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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87화 (87/201)

<87화>

비밀 금고

“자네는 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구먼.”

“…선의 성장을 위한 악의 희생이지요.”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걱정돼서 그러는 게지.”

교감의 정신 간섭은 무한정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헬로우 아일랜드를 운영하는 데 전력을 투자하고 있는 만큼. 슈에츠 운하에 등장한 해적들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스컬 파이럿츠까지 지배할 여력은 없을 거라 생각한 매저드였다.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재각성을 한 뒤로 특성이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성장? 수백을 강제 지배할 정도로 말인가?”

프리실라 루드라의 간섭 능력은 상대의 정신 장벽을 얼마나 허물었는가에 따라 피로도와 성공률이 달라진다.

헬로우 아일랜드 구성원, 3만 명을 제어하는 건 사전에 계약서를 통해 본인 동의를 받은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

“허허, 산전수전을 겪은 간섭계 각성자가 재각성에다 성장까지 한다라. 무섭구먼.”

원래도 세간의 경계와 두려움을 사 아카데미 내부에서만 활동하는 프리실라 루드라다. 이러한 사실까지 알려지면 그녀가 어떤 처우를 받을지 잘 아는 매저드는 마나를 담아 맹세했다.

“내, 자네의 신의를 배신하지 않음세.”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허, 되었네. 이제 와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이 전투. 어떻게 보나?”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홀로 보드로 향한다. 백색 두개골이 그려진 해적기를 달고 당당하게 헬로우 아일랜드 연안으로 침입한 해적들은 자기들을 향해 접근하는 히어로가 탄 선박들에 총알과 미사일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수립할 때만 해도 이 교전에서 사무소 절반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 예상했던 교감이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그야, 우리 학생들의 압승이겠지요.”

* * *

비슷한 문명을 영위하는 지성체들끼리 전쟁을 벌이면 필연적으로 죽음이 발생한다.

첫 격돌 이후 전체 사망한 히어로의 수, 12.

몇 시간 전만 해도 같이 식사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던 이가 허무하게 또는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아무리 ‘가상 공간’이라 뇌가 여기고 있다고 해도 충격이 올 수밖에 없다.

쾌진격하던 몇몇 배들이 점차 속도를 줄이다 이내 멈춘다. 어떤 사무소는 선수를 항구 쪽으로 돌리기까지 한다.

나야 몇 주 전만 해도 일반인이었던 애들을 전면에 세울 생각이 없었기에 처음부터 후방에 자리를 잡았다.

아, 람은 예외로 내기 때문에 선두로 치고 나갔다. 뒷짐 지고 배를 징검다리 삼아 가는 모습이 어디 무협 영화에 나오는 노고수 같더라.

아무튼. 해적들은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인지 가지고 있던 무기를 총동원해 탄을 퍼부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배를 조종하던 키를 오른쪽으로 확 틀었다. 저놈들이 쏴대는 화기는 듀크가 생성한 흙 장벽으로 막으면 되는데 바다 아래의 저 검은 게 문제다.

“아곤! 쓸어버려!”

까미움이 하늘로 총을 갈겨대며 외치자 시퍼런 촉수 하나가 솟구쳐 올라와 배 하나를 강타. 반으로 조각난 배에서 비명이 울려 퍼진다.

“구해야 해!”

“지금 갈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에 혀를 차는 것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이 치솟은 촉수들에 의해 접근하던 배들이 전부 수중으로 가라앉았다.

거품을 게워내며 끌려들어 간 배들이 다시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함께 빠진 히어로와 학생 역시 마찬가지.

자칼이랑 네로였나. 한동안 악몽 좀 꾸겠어.

“보스, 저 배요.”

옥타시아라는 여성이 내 옷깃을 끌며 홀로 동떨어진 곳에 있는 해적선을 가리킨다.

“저기에?”

“네, 가장 비싸요.”

이 녀석이 가진 특성은 ‘골드 시커.’ 주변 사물을 금으로 환전했을 때 가장 비싼 물건을 알아보는 능력. 내가 자신 있게 저 괴물 같은 람에게 내기를 건 이유는 그만큼 옥타시아의 특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기로 가려면 해적선 세 척을 치워내야 한다는 것.

