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크림슨 래빗
매저드 교수가 말하길, 체내의 검은 불꽃은 내 의지력을 기반으로 타오른다고 한다.
거기까지 설명했을 때 트레이시와 안토니오가 도착했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마법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후 파이트 파이브 리그 강의는 F팀과 BC팀이 붙었고 B반의 활잡이에게 소구경이 저격당한 거 외엔 큰 어려움 없이 승리를 가져왔다.
A팀은 DE팀을 초반부터 학살해서 단 한 번도 승기를 넘겨주지 않았다. 프로스트 교수가 말한 좌절을 DE은 처절하게 맛봤을 것이다.
그렇게 금일 수업이 모두 끝나고 컨테이너로 돌아가는 길에 오래된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주저앉은 여자아이와 그 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이 보였다.
“간 크네.”
아카데미 내에서 괴롭힘과 폭행이 발견되면 가해자는 교감의 권력 아래 예외 없이 실형을 받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지양하는 교풍이 있다. 정의관 교육 때 철저히 주입받기도 하고.
그런데 저렇게 모였다는 건, 그 오해를 감수할만한 이유가 있단 뜻이었기에 걸음을 돌려 저들 쪽으로 향했다.
“공모전 탈락이라며?”
공모전?
저들이 들고 있는 홀로 보드 하나를 리쳇의 시야로 훔쳐보니 히어로 협회에서 주관하는 코스튬 공모전이었다.
학생 부문 1등은 1만 달러와 현역 히어로의 코스튬 의뢰 지명 대상에 포함된다고.
“너는 재능이 없다니까.”
“그리고 좀 일어나! 우리를 이상하게 보잖아.”
참가 자격은 18세 이상 누구나이니, 저들은 최소 2학년인 셈이다.
“너희…, 나빠.”
“나쁜 건 네 센스지. 우리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그렇지?”
“응. 이렇게 진정성 있는 충고를 해주면 고마워해야지. 너 진짜 싸가지 없다.”
“맞아. 우리 아니면 이런 말 해줄 사람도 없으면서.”
이야, 가스라이팅이 대단하네.
2학년부터는 과가 나뉜다. 히어로를 지망했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전향하는 경우가 더러 발생하다 보니 서히아는 그런 학생들을 구제하고자 여러 과를 개설했다.
그중 하나가 서포트과. 대화를 들어보니 코스튬 제작에 관심을 둔 미래의 크래프터들인 모양이다.
서 있는 학생들의 홀로 보드엔 자기가 디자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코스튬들이 띄워져 있었기에 이를 찬찬히 살펴봤다.
“다 별로네.”
들리게끔 중얼거리며 무리의 중앙에 들어가자 시선에 내 뒤통수에 꽂힌다.
“지금 우리 작품 보고 한 소리니?”
이 무리의 대장으로 예상되는 여자가 미간을 좁히며 묻기에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개미 형상의 디자인이면, 데빌앤트맨 코스튬인가 본데. 당사자에게 그거 보내면 쌍욕 날아올걸?”
“뭐, 뭐? 네가 뭘 안다고!”
“데빌앤트맨은 변신계 각성자야. 상황에 따라서는 다리가 여섯 개가 될 수도 있다는 소리지. 그런데 네가 만든 걸 봐.”
인간의 몸에 개미의 머리. 그리고 데빌앤트맨이 코스튬에는 제발 더듬이를 달지 말고 개폐식 구멍을 달아 달라고 공식적으로 부탁까지 했는데, 보란 듯이 더듬이를 붙여놨다.
이건 최소한의 사전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이를 하나하나 짚어주자 녀석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씩씩대더니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너! 조심해!”
뭘 조심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괜찮냐?”
“…응.”
내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소녀. 몸집이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주 왜소했다.
“거기에 네가 디자인한 코스튬 있지?”
끌어안고 있는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묻자.
“그렇긴 한데, 왜?”
흔들리는 목소리, 방어적인 언사. 평소 그녀가 어떤 말을 들어왔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구경 좀 하게. 공모전 냈다며? 어차피 그 사이트 가면 볼 수 있지 않나.”
