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슬럼가의 백인 (1)
한적한 주말 오전. 삼식이가 나비를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한가로이 선선한 날을 즐기는 때에 홀로폰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프리실라 루드라입니다. 남만혁 학생, 교감실로 오세요.]
“참 나, 교감이면 주말에 학생 막 불러도 돼? 안 가.”
이번 학기 강의 대부분은 전투와 관련되어 있었기에 피로감이 상당하다.
게다가 마운틴 짐 회원들이나 눈에 띄는 아이들 알게 모르게 지도하느라 신경 쓸 것도 많았고.
그대로 홀로폰을 끄고 잠수탈려는데 교감의 메시지가 연속으로 온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어로도 아니고, 이런 감성적인 멘트에 움직일 정도로 내가 물렁물렁하진 않다.
[정돈을 마친 뉴욕 히어로 협회의 첫 정식 지원 요청이니 성공적으로 일을 마무리한다면, 어지간한 요구는 흔쾌히 들어줄 테지요.]
[가령 최근 남만혁 학생이 확보 중인 파이락시스트라는 광물을 대신 사들여 지급한다던가.]
에라이.
“리쳇? 교감이 우리가 자원 끌어모으는 거 눈치챘는데.”
-간섭계니까 밀키 마이닝 간부 하나 찍어서 들여다봤겠지.
밀키 마이닝은 미래에 대두되는 자원들을 현재 수익이 없더라도 채굴하고 구매하는 회사다.
리쳇이 굴린 돈이 제법 불어나서 방학할 때쯤 시작한 사업.
얼마 전에 크림슨 래빗도 만났겠다 본격적으로 VZ 역장 안에서도 특성 사용이 가능해지는 UVZ를 개발해볼까 싶어 핵심 광물인 파이락시스트를 대량 매입 중이다. 그게 교감의 눈에 띈 모양이고.
“난 건 어떻게 알았대.”
-전 세계 파이락시스트가 남산 지하로 들어오니까?
“크흠!”
보물을 멀리 두면 잠을 못 자는 성격이라, 머신팩토리 쪽으로 보낼 물량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남산 지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어쨌건, 교감의 제안이 끌리는 건 사실이다. 나만 파이락시스트를 잠재력이 있는 광물로 판단한 게 아니었는지 몇몇 기업이 대량으로 가지고 있었다. 비싸게 산다 해도 없다고 잡아떼더라.
그걸 히어로 협회 이름을 빌려 강제 징발 때려버리면, 상당한 물량이 모일 거다.
“그럼 1번 창고는 채우긴 하겠는데.”
그럼에도 부족하다. 억 단위 전투 병력을 지구에 투사하는 그블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창고 하나론 어림없다.
아직 침공까지는 여유가 있으나 지금 수준의 채굴량으로는 한계가 있다. 규모 자체를 늘려야 한다.
“씁, 이거. 파이락시스트를 채굴하는 유행을 만들어봐?”
-여러 회사로 경쟁하는 판을 짜서 수요가 높다는 걸 대중들에게 각인시킬까?
“괜찮네.”
그러려면 내가 구매자라는 사실을 아는 교감의 묵인은 필수. 작전이 세워졌으니 사식이를 타고 교감실로 향했다.
똑똑.
“남만혁 학생? 들어와요. 이거 받고요.”
교감은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홀로 보드를 건넸다. 화면에 띄워져 있는 까만 배경의 동영상. 봐도 되냐는 눈짓을 보내자 고개를 끄덕인다.
-허억, 허억. 아아악! 살, 살려줘. 나는 아홉 살 딸이 있어. 제발….
-나는 세 살 때 버려져서 부모가 누군지 몰라. 근데 네 딸은 너를 기억하겠지?
-그, 그러면 아비가 없으면 힘들다는 건 알잖아. 그러니까 제발, 제발. 컥!
탕!
-이제 공평하네.
타탕, 탕, 탕!
음성은 거기까지였다. 교감은 동영상이 꺼지자 다른 영상을 또 하나 틀었는데. 미국의 뉴스 채널인 듯했다.
-현재 은행을 습격한 빌런이 인질을 살해하고 있습니다! 빌런은 17세로 추정되며—
탕!
건물 옥상에서 길 건너편 은행을 가리킨 앵커가 멘트를 하자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어딘가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
-말했지? 71번 거리에 성인을 두지 말라고. 이건 약속을 어긴 대가야. 저기 옥상의 누구 덕에 방금 올해로 62세인 멜 씨가 죽었어. 그래 너. 너 때문이라고.
