스타팅 포인트에 복귀하세요. 그레이스 학생? 괜찮으면 곽재우 학생을 양호실까지 데려다주시겠습니까?
“네. 교수님.”
* * *
점심시간.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트레이시가 내 옆으로 붙어 손을 내민다.
“왜.”
“고급 식권. 지금 줘.”
“아.”
사막에서 네크로 마탑 찾는 거 도와주는 대가로 식권을 주기로 했었다.
나는 즉시 고급 식권 서른 장을 사서 녀석에게 건넸다.
“이게 다야?”
“그러면?”
“줄리아나 존스 모험 세트. 신품에서 중고가 됐잖아. 동생이 실망하던 걸 달래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끙….”
열 장을 더 쥐여주자 트레이시가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게 건넨다.
“자.”
주는 건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바로 받아들고 안을 살피자 거기엔 익숙한 물건이 돌돌 말려 있었다.
“채찍?”
“응, 아버지가 교육상 안 좋다고 버리려던 걸 내가 가져왔지. 너 그거 마음에 들어 했잖아.”
“고맙다. 잘 쓸게.”
채찍의 그립을 잡자 손에 달라붙는 가죽 느낌이 훌륭하다. 사람이 지나가지 않을 때 시험 삼아 허공에 몇 번 휘두르자 주변 애들이 질색하며 거리를 벌린다.
트레이시가 한숨을 쉬며 밥 먹고 하라고 재촉하기에 아쉬움을 담아 채찍을 품 안에 넣었다.
일반 식권을 내고 가장 빨리 되는 고등어 정식을 받아와 자리에 앉으니 트레이시가 각종 진미가 담긴 식판 세 개를 내 앞자리에 내려놓으며 묻는다.
“오후 강의는 골랐어?”
“하나는 정해져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매저드 교수 강의는 무조건 수강할 생각이다. 내게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없지는 않으니 꾸준히 들어두면 언제고 유용하게 쓰일 터다.
“나도 네가 듣는 그, 마법 강의 신청할까?”
“네가?”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고. 그러든지. 다른 하나는 뭐 하게?”
“고민이야. 네 추천은?”
모의 빌런 격파 강의가 끝나자 점심시간이 종료되기 전에 오후 강의를 선택하라는 공지가 내려왔었다.
“잠깐만.”
떠오르는 게 있어 홀로 보드를 열고 강의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암살과 생존의 상관관계? 이거 고스트핸드 교수님 강의 아냐?”
“어.”
“들을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들어. 섬세한 기술은 조금이라도 어릴 때 몸에 숙달시켜놔야 해.”
나이프 질을 하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트레이시.
“너, 그거 알지.”
“뭐.”
“가끔 노인 같이 말하는 거.”
야, 노인까지는 아니다.
“헛소리할 시간에 강의 신청이나 해. 지금 한 자리 남았다.”
“엑, 진짜?”
트레이시는 샐러드를 먹다 황급히 홀로 보드를 조작해 수강 인원을 확인했고 다섯 자리나 비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나는 식당을 나서는 중이었다.
“야!”
“좀 이따 보자.”
물론 나도 강의 신청은 끝냈다. 첫 번째는 당연히 매저드 교수의 ‘37개의 마법 학파에 대하여’.
두 번째는 ‘파이브 파이트 리그’.
아카데미 전용 메타버스에서 진행되는, 대인전과 팀워크 훈련을 위한 강의다.
올해 신설됐고 미래에 서히아 출신 히어로들의 대인전 능력을 급성장시켰다는 평을 받는 유명한 수업이기도 하다.
* * *
드르륵.
“남만혁. 일찍 좀 다녀라. 스승님이 기다리실 뻔했잖나!”
37개의 마법 학파에 대하여 강의실에 도착하자 안토니오가 벌떡 일어나 로브를 펄럭이며 호통친다.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남았다. 무어라 반박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은 애초에 저 매저드가 선물한 게 틀림없는 로브를 자랑하고 싶었던 걸 테니까.
원하는 말을 해주면 좀 조용해지겠지.
