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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79화 (79/201)

<79화>

꺼진 테러도 다시 보자

일주일간의 봉사활동이 끝났다. 아차하면 목숨이 위험했던 순간이 적지 않았던 만큼, 이들과는 나름의 전우애 비슷한 게 생겼다.

“큐링 힐?”

“아카데미에 소속된 의사인데, 한직에서 썩는 게 좀 아까워서. 능력은 충분해.”

“나야 좋지.”

큐링 힐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다. 퓨즈를 치료할 때 퍼부은 나의 칭찬 세례가 인상 깊었는지 현장을 경험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내 조언을 신중히 고민하고 받아들였다.

물론,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아카데미에 대한 불만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

큐링 힐은 이제 갓 30대 초반이고 마를린은 현장 경력만 30년인 베테랑 의사. 그녀의 노하우를 지금부터 배운다면, 훨씬 대단한 의사가 되지 않을까. 재각성이라도 해주면 쏘 땡큐고.

“끙, 이 사람이 마지막이야.”

내가 기절한 테러리스트를 트럭 화물칸에 싣는 걸 도와주는 마를린.

“그럼, 갑니다. 누님. 몸조심하고요.”

“만혁, 보고 싶을 거야.”

마를린과 케이트와 가벼운 포옹을 나눈 후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구식 차량이라 엔진이 어느 정도 가열될 때까지 천막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액셀을 밟았다.

눈이 마주치는 몇몇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지하철에 고립되어 있던 거지. 썩은 빵을 훔쳐먹고 탈이 났던 꼬마. 거동이 불편한 노인. 내가 발견하고 데려온 사람들이다. 저들은 나를 히어로라 부른다.

“히어로라니. 으, 오글거려.”

나를 배웅하는 사람들을 백미러로 보며 중얼거리자 리쳇이 답한다.

-아랫동네에서 갱단을 학살할 때는?

“그건 보람찼지.”

-이 악당!

행성 하나를 해 먹으려던 녀석에게 악당이라는 소릴 듣다니. 나는 어쩌면 생각보다 잘하고 있는 걸지도.

“응. 칭찬 고맙고.”

* * *

먼저 관할 경찰서를 찾아 잡아들인 테러리스트들을 넘겼다.

“고맙다. 꼭 히어로가 되거라.”

히어로 지망생에게 자주 하는 기계적인 격려가 현상금 지급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너 내 돈 뽀렸지?”

“뽀…. 큼. 액수가 적은 건 외지인이라 추가 세금을 뗀 것뿐이다!”

“야, 너는 네 아들뻘을 삥 뜯고 싶냐?”

“뭐, 뭣?”

계산이 안 맞아서 리쳇에게 알아보라 하니 이놈은 지난 몇 년간 현상금을 지급할 때 추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10%를 꾸준히 착복해왔다. 그것도 경찰서 내에서 당당하게.

요런 놈은 백이면 백 뒷배가 있다. 일단 지금은 당해주고 내 알리바이를 확보한 다음, 아무도 모르게 보복할 생각으로 놈의 얼굴을 눈에 새긴 뒤 자리를 뜨려는데.

“지급관, 미라클 남의 말이 사실입니까?”

청적색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내 뒤에서 나타나 카운터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멱살을 잡는다.

“컥! 당, 당연히 아니오.”

“미라클 남은 실언을 할 히어로가 아닙니다.”

“이이! 내 친구의 삼촌이 경찰서장이다. 이래도 무사할 줄 알아!”

“아버지는 당신에 대해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서 내에서 비리를 저지를 정도의 거물이면, 제가 절대 모를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아버지라는 말에 놀란 놈이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NYPD 경위 샤렌 안젤로다.”

경악하는 지급관. 꼴 좋다. 양아치 자식.

“안, 안젤로 서장의 자제분이십니까? 잠, 잠깐!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등을 돌림으로써 의사를 확실히 표현한 샤렌 안젤로가 내게 대신 사과하며 못 받은 잔금을 사비로 이체한다.

“사이렌, 아니. 샤렌이 여긴 어쩐 일로?”

“제 상사가 당신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주차장에 있는 신형 페라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는 샤렌. 다가가자 뒷좌석에는 아는 얼굴이 타고 있었다.

“루트 커토스?”

“나를 아나?”

끝이 꼬아 올라간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당연히 안다. 일주일 전, 보육원을 방문한 남자.

리쳇의 보고와 더불어 나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갔다는 소민 누나의 연락이 있었다.

