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파이브 파이트 리그 (1)
우리에게 주어진 건, 지도 한 장과 작전 짜라고 준 10분이라는 시간.
다들 말이 없길래 내가 지도를 3차원 홀로그램화 해 앞에 띄웠다.
“첫 강의라 그런지 지형 자체는 단순해. 크게 두 갈래 길이고 중앙의 주택가와 골목을 통해 이동할 수 있겠네. 의견 있는 사람?”
소구경이 모자챙을 만지며 앞으로 나선다.
“알다시피 나는 총을 다루니까, 시야가 확보되는 곳에 배치되었으면 한다. 이쪽 길은 어렵겠어.”
남쪽의 지하터널로 이어지는 길. 상대편까지 직선거리지만, 그건 상대 또한 마찬가지. 불의의 기습을 선호하는 녀석에겐 뻥 뚫린 터널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오케이, 너는 윗길로 가.”
그때 평소 말이 없는 트래퍼가 늘 쓰고 다니는 방독면을 살짝 든다.
“나는 원한다. 변수 많은 곳.”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 어릴 때 사고로 성대를 잃었다던가.
“그러면 주택가는 네가 맡아.”
위아래로 흔들리는 방독면. 다른 두 길과는 달리 상대가 숨어들었을 때 빠른 대처가 어렵다. 하지만 트래퍼라면 적어도 시간을 끌 수 있겠지.
“곽재우, 너는?”
“어떤 곳이든 자신 있, 어.”
“위로 가. 칸탄테, 너도.”
“알았어!”
손가락을 매만지며 긴장하던 칸탄테에게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라고 하자 밝게 웃는다.
내가 없을 때도 종종 그랜마마로 활동하는 녀석이 코스튬만 벗으면 왜 저렇게 소극적으로 구는지 모르겠다.
“잠깐! 그럼 아랫길은 어쩌려고.”
소구경의 의문에 다들 동조하기에 나는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나랑 트래퍼가 막는다.”
어느새 본인이 메고 다니는 가방을 내려놓고 함정을 제작 중이던 트래퍼가 방독면 글래스 너머의 회색 눈알로 나를 올려다본다.
“우리 쪽 통로 입구에 함정 먼저 깔고 주택가로 이동해. 그 정도는 괜찮잖아.”
끄덕.
-1분 전!
“참, 상대는 윗길에 전력을 몰 거다.”
“어?”
“스위프트와 퀸은 공간이 넓어야 전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30초 전!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해!”
잠깐 멍하게 있던 칸탄테가 빽 소리치자 소구경이 챙 넓은 카우보이모자를 푹 눌러썼다.
“재밌군.”
곽재우도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를 길게 늘린다.
“어, 썸!”
-파이트!
신호와 함께 우리는 순식간에 ‘유물 보관소’라는 작은 제단 앞으로 이동됐다.
그 위에는 손바닥 크기의 성배가 놓여 있었고 아래 주의 사항에.
[상대 진영에 뺏기거나 파괴당할 시 패배]
[소지한 채 사망 시 그 자리에 떨어짐]
[완전 은닉 불가]
나는 품을 더듬어 카츄 안으로 손을 넣었으나 안타깝게도 일반적인 주머니로 변해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가상 세계도 이것까진 복제하지 못한 모양.
‘어쩔 수 없지.’
다른 애들이 주변 풍경에 눈이 팔린 사이 나는 유물을 내 품에 넣었다.
“뭐해?”
성배를 숨긴 직후 칸탄테가 이쪽을 돌아보며 묻기에 나는 되려 윽박질렀다.
“저쪽은 이미 날아오고 있을 텐데, 그렇게 여유 부려도 될까?”
“윽. 가면 되잖아.”
거리가 멀어질 때쯤, 칸탄테가 소리쳤다.
“근데 질 거 같으면 어떻게 해!”
“죽어도 돼. 부활하니까. 그리고 밀리면 나와 트래퍼가 도울 테니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칸탄테에게서 걔들 상대로 시간을 어떻게 끄냐는 투정이 통신기로 들렸으나 굳이 답하지 않았다.
“참, 트래퍼. 네 특성이 정확히 뭐였지?”
“시간 필요. 함정 조립. 구덩이, 화살, 발목 절단—”
어지간한 건 다 된다는 소리로 알아들은 나는 손을 내밀어 녀석의 말을 끊었다.
“이런 것도 되냐?”