나는 협력관계에 있는 히드라 시스터즈에게 잠깐 따로 행동하겠다는 통보를 한 후 가까운 해적선 쪽으로 배를 붙였다.

“듀크. 한 척은 네가 처리해. 나머지는 자이젝 팀이랑 기스 팀. 너희가 맡고.”

“예!”

듀크야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두 팀도 전투에 특화된 녀석들만 모아뒀기에 해적선 세 척을 침묵시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보물 금고가 들어 있을 거라 예상되는 선박을 신속히 나포해 안을 뒤지자 녹슨 배랑 어울리지 않게 새것처럼 반들거리는 손바닥 크기의 금고를 발견했다.

“보스, 이거 안전하긴 한데 아날로그식이라 해킹은 못 합니다.”

전에 보안업체에서 일했던 기스가 금고를 살피다 내게 건넨다.

“해적놈 발상이 거기서 거기지.”

비스듬하게 기울여 창가로 들어온 햇빛에 버튼을 비추자 유독 많이 닳은 부분이 보였고 몇 번의 실패 끝에 금고를 열었다.

안에서 나온 건 고무줄로 돌돌 말린 종이들. 내용을 살피니 일종의 장부였다.

“이야. 아주 거물이셨네.”

이름만 대면 아는 대형 물류 회사 두 곳이 서로 상대의 선박을 정체시키기 위해 해적을 고용한 정황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장부를 챙기고 주변을 둘러보다 자이젝에 의해 포박되어 끙끙대는 해적의 등을 밟고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끄악!”

해적의 불안과 원망이 담긴 눈빛을 마주 보며 물었다.

“야. 돈 좀 있냐?”

고개를 저으려는 녀석의 몸짓이 손을 통해 느껴지기에 말을 덧붙였다.

“말 잘해.”

목울대를 꿀렁이며 내 웃는 얼굴을 쳐다본 놈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선실 구석을 가리킨다.

“낚시 가방?”

“예, 예에. 다 드릴 테니 제발 살려주십쇼!”

낚시 가방을 뒤지자 안에서 100달러 뭉치들이 나왔다. 눈대중으로 헤아려보니 대충 천 장은 넘어 보였다. 일개 해적이 가지고 다니기에는 과한 금액.

사연이 있는 돈인 게 뻔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돌아가자.”

사이드킥들이 내 결정에 의아해하기는 해도 군말 없이 나포한 해적선과 타고 온 배를 항구 쪽으로 돌렸다.

그동안 나는 아무도 없는 선실에서 금고에 돈을 꽉 채워 넣고 다시 닫았다.

선착장에 도착해 내릴 때쯤. 스컬 파이럿츠가 토벌되었다는 알림 메시지가 떴다.

【스컬 파이러츠 토벌 성공!】

【점수 획득 현황】

【피스풀 라이프 사무소, 로맨. 비밀 금고 확보. +3000】

【피스풀 라이프 사무소, 람. 까미움 포획. +5000】

【글로리 펀치, 델로아. 크라켄 처치. +3000】

람은 퀸의 배를 얻어타고 돌아왔다. 그는 내 손에 있는 금고를 보곤 혀를 차더니.

“간발의 차이였구먼.”

아니, 한참 빨랐는데? 라고 받아치기에는 내 지금 외형이 너무 중후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킁.”

그러고는 내 앞에 꽁꽁 묶인 까미움을 내려놓곤 가버린다. 이번 의뢰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볼 일 없다고 미리 언질을 줘서인지. 산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자이젝, 기스. 이것들 시장에게 넘기고 사무소로 복귀해.”

“예!”

기절한 까미움과 내용물이 바꿔치기 된 금고를 맡긴 나는 아까부터 멍한 표정으로 바다를 노려보는 퀸에게 다가갔다.

내가 접근하자 글로리 펀치 소속의 사이드킥들이 막아선다.

“…로맨?”