“내 뒤를 캐고 다니는 사람을 모를 리가 있나.”

차의 문을 닫으며 그리 말하자 루트 커토스가 입가를 묘하기 비튼다.

“내가 누군지 설명할 수고를 덜어서 좋군. …스인트 거브를 왜 죽였지?”

아하.

“내가?”

“발뺌해도 소용없다. 그 위성이 볼트 사의 것이 아님을 알고 왔으니까.”

언젠가 걸릴 줄은 알았다. 정지궤도에서 타국의 위성을 염탐하는 위성이 한둘이 아니니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기이한 위성 정도는 진작에 체크하고 있었겠지.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모르는 일인데.”

잡아떼면 그만.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들이밀었겠지.

“거짓말. 나는 다 알고 왔다. 남만혁. 아니, 다크 넥서스.”

순간 드는 생각은 ‘죽여서 입을 막을까?’였으나,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다크 넥서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히어로 아닌가?”

“아니. 최초 등장은 네 조국. 대한민국의 부산이었다.”

“그래? 관심이 없어서 몰랐네. 어쨌든 난 아냐.”

대뜸 차량 내 홀로 보드를 조작해 꼬마에게 쉿 제스쳐를 하는 다크 넥서스 사진을 띄우는 루트 커토스.

“오? 그런가. 그러면, 이날 너는 뭐 하고 있었지? 아카데미를 나간 기록은 없지만 그렇다고 안에서 봤다는 사람도 없더군.”

“이날이 언젠데.”

어딜 유도신문 따위를 하려고. 내가 날짜를 알면 다크 넥서스와 엮을 심산이었겠지.

잠시 멈칫한 경감이 해당 일자를 말했다.

“아, 그때는 컨테이너에 있었을걸?”

실제로 나와 체격이 비슷한 일식이가 내 옷을 입고 돌아다녔다. 삼림관리원에게 물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인데도 모른다는 건, 아카데미 협조를 받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걸 증명해줄 사람은?”

“아저씨. 나는 기숙사 배정을 못 받아서 야산에 혼자 사는 신세야. 증명은 썩을. 지금 사람 약 올려?”

그러자 루트 커토스가 씩 웃는다.

“그 산이 네 명의로 되어 있더군. 그럼 반년 전. 거기에 스인트 거브를 죽인 것과 동일한 종류의 빔이 떨어진 건 봤겠지?”

이야. 볼트의 협조는 얻어냈다 이거네.

“반년 전이면 텐트에서 지낼 때라 다른 데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지.”

“그래서, 이번에도 모른다?”

“실제로 모르는 걸 어쩌겠어.”

보니까 자기 감만 믿고 달려온 모양이다. 그러면 성실하게 답할 이유가 없다.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하자 루트 커토스가 내 팔을 잡는다.

“후우, 알겠네. 목적지가 어딘가? 내가 시간을 빼앗았으니 데려다주지.”

여기선 급하게 자리를 뜨는 것보단 짜증과 여유를 가장하는 게 자연스럽다.

“공항. 11시 티켓이니까, 20분 남았네.”

“샤렌! 공항까지 운전 부탁하네.”

루트 커토스가 창문을 열고 외치자 바깥에 서 있던 샤렌이 운전석에 앉는다.

내가 타고 왔던 트럭과는 달리 안정감이 느껴지는 시동이 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이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간다.

“멈춰!”

속도가 붙기 전에 경찰서 건물 옆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남자. 아는 얼굴이다. 내가 직접 속박포를 채워 트럭에 실었던 테러리스트 중 하나.

-골목 안쪽, 지급관 발견.

저편에서 머리만 내밀고 이쪽을 보는 지급관. 저 자식이 일부러 풀어준 건가.

빵빵.

클랙슨을 울리자 테러리스트는 품에 손을 넣었고 나는 그 즉시 해변을 구현해 놈과 페라리 모두 바다에 빠트렸다.

급하게 구현하는 바람에 깊이가 3m밖에 안 되지만, 테러범을 당황시키기에는 충분.

좌석 아래에 있는 비상용 망치로 페라리 창문을 부수고 나와 놈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그대로 눈을 뒤집으며 기절하는 테러범. 힘이 풀린 놈의 손이 품 밖으로 나왔고 그때 불길한 비프음이 들렸다.

삐—

에이, 씨발.

3초의 여유.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내가 부순 창문으로 나오려는 경감과 샤렌을 발로 걷어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그 반동으로 튕겨 나오며 폭발의 여파에 그대로 휩쓸렸다.

쾅!!