입술을 잘근 씹던 여자애는 자기가 스케치북을 들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허둥대며 중간쯤을 펼쳐 그림 한 장을 내게 보였다.
“어우.”
“별로지?”
점핑키라는 중년 히어로의 코스튬이었는데 히어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엄청난 점프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 용수철로 변하는 다리를 고려한 디자인이 필수다.
“어. 심각하네.”
용수철 문양이 들어간 하의를 보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직 학생이라 기능보다는 보이는 면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윽! 이, 이건. 6살 때 취미 삼아 그린 거야!”
그래, 아무리 널널하다는 서포트과의 교수들이라지만 이런 기초까지 건너뛰진 않았겠지.
“아하. 공모전 낸 거 보자.”
팔랑팔랑 넘어가는 스케치북. 마지막 즈음 가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슥 내민다.
“오.”
방금 본 것과는 달리 부위별 소재와 기능이 빼곡히 적혀있고, 히어로의 특성까지 고려한 디자인이다.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
“이 마크는?”
귀가 뒤로 길게 늘어진 토끼의 옆모습.
“그건, 내 사인.”
눈에 익은 사인이다. 10년 정도 뒤에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의 사인과 똑같다.
“크림슨 래빗?”
“어? 나 알아?”
크림슨 래빗.
회귀 전, 빌런의 코스튬을 제작하던 크래프터. 그녀가 제작한 장비를 갖춰 입으면, 여벌의 목숨이 생긴다는 소리가 돌 정도로 품질이나 기능이 대단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충분한 악명과 돈을 얻었을 무렵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얼핏,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게 여기였을 줄이야.
“알지. 천재잖아. 너.”
히어로가 이를 갈고 빌런이 환호했던, 마이스터 크림슨 래빗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천재였으면, 공모전에서 탈락할 리 없잖아.”
그 콧대 높은 크림슨 래빗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어떻게든 마운틴 짐에 소속시켜서 나를 포함한 우리 회원들 코스튬을 제작하게 만들자.
나는 뒤로 물러서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쳐 도망 못 치게 붙잡고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원래 세상은 시대를 초월한 천재가 흘린 부산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전하는 거야. 그래서 천재는 항상 외롭지. 주변에서 그걸 몰라주거든. 근데 나는 아니야.”
그럴듯한 개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크림슨 래빗에게]
[귀하는 ‘학생 부문 top 10’에 랭크되셨으나 2차 심사 결과 합리적이지 못한 소재와 불필요한 기능이 지적되어 아쉽게 30위 권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조금 더 현실적인 코스튬을 구상하신다면,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래는 심사관분들의 코멘트이니 작품활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숏훅캡틴 : 촌뜨기의 망상 속 미약한 트윙클]
[프랙털 마스크 : 번데기의 날갯짓]
[젤리조아 : 실현성 0점, 심미성 3점, 창의성 4점, 기능성 3점]
크림슨 래빗은 아날로그를 사랑한다. 오늘 점심 무렵에 당도한 공모전 결과를 바로 확인하지 않고 굳이 프린트로 뽑은 것도 그러한 이유다.
A4 한 장. 거기엔 실패로 가득했다.
“또…, 아!”
같은 과 수석이자 공모전 ‘학생 부문’ 1등에 랭크된 제니퍼가 크림슨 래빗의 뒤에서 접근해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홱 낚아채 크게 읽는다.
“합리적이지 못한 소재와 불필요한 기능! 촌뜨기! 번데기! 0점! 꺄하하핫. 이런 평가를 받고도 여기 있는 너도 대단하다. 멘탈은 진짜 히어로네.”
“돌려줘.”
“입상도 못 한 루저가 말해서 그런가, 잘 안 들리네. 크게 말해줄래?”
식당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자 크림슨 래빗은 돌려받기를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제니퍼 무리도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는지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혔고 결국, 크림슨 래빗은 그간 해오던 고민에 결단을 내렸다.
‘자퇴하자.’