메모지에 대충 찍찍 그어서 그린 함정을 녀석에게 보여주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이런 함정. 안 걸린다. 개도.”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아무튼 된다는 거지? 빨리 설치하고 가.”
어느새 도착한 아랫길 입구. 터널은 8차선 도로였고 대형 트럭도 충분히 오갈 만큼 넓었다.
“지뢰를 설치할 수도 있다.”
터널 입구 좌우에 나무 장대를 팽팽하게 당겨 고정하던 트래퍼가 불안했는지 안쪽으로 들어가는 내 등에다 대고 말한다.
“그런 건 주택가에 설치해. 빡쎌 거다. 너.”
A팀 구성원은 자칼, 플라주, 케롤라인 칠링, 스위프트, 퀸.
은신 관련 특성을 보유한 플라주가 주택가로 갈 확률이 높다. 녀석은 전투에 익숙해 보였으니 저기가 가장 치열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터널의 1/3지점 정도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 달려오는 한 마리의 개와 그 위에 탄 소녀가 보였다.
“얏호! 엇?”
크릉, 크흥.
잔뜩 신나 양팔을 벌리고 환호하는 수영복 차림의 케롤라인 칠링과 이유는 모르겠으나 홍조를 볼에 매단 자칼이었다.
“왔냐.”
* * *
통로의 절반을 지났음에도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플라주의 예견대로 기동력을 살리면 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는 의견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케롤라인 칠링은 간만에 속도감을 즐길 수 있어 신나 있었고 자칼은 등에 처음으로 여자아이를 태웠다는 사실에 케롤라인과 손자까지 보는 행복한 상상을 하던 중.
“왔냐.”
의자에 앉아 있는 남만혁을 조우하자 방금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기분과 행복한 상상이 단번에 깨어졌다.
터널에 일정 간격으로 박힌 주홍빛 조명이 깜빡인다.
끄극.
등받이가 없는 해변 의자의 다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다. 싫은 소리에 케롤라인 미간을 찌푸리자 자칼이 그녀를 내려놓고 인간으로 변해 앞을 막는다.
“너희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돌아가던가. 그대로 있던가.”
“쿡쿡. 그레이스가 말한 대로네.”
“음?”
“그러더라, 무게 잡으면서 허세 부릴 거라고.”
남만혁의 입가가 비틀린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허리춤에 매어둔 채찍을 풀어 늘어트리며.
“내가 사자 새끼를 가르쳤구만. …뭐해, 드루와.”
케롤라인은 즉시 터널의 절반쯤 되는 높이의 파도를 구현해 남만혁 쪽으로 보냈고 자칼은 날카로운 발톱을 이용해 벽을 타고 달렸다.
휘릭!
채찍을 휘둘러 터널 중앙에 천장을 받치는 기둥을 휘감아 끌어당겨 이동. 기둥 뒤에 숨어 파도를 피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내 천장에서 떨어지는 자칼의 습격은 피할 수 없었다.
“큭.”
앞발질로 어깨를 두들겨 맞은 남만혁이 옆으로 굴러 피해를 최소화한 뒤 냅다 본진 쪽으로 내달렸다.
“남 교수 튄다! 케롤라인 업혀!”
“응!”
자칼이 흥분해서인지 예상 밖의 속력을 내는 것에 당황한 남만혁은 어쩔 수 없이 요즘 가장 한가한 녀석을 불러냈다.
달각?
손에 도끼빗을 들고 한 가닥 있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자세로 등장한 일식이 코앞에 들이닥친 자칼에 의해 산산 조각나 흩어진다. 동시에 흑청색으로 반짝이는 일식의 머리칼.
크릉, 크르릉?
방금 뭐였냐는 자칼의 물음에 케롤라인은 무시하고 달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흘낏. 뒤를 확인한 남만혁은 다시 조립되는 일식을 확인하곤 자칼의 발을 노리고 채찍을 휘둘렀다.
남만혁이 저렇게 능수능란하게 채찍을 다룰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자칼이 펄쩍 뛰어서 피했고. 차후, 계약자에게 온갖 비난과 멸시를 당할 것을 생각하며 고뇌하던 일식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초신속.
터널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고 녹슨 검이 가로로 그어졌다. 그 일격으로 흥분해 주변을 살피지 못한 케롤라인 칠링의 목이 떨어졌다.
크릉? 커엉!!
실제 죽음은 아니었으나 자칼은 핏발선 눈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일식은 자신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는 자칼의 뒷다리를 절단. 이격으로 척추를 끊고 삼격으로 목을 베어낸다.
