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낯설지 않은 매니저들
히어로 매니저가 시작되고 첫 파견이, 다른 누구도 아닌 기반이 없다시피 한 피스풀 라이프 사무소라는 것에 두 사람은 순수하게 놀랐다.
“람이라는 저 친구도 자네의 노예 계약서에 서명했겠지?”
“노예 계약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선배. 상호동의하에 이루어진 일시적 정신 위탁에 불과합니다.”
정신 위탁.
히어로를 포함한 섬 거주민은 33,840명. 그들 전원, 프리실라 루드라의 정신 간섭에 의해 제어되고 있는 상태다.
심지어 일부 인물은 성격마저 조작되었기에 세간에서 이 사실을 알면, 엄청난 논란이 일 것이다.
그런 리스크를 안고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교감은 부디 이 20명 안에서 차기 히어로 리더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음.”
도시 하나를 굴리는 일이다. 결코 간단할 리 없다. 교감은 많은 부분을 현대 기술과 마법의 힘을 빌려 헬로우 아일랜드를 완성했다.
“계약이 만능은 아닐세. 내 약속했다시피 올해만 도와주는 거로 함세.”
“충분합니다. 저도 몇 년이나 헬로우 아일랜드를 유지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 그나저나 기술의 발전 속도가 대단허이. 나 같은 노인네는 따라잡질 못하겠구먼. 이게 보이드 존이랬나?”
본래라면 십여 년 뒤에 나와야 할 VZ 발생장치가 남만혁의 투자로 인해 훨씬 이른 시기에 개발되었고 모종의 루트로 교감의 손에 들어갔다.
비록 캡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 휴대가 어려운 형태였으나 기능만큼은 남만혁이 아는 그대로였다.
“예,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휴머노이드의 발전이지요. 뇌 기능을 담당하는 부품의 용량이 인간의 정신을 담을 정도로 방대해졌으니까요.”
교감이 캡슐에 들어가 있는 학생들의 정신을 분리하면 매저드가 이를 마법으로 헬로우 아일랜드의 휴머노이드에 정착시킴으로써 지금과 같이 안전한 장소에서 섬을 활보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것도 그거네만, 학생의 특성에 맞춰 움직이는 주민들이 대단해.”
예를 들어 A반의 자칼이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되고 싶다.’라며 고른 ‘위압’ 특성이 발동하면, 마주한 주민은 목을 움츠리거나 눈을 피하는 둥 기백에 눌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건 제가 무의식을 조작해서 그렇습니다.”
“무어? 언제부터 그런 게 가능했나.”
“최근입니다. 만혁 학생에게 자극을 받은 게 발단이지 싶군요.”
무의식 조작을 할 수 없을 때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기에 원래는 계약서에 명시해 연기를 시킬 셈이었다. 도저히 안 되면 일일이 육체 제어를 뺏어서라도.
“허허, 허허허. 자네가 적으로 돌아서면 저지할 방법이 없겠구먼.”
말에 뼈가 있는 매저드의 언사에 교감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선배님이 나서시겠지요. 지금 누구보다 바쁘게 활동해야 할 누군가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된 것처럼.”
“껄, 내 제자를 강하게 키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그보다 아마포레스트의 식인 임무 말이네. 이거 실재하는 임무인가?”
“예,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히어로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제3세계 국가는 범죄에 취약하지요. 사실상 근처에 히어로가 지나가거나 강한 각성자가 빌런을 퇴치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치안이 낮은 국가에 히어로를 파견하는 게로군.”
“골조는 그렇습니다.”
“역시 후배는 항상 의도가 선해서 좋아. 그런데 저 실패 확률은 뭔가?”
“확률은 프로젝트 서포트 팀이 수집한 정보로 람과 빌런의 전력을 대조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걸 고려하진 않는다. 그래서는 시간이 너무 걸리는 데다 변수가 많아지니까.
“음? 호오. 제자가 또 일을 벌리는구먼.”
두 사람이 상황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남만혁은 양송이수프 무한 제공을 조건으로 자이젝을 영입하고 다른 학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고르기에 이른다.
