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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76화 (76/201)

<76화>

봉사활동 (1)

“내일부터 일주일간 의무 봉사활동이 있습니다.”

종례 시간. 힘든 강의를 마치고 기진맥진해 늘어진 아이들에게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는 데커드 교수.

“예에에에?”

“협조를 구한 시설은 공지로 올려두었으니 확인하고 신청하세요.”

아카데미용 홀로 보드를 켜 공지사항을 살피다 어느 항목을 발견하고 얼른 손을 들었다.

“선착순인가요?”

“네.”

아오.

하나 보육원 옆에 1/1이라는 숫자가 있다. 보육원에서 1명을 요청했고 이미 신청했다는 소리.

그나마 다행인 건 수강 신청 때와는 달리 신청 인원을 조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이 내 꿀 빨 기회를 낚아챘는지 알아내기 위해 옆의 조회 버튼을 눌렀다. 약간의 로딩 후 나타나는 프로필은.

“퀸?”

금발청안에 안경을 끼고 턱을 당긴 채 올려다보는 듯한 시선의 퀸.

입학 때 찍은 사진이네. 이렇게 보니 반년 사이에 참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그래도 얼굴이 좀 밝아졌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하면 그냥 예뻐졌다.

전체적으로 젖살이 빠져서 숨어 있던 이목구비의 선이 드러나니 어지간한 연예인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얼굴에 빛이 난다.

데커드가 종례를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A반으로 향했다. 녀석은 언제나 일과가 끝나면 창문으로 날아가니까 그 전에 잡으려면 달리는 수밖에 없다.

“엇?”

뒷문으로 나오다 내가 뛰어오는 걸 본 마가렛이 갑자기 교실 안으로 들어가서 소리친다.

“그레이스! 네 남친 온다!”

“아, 아니라니까요!”

저 대사, 길거리에서 몇 번 들어봤다. 처음에는 혹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자기 친구에게 욕을 하더라. 질 나쁜 농담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무얼. 한때 슈퍼빌런이었던 나다. 이 정도로는 상처 입지 않는다.

“남 교수, 울어?”

마가렛이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아니, 먼지가 좀. …퀸, 하나 보육원에 봉사 신청했더라?”

“당신이 자란 곳에 가보고 싶었어요.”

결의가 느껴지는 표정. 가볍게 정한 결정은 아니라는 건가. 음, 하기야 이왕이면 내 눈이 닿는 곳에 퀸을 두는 것이 낫다. 엄한 곳에 가서 다치면 곤란한 건 나니까.

“소민 누나에게 말해 놓을 테니까. 사고 치지 마.”

“제가 사고를 왜 쳐요! 잠깐만요.”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내 팔목을 붙잡는 퀸. 주변에서 오오, 하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는다.

“왜?”

“그, 저희 어머니가 운영하는 병원에서도 봉사 인원을 받아요.”

“거기에 신청해라?”

“네. 아, 그.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방과 후에 마운틴 짐에서 트레이닝을 한다니까 어머니께서 걱정을 많이 하세요. 가르치는 사람이 누군지 한번 보고 싶다고….”

말투를 보니 꽤 속앓이를 한 듯하다.

“그러자 그럼. 네가 어떻게 컸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네. 그, 그럼.”

도망치듯 홱 날아가는 퀸. 내가 쟤 왜 저러냐는 눈으로 마가렛을 보자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우락부락한 어깨로 내 몸을 툭 밀친다.

가벼운 접촉이었으나 나는 복도까지 밀려 나갔다.

“엉큼하긴.”

그러곤 마가렛과 함께 A반이 모두 비슷한 웃음을 머금은 채 우르르 나간다.

“엉큼해? 내가?”

아니, 왜?

* * *

멜론 메디컬센터.

LA에 위치한 이 종합병원은 엄청난 진료비와 치료비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문의가 3년 치 스케줄이 꽉 차 있다.

초기에는 병원의 이름이 굉장히 복잡하고 길었는데, 현재 퀸의 어머니가 이사장으로 오면서 수식어를 싹 쳐냈다고 한다. 그녀의 성향이 엿보이는 부분이라 하겠다.