“이야, 일식아. 고강이에게 열심히 배우더니만 제법 검사 태가 나네?”
달각, 달각.
뭘 그렇게까지 칭찬하냐며 좋아하는 일식에게 지폐를 쥐여주는 것으로 포상을 내린 남만혁은 이번엔 터널의 2/3지점까지 가 의자를 꺼내 앉았다.
파이브 파이트 리그는 한 번의 죽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모든 참가자는 죽음을 겪고 10분 후 부활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를 간과할 수는 없으나 지금 이걸 극복하지 못하면 히어로 활동은 못 한다. 차라리 빨리 자기 적성을 깨닫고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게 낫다. 전투를 하지 않는 히어로도 많으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자칼과 케롤라인이 다시 왔다. 이전과는 달리 흥분한 기색도, 얼굴에 만연한 웃음도 없다.
“왔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와 음성에 두 사람은 발끈했으나 부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프로스트 교수에게 침착하라는 조언을 들은 참이었기에 이를 악물고 반응하지 않았다.
“왜 가만히 있냐. 또 욕해 줘?”
일식을 앞에 두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남만혁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너희. 아이템 사 왔지?”
대전이 시작되면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상대를 처치하면 포인트를 준다. 그거로 본진에서 아이템을 살 수 있고. 현실로 치면 코스튬과 아티팩트인 셈이다.
점점 강해지는 적. 도태되는 나. 그 절망을 온몸으로 체험케 하는 것조차 파이브 파이트 리그의 목적 중 하나다.
케롤라인 칠링과 자칼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일식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거리를 벌렸다.
터널의 벽에 붙기 직전, 케롤라인이 기둥 뒤로 피할 수 없게끔 사선으로 파도를 구현해 보냈다.
남만혁이 일식을 일찍 소환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면에서 저 파도에 휘말리면 입구까지 떠밀려가는 건 순식간. 하지만 사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잠깐 버티는 것만으로도 활로는 열릴 것이라 믿고 숨을 참은 채 파도에 몸을 맡기는 그때.
“프로즌 브레스!”
남만혁을 높게 띄운 파도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얼음 소용돌이가 그를 향해 쇄도했다. 남만혁은 혀를 차며 미르토스 해변을 구현, 물속으로 숨었다.
빠가각.
수면이 잠깐 얼어붙었으나 따뜻한 지중해의 환경을 구현하는 만큼 금방 녹았다.
프로즌 브레스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남만혁이 머리를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칼의 앞발이 그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자칼은 지금 이 순간만을 노렸기에 수중에서 자신의 뒤로 은밀히 접근하는 일식을 감지할 수 없었다.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감만큼 손쉬운 사냥은 없다고 하였던가. 자칼의 앞발이 남만혁의 머리에 닿기 직전, 일식이 찌른 녹슨 검에 의해 꿰뚫렸다.
크허허허헝!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9할 이상 감폭시켰다고는 하나 아픈 건 아픈 거다.
특히 시각이 주는 충격과 스트레스도 상당하기에 자칼은 바다 한가운데서 헤엄쳐서 도망친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고. 이는 죽음으로 이어졌다.
멀리서 파도를 타고 오던 케롤라인은 남만혁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더니 공중제비를 돌아 되돌아간다.
미르토스 구현을 해제했음에도 파도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대로 터널 밖으로 도망치는 케롤라인.
“이제 오겠구만.”
이번에는 아예 상대 쪽 터널 입구로 나와 해변 의자를 꺼내 앉은 남만혁.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네 명의 아이들이 내려선다.
어디선가 주워온 넓은 잎사귀로 부채질하는 일식. 해변 의자에 앉아 잡지를 넘겨보는 남만혁.
휴양이라도 온 듯한 그의 행태에 헛웃음이 나올 법도 하건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음.”
스위프트의 침음이 장내를 울릴 무렵. 케롤라인 칠링이 그레이스 멜론의 옆구리를 쿡쿡 친다. 이를 악물고 무시하던 그레이스는 그녀의 계속되는 재촉에 한숨을 쉬며 한걸음 나섰다.
“저기, 데이트 선물로 악력기 주신 분 아니세요?”
“세상에, 데이트 선물로 남이 쓰던 악력기를 줬다고? 최악! 쓰레기! 모태솔로!”
늘 여유롭던 남만혁의 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간다.
도발하라는 프로스트 교수의 조언이 훌륭하게 먹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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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