“로브 멋있네.”
“흥. 네 옹이 눈깔도 이건 알아보는구나.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모직에 스승님께서 직접 방호 마법을 인챈트 하신—”
한참 말이 이어지기에 고개만 가끔 끄덕이는 것으로 응하며 시간을 보냈다.
강의실 앞쪽 문이 열리고 트레이시 그웬과 매저드 교수가 함께 들어왔다.
“이리 오게나.”
“네, 교수님.”
매저드 옆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트레이시.
“소개함세, 이번 학기 동안 내 가르침을 받기로 한 트레이시 그웬이네.”
“안녕. 잘 부탁해.”
“내가 선배니까 알아둬라.”
안토니오가 별것도 아닌 거로 생색내려 하기에 핀잔을 주려는 때에 트레이시가 나와 골드우드 사이의 책상에 앉는다.
“허허. 트레이시 그웬 학생? 이걸 작성해주게.”
매저드는 설문 조사처럼 항목을 체크해야 하는 종이를 꺼내 트레이시에게 넘기곤.
“기다리는 동안 자네들이 방학 때 무엇을 했는지 이 스승에게 알려주겠나?”
알다시피 나와 안토니오는 이 강의실 안에서 나눈 대화를 바깥에 가지고 나갈 수 없는 계약을 맺고 있다.
매저드는 거기에 트레이시도 추가되었다고 확언하며 눈치를 보는 안토니오를 다독였다.
“저는 집에 다녀왔습니다.”
“오호, 집에?”
“예. 사촌 놈들을 짓밟아주고 왔습니다.”
“가문 내 마법 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게구만. 축하하네.”
“다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함을 꺼내는 안토니오. 상자를 열어 안을 확인하곤 놀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매저드.
“이런 순도의 마나석이면 소환 마탑에서 가져온 게로구먼?”
“준우승 상품이었습니다.”
준우승이면 우승을 놓쳤다는 소린데, 안토니오의 표정은 나쁘지 않다. 저거로 만족하는 걸까.
“자네 마음만 받겠네. 그건 넣어둬.”
“스승님….”
눈물을 글썽이며 스승에게 안기는 골드우드. 그의 등을 쓸어내린 매저드가 내게 눈짓을 준다.
너는 방학 때 뭐 했냐는 물음으로 알아들은 나는 민감한 문제들은 빼고 요약해 읊었다.
“네크로 마탑을 발견하고.”
“이 자식이!”
“뛰어난 마법사와 파트너 계약을 맺어 탑주 자리에 앉혔습니다.”
“거짓말!”
“멕시코에 네크로 마탑산 언데드를 고위험군 업종의 노동직으로 고용시켰습니다.”
“범죄다!”
중간에 끼어드는 안토니오의 말은 일절 무시했다. 저런 거에 일일이 반응하면 끝이 없다.
“멕시코 당국의 반응은 어떻던가.”
“처음에는 제 뜻을 오해하고 결사반대했으나 진심으로 설득하였더니 순수한 뜻을 이해해줬습니다.”
“노동 계층 언데드…. 그 친구가 저승에서 기뻐하겠어. 껄껄. 잘했네.”
매저드의 반응은 담백했다. 딱 안토니오에게 한 만큼만 칭찬하곤 아까부터 자신을 올려다보는 트레이시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그.
“다 했어요.”
“이리 주게.”
종이를 상세히 살핀 매저드는 진열장에서 수정구슬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고대부터 마법사와 친화력이 좋은 속성을 찾을 땐 이런 크리스털 스피어를 썼다네.”
매저드가 가져온 건 단순한 수정구 따위가 아니었다. 저렇게 투명할 정도로 세공된 크리스털이면 부르는 게 값이다. 수정구 겉에 음각된 문양들도 심상치 않고.
“자, 손을 올리게. 자네의 친화력에 따라 색이 바뀔걸세.”
“네, 넵.”
긴장한 기색의 트레이시가 수정구에 손을 대자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다 어느 순간 하나의 색으로 고정되었다.
“…이 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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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