외관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건축양식이었으나 내부는 달랐다.

미술관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름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빼곡히 걸려 있었고 로비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자리했으며 보호자와 대기자가 쉴 수 있는 공간에는 클래식 음악이 울렸다. 희망과 관련된 시도 종종 보인다.

“어떻게 왔니?”

데스크에 다가가자 피로로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만 화사한 톤으로 묻는 간호사. 여기나 한국이나 간호사는 비슷하네.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왔어. 봉사활동 신청했고.”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데스크 앱으로 전송하자 간호사가 눈동자를 굴려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멜론 이사장님이 말하던 게 너였구나. 17층에 계셔. 올라가면 내 친구가 안내해줄 거야.”

간호사가 가리키는 방향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에 도착하자 미리 전달받았는지 마중 나와 있던 정장의 여성이 나를 데리고 커다란 문 앞으로 간다.

똑똑.

“이사장님. 말씀하신 분이 오셨습니다.”

“어머, 잠깐만요.”

또각거리는 힐 소리가 들린 후에 문이 방 안쪽으로 열렸다. 퀸의 미모가 누구 유전자인가 했더니 이 사람이었네.

노년에 근접한 나이임에도 포니테일로 묶어 넘긴 머리가 무척 어울리는 여성.

“프로페서 남, 맞니?”

“프로페서는 애들이 장난친다고 붙인 별명이니까, 남이라고 부르세요.”

아카데미 안이면 모를까 밖에서 그리 불렸다가는 괜한 관심을 끌 우려가 있다.

“호호, 내 아들이랑은 다르게 겸손하구나. 들어오렴. 미스터 남.”

“예, 마담 멜론.”

문이 닫히자 가로로 긴 책상의 모서리에 걸터앉은 안나 멜론이 턱을 당겨 안경 위로 나를 유심히 바라본다.

이 아줌마 왜 이래.

“미인의 관심이야 언제든 환영입니다만, 친구 어머니는 좀 그러네요.”

“뭐어?”

깔깔대며 웃던 그녀는 내 정수리에 약한 꿀밤을 먹인 뒤 병원의 로고가 새겨진 홀로 보드를 내 앞에 놨다.

“네가 가장 먼저 왔으니 어드밴티지가 있어야겠지? 이 중 하나를 먼저 고르렴. 일주일간 네가 하게 될 일이란다.”

동행 안내. 처방전 발행. 물품 제작. 간호 보조. 외부 진료소 보조. 간단 행정. 약무국 보조.

항목별로 상세한 내용이 옆에 쓰여 있었다.

“어?”

“왜 그러니?”

깍지를 낀 손을 자기 턱 아래에 대고 내 얼굴을 바라보는 멜론 여사. 진짜 왜 이러지. 부담스럽게.

“업무 강도는 뭔가요?”

“난이도. 별이 많아질수록 고되고 신경 쓸 게 많다는 뜻이란다.”

다른 건 다 별 하나고 외부 진료소 보조만 별 다섯 개다. 뭐야 이거. 별을 붙인 의미가 없지 않나.

설명을 읽어보니 다른 업무는 전부 병원 내에서 진행되는데, 외부 진료소 보조는 현장에 지원을 나간다. 사건에 휘말릴 수 있어서 별이 다섯 개라는 건가.

고민할 것도 없네.

정말 봉사 시간만 때우러 온 거면 처방전 발행을 고르고 리쳇에게 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멜론 가문의 영향력을 디테일하게 조사해보고 싶었기에 외부 진료소 보조를 골랐다.

“다른 봉사를 고르는 게 어떠니? 딸의 친구를 위험한 곳에 보내고 싶진 않구나.”

“거짓말을 하려면 웃지나 말던가.”

위험하다고요? 바라던 바입니다. 저도 히어로 지망생이니까요.

“…….”

“…….”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안나 멜론.

염불. 바꿔서 말했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하게 간다.

“뭐요.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오는 애 중 하나는 이거 맡아야 하잖아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간호 보조를 두 명으로 두면 되니까. 그런데, 너.”