전신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짐과 동시에 시야가 검게 변했다. 괜찮다. 회귀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겪던, 익숙한 실신 과정이다.

제기랄.

* * *

“뇌파 정상. 깨어납니다.”

“남만혁 학생. 들리세요? 남만혁 학생!”

귀를 괴롭히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낯선 얼굴 넷과 아는 얼굴 둘.

“프리실라 교감?”

“…뒤에 선생님을 붙이도록 하세요.”

나를 둘러싼 주변 기기와 방의 구조를 보아 이곳은 멜론 종합병원 내 응급실이다.

내 오른편 병상에는 경감이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몸에 박힌 파편이 39개, 관통상이 9곳이었습니다. 적출 완료했고 회복 촉진 시술도 잘 끝났습니다. …후, 지금 당신이 살아남은 건 놀라운 반사신경과 약간의 행운 덕입니다. 히어로에겐 늘 하는 말입니다만, 조심하세요.”

차트를 든 의사가 그리 말하곤 떠났다.

이어 교감은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야 했냐며 나를 타박했고, 나는 이리된 이유를 조금의 과장 없이 그녀에게 고했다.

“돈을 횡령하는 지급관과 그 뒤를 봐주는 서장? 알겠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나눠보죠.”

교감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그녀와의 대화를 두려워한다. 본의대로 말하고 있음에도 이게 교감의 정신 간섭이 개입된 건지 아닌지 확신을 못 하니까.

아무튼 지급관은 상당한 고초를 치를 것이다. 평생 자아를 의심하며 살겠지.

“어디라고요?”

“저깁니다.”

또각, 또각.

정장과 의사 가운을 입은 이들을 우르르 달고 이쪽으로 오는 여자. 멜론 병원재단 이사장, 안나 멜론이었다.

그녀는 병상에 누운 나를 위아래로 슥 살피고는 싱긋 웃으며.

“히어로답네요.”

“제가 좀 그런 편입니다.”

“돌아가면 딸애를 만나봐요. 온다는 걸 내가 막았거든.”

“그러죠. 근데 원래도 매일 보는 사이인지라.”

“…그랬나요.”

“농담입니다. 큭큭. 윽.”

세상에서 가장 바쁜 여성 상위 10위에 들어갈 두 여성은 의사에게 내 상태를 듣고는 동시에 한숨을 쉬더니 응급실을 떠났다.

“2인실로 옮겨드릴게요.”

간호사에 의해 이동된 병실은 나 혼자 쓰는 게 아니었다.

“다크 넥서스.”

옆 침대의 주인은 루트 커토스 경감.

“거, 아니라니까.”

“하늘을 보는 버릇은 고쳐. 적어도 턱의 각도 정도는 신경 쓰는 게 좋겠지. 언젠가 나처럼 의심하는 사람이 또 생길 테니.”

어?

하늘을 보는 버릇은 있을 법하다. 리쳇이 슬롯에 들어오고 난 뒤로는 항상 그렇게 퇴로를 확인해왔으니까.

무어라 답할지 고민하는 사이 병실의 문이 열렸다.

드륵.

“경감님.”

사이렌녀다. 수하의 등장에 경감이 벌떡 일어나 앉는다. 나를 심문할 때보다 훨씬 진중한 얼굴로.

“어떻게 됐지?”

“경찰 직군은 테러로 인한 사고 보험이 안 된답니다.”

저 점잖은 외모의 경감 입에서 참신한 쌍욕들이 줄줄이 쏟아져나왔다.

“내 페라리!”

* * *

서히아 봉사활동이 끝난 주말, 나는 하나 보육원에 왔다.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붉은 대야들. 그 안에는 양념이 된 배추들이 가득 차 있었고 아이들은 소민 누나를 도와 양념을 잎 사이에 바르는 중이었다.

매년 이 시기엔 쓰레기 보육원장 몰래 김치를 담가왔다. 시장에서 얻은 배춧잎과 갖은양념을 버무린, 김치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음식이었으나 원장 몰래 뭔가를 한다는 스릴과 니맛도 내맛도 아닌 묘한 양념이 혀를 자극해 우리 사이에는 나름의 별미였다.

올해 원장이 교도소로 꺼짐으로써 자유를 찾은 덕에 김장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재료도 고급화되었다.

하나 보육원TV로 생방송 하는 것도, 기껏 열심히 한 김장을 무상으로 나눠주는 행사도, 다 좋다. 그런데. 저 금발 머리 여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퀸? 너 뭐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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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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