앵커가 사색이 되어 마이크를 떨어트린다. 이내 군인으로 짐작되는 이들이 옥상에 들이닥쳐 카메라맨과 앵커를 끌어냈다.
-다시 말할게. 내 요구조건은 하나야. 뉴욕의 상위계층 성인들의 자살. 아? 그만. 접근하지 마. 내 편? 협상? 지랄. 내 목줄 채우려는 거 모를 거 같아? 꺼져. 나랑 대화하고 싶으면 요구를 들어주든가. 아니면…, 그래. 미라클 남을 내 앞에 데려와.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저 미라클 남이라는 게?”
“예, 빌런은 자신과 같은 나이에 전 협회장인 헤드라이트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당신이 존경스럽다고 하더군요.”
“저보고 저걸 해결하라는 겁니까?”
“인질 구출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빌런도 살리세요. 그래야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빌런의 인권도 중요한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인권. 저런 살인마도 인권이 있다는 게 좀 우습다.
“언제 가면 되죠?”
“전용기는 준비해놨습니다. 2시간 안에는 도착하겠지요. 빌런 대응팀에는 미리 언질을 해두었으니 바로 빌런과 접촉하세요.”
하기로 결심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교감의 애조(愛鳥)를 타고 뉴욕 서부 71번 거리에 진입해 착륙했다.
웨에에엥!
직후 엄청난 음량의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적청광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쫄쫄이 복장의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미라클 남?”
“어. 그냥 남이라고 불러.”
“오케이, 남. 브리핑할게.”
그녀는 어쩐지 내게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71번가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차단했음에도 두 번의 총성이 울렸어. 사람이 죽었는진 알 수 없어.”
빌런 대응팀의 필수인력은 탐색계 각성자다. 그런데도 알 수 없다는 건 상대가 탐색계 특성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뜻.
빌런은 나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다. 도움을 요청하면 구해주겠다는 사이렌녀.
“특이사항은?”
“음, 빌런이라 부르니까 좋아했다는 거 정도?”
아하, 계획범죄에 관심종자. 대충 견적 나오네. 놈은 이목을 집중시키는 쇼를 벌이고 싶은 거다.
나는 사이렌녀가 건네주는 방탄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은행 쪽으로 걷자 인근에서 무음 비행을 하던 다수의 드론 카메라가 나를 찍는다.
은행 앞에 서니 블라인드로 가려진 강화유리 너머로 놈의 음성이 들렸다.
“들어와.”
문을 당겨 열자 고여 있던 핏물이 흘러나와 신발 바닥을 적신다. 이런 거에 당황할 짬밥은 아니었기에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금장식을 전신에 두른 백인 소년이 나를 쳐다본다.
놈의 뒤로는 서른 명쯤 되는 민간인들이 속박포에 속박당해 있었다.
“미라클 남?”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묻는 소년.
“어.”
“내가 널 왜 불렀을까?”
“모르지.”
“오. 그래, 모를 수 있지.”
빌런은 금으로 도색된 권총을 꺼내 속박포에 묶여 있던 노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댔다.
“그런데 그따위로 시건방지게 말해도 될까?”
내가 침묵하자 방아쇠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빌런.
“으읍, 읍!”
입이 막힌 채 눈물로 호소하며 삶을 애원하는 노인의 행동에 빌런은 얼굴을 구기더니.
“에이, 울고 지랄이야. 역겹게.”
탕.
꺄아아악!
단지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 내 동년배로 보이는 놈은 실실 웃으며 노인을 발로 굴려 내가 들어왔던 문을 시체로 막는다.
“어때?”
“뭐가.”
“너 때문에 사람이 죽은 기분 말야. 좋아? 싫어?”
“목적이 뭐냐.”
“하, 재미없게. 네 기분을 묻고 있는데 왜 내 목적을 물어. 너도 똑같네. 기껏 나랑 비슷한 녀석 불렀더니. 에이씨. 시간만 날렸어.”
“기분? 아무렇지도 않아. 사람이 억 단위로 죽는 걸 봤는데. 하나 정도야.”
고작. 한둘 죽는다고 하여 슬픔에 잠길 시기는 지났다. 뭐, 만약 방금 죽은 사람이 마운틴 짐 회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거짓말.”