히어로가 되고자 서히아에 왔으나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자신의 특성으로는 한계가 명확했기에 평소 관심을 두던 서포트, 크래프트 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고작 한 학기. 빠르면 6살 때부터 크래프트 공부를 해 온 아이들에 비하면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저들이 놀고 쉬고 잘 때. 필사의 각오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크림슨 래빗은 확신을 얻었다.
‘어차피 크래프터로 정했어. 굳이 서히아가 아니어도 돼.’
지금처럼 인격 모독과 더불어 사사건건 방해를 당할 바에 차라리 집에서 독학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크림슨 래빗이었다.
그리 결심하고 주저앉았다. 제니퍼 무리가 더 기세등등해 시끄럽게 군다. 저들의 입이 닫히면 뺨을 한 번씩 쳐올리고 자퇴서를 낼 작정이었다.
“다 별론데.”
평범한 외모의 아시아인이 제니퍼가 자랑스럽게 띄워둔 코스튬을 보고 툭 내뱉는 말.
당황하는 애들을 보는 것도 그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꼴도. 처음이었고 유쾌했다.
“그래서 천재는 항상 외롭지.”
자신을 천재라고 추켜세우는 이 남자애는 아무리 뛰어나도 히어로 협회에 고용된 심사관들보다는 식견이 부족할 것이다.
저 단어도 서히아에 입학한 학생이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듣는 말이었기에 습관처럼 내뱉은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뻤다.
“우리 팀에 들어오지 않을래? 마운틴 짐이라고. 저 산에 있는 클럽인데.”
“고마워, 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했어. 나는 자퇴할 거야.”
놀랄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애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나쁘지 않네. 아무래도 서히아는 히어로 육성을 주력으로 하니까 네 천재성을 못 담을 수도 있겠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보다 자퇴하면 어디서 지내게?”
“여기서 배운 게 있으니까, 그거로 과외를 좀—”
“그래서 어느 세월에 공부하냐. 내가 지원해줄게. 아는 블랙스미스 영감도 있으니까, 미국으로 가서 바로 시작품 만들어봐.”
뭐라 반응하기 전에 쏟아내는 소년의 말에 크림슨 래빗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잠, 잠깐만. 네가 나를 왜 지원해?”
“말했잖아. 너 재능 있다고. 그리고 나 돈 많아. 찝찝하면 그냥 투자라고 생각해.”
“그래도….”
“너, 바닥에 주인 없는 다이아몬드가 굴러다니면 줍냐 안 줍냐.”
“줍지.”
“그거야.”
확신에 찬 그의 어투에 심장 부근이 먹먹해진 소녀는 속으로 몇 가지 감사의 말을 되뇌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비행기 표랑 지낼 곳, 코스튬 제작에 필요한 소재들, 공부에 필요한 비용. 전부 지원할게. 대신, 우리 애들 코스튬 좀 만들어줘.”
“아직 제작은 안 해봤는데….”
“이번에 해보면 되겠네. 머신팩토리 영감이 도와줄 거니까 모르면 물어보고.”
“으응.”
“오냐. 번호 줄 테니까 문제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간다.”
크림슨 래빗은 오랫동안 고민한 후, 이름 모를 소년의 번호를 ‘블랙아이 프린스’라고 저장했다.
* * *
남산, 컨테이너.
“대단하긴 하네. 저 나이에 벌써 VZ에 대항할 파츠를 구상할 줄이야.”
내가 씻는 동안 리쳇이 코스튬 공모전의 전산 자료를 긁어왔다. 그중에는 크림슨 래빗에게 보내진 메시지도 있었고.
“실현성 0점인 건 맞지. 현시점에서는 환상 같은 이야기니까.”
코스튬 등 쪽에 마름모형의 보석이 박혀 있는데, 그거 주석이 대박이다.
[VZ 또는 VZ를 무효화시킬 기술이 탑재될 공간.]
[VZ는 ‘VZ가 각성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학적인 분석’논문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음.]
크림슨 래빗을 만났을 때 언급한 대로,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가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 부하지.”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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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