잠시 침묵하던 안나 멜론은 내 눈을 직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반할만하네.”

“예?”

“알겠으니 나가보렴. 실링이 외부 진료소로 데려다줄 거야.”

“…고생하십쇼.”

* * *

“실링, 네가 보기엔 어때?”

남만혁을 외부 진료소로 데려다주고 돌아온 실링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사장의 재촉을 들어야 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인 거 같습니다. 유머러스하고 생각이 깊으며 배려가 몸에 밴 사내.”

어릴 적부터 그레이스를 돌본 실링은 종종 그레이스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실링은 최근 남만혁과 데이트를 했다며 흥분한 아가씨의 모습을 뇌리에 그렸으나 가족에겐 절대 비밀이라 하였기에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근데 대화를 나눠보니까, 그것만이 아니야.”

순간 아가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퇴짜를 맞을까 걱정되어 남만혁을 두둔하려던 실링은 이내 이사장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섹시해.”

“멜론 이사장님?”

“능력도 있으니 주변에 여자들이 벌레처럼 바글바글하겠지.”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아가씨가 수상한 사람과 교제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따로 아카데미 내부를 조사해본 실링은 남만혁의 이미지가 친근한 교수에 가깝다는 걸 알아내곤 안도했었다. 이를 이사장에게 알리자.

“실링, 네가 그래서 결혼을 못 한 거야.”

“…갑자기요?”

“섹시하다. 라는 감정은 저 사람의 포장을 벗기고 싶은 욕구가 들었을 때 느껴.”

“으음, 이사장님이 남만혁 군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좀.”

“뭐? 실링. 내 나이가 몇인데, 저런 꼬마를 이성으로 보겠니. 나는 내면 이야기를 하는 거란다.”

“죄송합니다.”

“저렇게 속내를 잘 숨기는 사내가 옆에서 알짱거리면 나 같아도 호감이 가겠다 싶어.”

“거슬리시면 아가씨 옆에서 치우겠습니다.”

“너는 항상 급발진하는 게 문제야.”

실링은 생각했다. 이 사람은 왜 나한테만 꼰대처럼 구는 걸까.

안나 멜론은 시계를 보더니 업무 시간이라며 실링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참. 이사장님, 외부 진료소 보조를 위해 고용해둔 히어로는 어떻게 할까요?”

실링이 문고리를 잡고 묻는다.

말이 보조지 실제로는 파견 간 의사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현직 히어로를 고용해야 하는 업무. 괜히 별 다섯 개가 아니다.

“지금 학생을 외부 진료소로 보냈다고 비난하는 거니?”

실링이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자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잇는 안나 멜론.

“그 정도도 못 하면, 내 딸을 어떻게 믿고 맡기겠어.”

타인의 고착된 정서가 아이에게 물들까 봐 사교육도 시키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원하는 교육은 최고의 인공지능 강의를 통해 기초 지식수준으로만 익히게 했을 뿐이다.

범인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겠으나 그레이스는 달랐다. 한두 개만 알려줘도 스스로 백까지 깨우친다. 아이는 거기서 재미를 느꼈다.

안나 멜론은 자신의 힘으로 성과를 내는 게 어떤 기분인지 딸이 깨닫길 바랐고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옷이 그을린 채 돌아왔다. 생명을 구했음을 고백했고.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딸의 얼굴엔 어느 때보다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얼마 후 히어로가 되겠다고 선언하자 그 순간 운명처럼 각성했다. 게다가 트리플 기프트. 위험을 알면서도 말릴 수 없었다.

부자인 부모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히어로 활동을 정식으로 시작할 때. 최상의 사이드킥을 붙여주는 것.

이를 위한 계획이 진행 중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병원에 굳이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아마추어 봉사자를 받는 이유도. 이 계획의 일환.

“제가 아가씨께 해가 되지 않도록 그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미래의 사이드킥 후보를 만나보니, 되려 딸이 남만혁이라는 학생을 지킬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맞았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딸이 실망하고 정을 뗄 테니까.

“진심이십니까?”

“어머, 얘는. 내가 사이코패스인 줄 아니? 당연히 농담이지.”

혼이 담긴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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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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