“어리숙한 빌런한테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냐.”
“다시 말해봐.”
“거짓말을 하겠냐.”
“말고. 앞에.”
“어리숙한 빌런.”
“하!”
타탕, 탕. 탕!
끄아악!
발작하듯 사방으로 총을 난사하는 놈. 그 과정에서 두 명의 팔에 총알이 박혔다. 저대로 놔두면 출혈로 죽는다.
“저 사람들 죽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네 목적이나 말해.”
“내가 어리숙한 빌런이면, 내게 죽은 어른은 뭐고 저 바깥의 경찰, 히어로는 왜 나를 못 죽이고 있지?”
“목적이 뭐냐. 지금 세 번째 묻는다. 갓난애도 이 정도면 알아들을 텐데. 쯔쯔.”
“말해! 왜 내가 어리숙하다는 거냐!”
리쳇이 내 시야로 확인하길, 약실에 탄이 없단다. 그럼 좀 강하게 나가도 되겠네.
“야이 병신아. 넌 여기서 죽어. 내일이 없는데 뭔 소용이야.”
“내가 내일이 왜 없어?”
“미래를 담보로 오늘을 빌렸으니까.”
“뭐?”
“마침 은행이니까 돈으로 비유를 해주마. 대출은 담보가 커야 많이 빌려줘. 넌 남은 네 인생을 담보로 돈을 빌린 거다. 어지간한 사람은 평생 만져볼 수 없는 돈이 네 손에 쥐어진 거지.”
어느 시대나 뒤를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 이들은 강했다. 그것이 히어로든 빌런이든 말이다. 다만, 그런 이들의 결말은 대개 비슷하다.
처음은 성공할지 모른다. 두 번째도 운이 따라준다면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반복하다 보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생존을 도외시한 무모한 돌격은 개죽음을 낳는다.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살았던 이들의 종착지는 언제나 절망과 죽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강하다는 거지? 그런데 왜 어리숙하다는 거냐고!”
“죽을 테니까. 돈. 아니 힘이 무슨 소용이냐. 내일이 없는데. 사람이 보유한 모든 것은 지속되어야 의미가 부여된다. 그따위로 헤프게 낭비하면, 하루살이랑 다를 게 뭐냐.”
“아니! 나는 달라. 이걸 발판으로 거물이 될 거다. 제대로 미래를 생각해서 벌인 일이라는 말이다.”
인정한다. 가끔 예외는 있다. 10억 명 중 하나꼴로, 미래를 팔았음에도 계속 살아나오는 사람. 저쯤 되면 죽을 만도 한데 꾸역꾸역 목숨줄만은 붙잡고 돌아오는 인간.
사람들은 그런 이를 경악을 담아 이렇게 부른다.
“슈퍼빌런이라도 되게?”
“그래!”
“너는 무리다.”
“뭐? 왜.”
“허영심으로 전신을 두르고 비루한 이유로 사람을 죽이며 성인은 접근하지 말라는 겁쟁이이니까.”
“…너 건방져. 네가 뭔데 다 안다고 떠들어?”
놈이 재킷 주머니에서 총알 두 개를 꺼내 장전하고는 나를 겨눈다.
이런 씨, 탄이 남았었나.
빌런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급히 입을 열었다.
“네가 슈퍼빌런이 되는 방법이 있다.”
“뭔데.”
“자수.”
“이 새끼가 나를 병신 새대가리로 아나!”
말은 저렇게 해도 표정이 흔들린다. 살짝이지만, 총구도 내려갔다. 놈은 동요하고 있다.
“다시 묻지. 거물이 되고 싶은 이유가 뭐냐.”
눈가를 좁히고 입술을 움찔거리던 놈은 한참 만에 목소리를 냈다.
“…슬럼가의 동생들. 구걸로 하루를 연명하는 녀석들에게 희망을 줘야 해. 차라리 나처럼 빌런이 돼서라도 살아남으라고. 씨발 포기 좀 하지 말라고!”
우습게도. 슬럼가는 비백인이 주류다. 거기에서 태어난 백인은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나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아봤기에 놈의 인생이 어느 정도는 가늠된다.
“그게 네 진짜 목적이라면, 이 방법은 잘못됐다. 희망을 줬던 당사자가 비루하게 끌려가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까.”
“지랄, 성공하면 다 해결돼!”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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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