“…알고 계십니까? 선배님 제자 때문에 서포트 팀의 업무량이 몇 배로 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 화면 속에서는 남만혁이 사다리를 타고 피스풀 라이프 간판 아래에 글씨를 새겨 넣고 있었다.
[히어로 양성소]
“이거 왜 이러나. 자네의 제자이기도 하다네. 저 보게, 냉정하게 히어로 혼자 보내는 모습이 꼭 자네의 젊은 시절 같지 않은가.”
“…….”
이때 프리실라 루드라는 생애 처음으로 저 반들거리는 선배의 이마를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헬로우 아일랜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모든 이들과 심지어 교감의 인지 영역까지 회피해 섬에 잠입했던 두 인물이 있다.
버든, 아이라.
나쁘게 표현하자면 교감의 꼭두각시로 득실거리는 섬에서 유이하게 머리 위에 끈이 달리지 않은 인간들.
이 남매의 사연은 흔해빠진 불우함이었기에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밀항?”
“네.”
쫓기고 도망치고 숨다 보니 어느새 배 위였고 차라리 잘됐다 여기며 식료품 창고에 자리 잡고 이것저것 주워 먹으며 버티다 보니 헬로우 아일랜드였다.
하선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내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한명 한명 검사를 하기에 뒷사람의 신분증을 훔쳤다.
그 사람을 검사할 때에야 사진을 대충 보고 넘긴 출입 관리관이 급히 버든을 찾아 나섰지만, 소년은 이미 골목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
물론, 이즈음 해서 교감과 매저드가 알아차렸으나 내버려 두기로 했다. 프리실라가 정신 감정을 해본 결과 정말 자기도 모르게 섞여 들어왔고 사정이 딱했기 때문.
그렇게 버든은 반년 가까이 섬에서 생활하며 청소나 심부름, 가끔 소매치기 따위로 돈을 벌어 아이라를 먹여 살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이 섬의 기묘함을 자신의 고용주인 남만혁에게 고했고.
“역시. 실존하는 섬이었네. 그보다도, 버든. 너 소매치기 좀 하냐?”
“네? 그, 잘한다기보다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익혔다는 느낌으로….”
“잘하냐고.”
“넵.”
남만혁은 성인인 자이젝을 2만 코인과 양송이 스프 무한 리필로 저렴하게 고용한 건 좋은데, 생활비가 부족해졌기에 어떤 방식이든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좋아, 따라와. 아이라는 내려두고. 자이젝! 얘 좀 보고 있어.”
버든은 자이젝에게 아이라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과 주의사항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말한 뒤, 불안한 얼굴로 남만혁의 뒤를 따랐다.
“30분 남았으니까, 한탕 치고 빠지자.”
시야 한 편의 시계를 통해 남은 플레이 시간을 확인한 그는 처음 지도를 열었을 때 사라졌던, 3천만 코인짜리 부지로 향했다.
“이야 10층짜리 건물을 벌써 올렸어? 건물까지 하면 5천 정도는 들었겠네.”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는 남만혁을 본 버든은 주위를 살피며 그에게 붙어 소곤거렸다.
“뭘 훔칠 건데요.”
코인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 화폐처럼 상태창의 숫자로만 주고받기에 훔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구매한 물건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 시점에 이런 건물을 지었다는 건, 초기 자금으로 1억 코인을 선택했다는 뜻.
남만혁은 17세 소년 소녀가 조금의 사치도 부리지 않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상태창에서 연결되는 ‘상점’에선 콜라부터 롤렉스, 슈퍼카까지. 현존하는 물건 대부분을 구매할 수 있다.
건물 입구에 붙어 있는 사무소 명을 본 남만혁은 흐뭇하게 웃고는 버든의 물음에 답했다.
“내가 부르면 나오는 여자의 주머니. 가능하면 다 털어. 시선은 내가 끌 테니까.”
“하, 하는 데까진 해볼게요. 그런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저 사실 지갑 훔치려다 손톱깎이 훔친 적도 많아요.”
그러면서 담벼락 뒤로 가 그늘에 몸을 숨기는 버든. 남만혁은 입구를 지키는 직원이 다가오려 하자 크게 소리쳤다.
“도—수정! 내 친구가 너 좋아한댄다!”
남만혁은 간판만 보고도 그녀임을 확신했다.
[샤이닝 크리스탈]
저 간판에서 다른 사람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작명이었기에 남만혁은 유언비어를 입에 담았다.
사춘기 소녀의 방심을 자극하는 단어. 유치하지만 통한다.
그러나 반응은 판잣집을 간신히 벗어난 듯한 허름한 옆 건물에서 왔다.
“그 친구가 누군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오는 소녀. 저 건물의 간판은.
[퍼스널 센스]
저 묘한 각도를 그리는 입꼬리와 사무소 명.
‘트레이시 그웬? 썩을.’
20명 중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녀다.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남만혁은 즉시 숨어 있는 버든에게 취소 사인을 보내려는데. 녀석은 이미 트레이시 뒤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걸리더라도 호흡을 맞춘다.
남만혁은 과장되게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트레이시 그웬을 불렀다.
“마이 아미가!”
스페인어로 내 친구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던 남만혁이었으나.
“만혁아, 뭐 해.”
“누구? 나? 나는 자칼이다!”
자칼 흉내를 내는 남만혁을 애잔한 눈으로 내려다본 트레이시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에휴, 됐다. 수정이는 내 사무소에 있으니까 볼 일 있으면 들어와.”
트레이시가 몸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버든이 그녀의 품을 뒤진 후였고, 은밀히 남만혁을 향해 동그라미를 그려 보인다.
“다음에 보자! 아미가!”
목적은 달성했다.
서둘러 피스풀 라이프 사무소로 튀었고, 거기엔 상기된 얼굴의 버든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박이에요!”
“보자.”
우선 지갑부터가 시아넬. 명품이다. 이 디자인이면 한정판으로 아는데, 중고로 팔아도 원화 천만은 거뜬히 받는 물건이다.
여기 시세는 어떤지 몰라도 1할 값만 받아도 10만 코인은 되는 셈.
콧노래를 부르며 지갑을 펼치자 명함 한 장이 팔랑이며 떨어져 내렸다.
[당신의 복수를 도와드립니다.]
[원한 전문 상담소]
[퍼스널 센스]
[대표 one]
남만혁과 함께 들떠있던 버든이 명함을 읽고는 안색이 파리하게 변한다.
“…사장님, 돌려주는 게 어떨까요. 돈은 람 어르신이 돌아오면 들어올 거예요.”
굳이 이런 흉흉한 사무소와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해야겠냐는 공포 어린 조언을, 남만혁은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돌려주고 와라.”
“예? 제가요?”
“네가 훔쳤잖아.”
“와….”
“아니, 너한테 덮어씌우려는 게 아니라 너랑 내가 공모했다는 게 걸리면 일이 커져서—”
그극.
판잣집의 문이 열렸다. 플라스틱이 바닥을 긁는 불쾌함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세 사람이 남만혁을 에워싼다.
“여기 있었네?”
“누가 나 좋아한다고?”
“…만혁. 진짜예요?”
트레이시 그웬, 도수정, 퀸.
남만혁은 모르고 있었으나 세 사람은 인접한 부지를 구매하여 건물을 올리던 도중 만났고, 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런 그들이 트레이시의 사무소에서 계획을 짜던 중, 남만혁의 유언비어를 듣게 된 것이다.
“남만혁? 내가?”
모르쇠로 일관하려던 남만혁에게 트레이시 그웬이 찌푸린 얼굴을 들이대며 말한다.
“이 도둑놈아. 지갑부터 내놔.”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던 남만혁은 버든이 들고 있던 지갑을 빼앗듯 낚아채고는 양손으로 쥐며 사악하게 웃었다.
“자. 이 지갑이 가지고 싶다면, 내 요구 조건을 수용해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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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