퀸이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나를 노려보며 좌우로 갈라져 길을 내준다.

교감을 따라 한 듯한 회색 머리칼을 가진 중년 여인의 모습. 가까이서 본 퀸의 얼굴은 몹시 슬퍼 보였다.

바로 옆에 서서 가만히 기다리자 입술을 우물거리던 퀸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델로아가…, 죽었어요.”

델로아는 퀸이 처음 고용한 사이드킥이다. 게다가 오늘 크라켄을 처치한 히어로이기도 하고. …꽤 충격이겠어.

“그랬나.”

경험상. 가까웠던 이를 잃었을 때는 그 어떤 말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본인이 시간의 힘에 기대어 이겨낼 수밖에 없다.

델로아와 쌓은 추억과 현장에서 느낀 무력한 자신. 그리고 갱의 죽음과 지인의 죽음에 관한 고찰까지. 퀸은 하소연하듯 길게 이야기를 이었고 나는 묵묵히 들었다.

“잊지 않으려고요. 저는 델로아의 죽음을 품고 살아갈 거예요.”

그것은 결심이자 포부였다.

누군가의 죽음은 가슴 한쪽에 영원히 상처로 남아 아무리 용한 약을 쓰고 보듬는다 한들 결코 낫지 않는다. 그저 퇴색되는 기억과 익숙함에 고통이 무뎌질 뿐.

잊으라 하고 싶으나 그리되지 않음을 알기에.

“그래, 너라면 잘 해낼 거다.”

선택을 존중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 *

며칠 뒤, 월요일.

우리는 히어로 매니저 강의가 끝나고 아직 여운이 남은 상태로 같은 장소에 모였다.

아이들끼리 소란을 떨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빨간 정장을 입은 교감이 에어 보드를 타고 도착했다.

“각자 나와서 배운 점을 말해보세요. 유치하다고요? 아니요, 생각을 언어화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습관만 봐도 앞으로 어떤 히어로가 될지 알 수 있을 정도지요.”

세계 최고의 간섭계 각성자가 하는 장담이니 말에 실리는 무게감이 남달랐다.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서로 눈치를 보며 순번을 미룰 때, 내가 손을 들었다.

“먼저 하죠.”

“남만혁 학생에겐 늘 도움을 받는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면 보급 좀 자주 주세요. 드론 안 온 지가 몇 주짼지 모르겠네요.”

교감이 무어라 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소감 발표를 시작했다.

“자! 나는 소감이라고 해 봐야 별거 없어. 일반 각성자 중에 히어로보다 나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과 사람이 생각보다 쉽게 죽는다는 거 정도?”

잠깐 다른 이야기인데. 나를 제외하고 헬로우 아일랜드가 현존하는 섬이라 의심했던 학생은 둘이다.

뭔가 께름칙하다며 지도를 살피던 트레이시와 델로아의 죽음을 곁에서 목격한 퀸.

두 사람에겐 히어로 매니저 강의가 끝나고 사실을 알렸다. 당시 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트레이시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질문.”

도수정이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공개된 정보에 의하면 너는 처음에 ‘군단의 심장’이라는 특성을 습득했던데. 의도한 거야?”

교감은 히어로 매니저가 끝난 당일 강의 게시판에 각 학생이 선택한 스킬과 영입한 히어로의 프로필을 참고하라며 공개했다.

“본래는 히어로의 상태창을 보려던 거였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일반인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히어로 오디션을 연 거고?”

“그것도 기여를 하긴 했는데 히어로 오디션을 한 건, 다른 이유지.”

19명의 눈과 귀가 집중되는 게 느껴진다.

“괘씸해서.”

“어?”

“내가 유망한 각성자들 찾아가서 우리 사무소로 와달라고 권유했거든? 근데 들은 체도 안 하잖아.”

열 받게.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오디션을 열었어? 대광장에서 그런 연설까지 해가면서?”

“갑자기 오디션 한다고 해봐야 이미 일상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지원할 리 없으니까. 분위기부터 만들어야지.”

정치 용어로는 이걸 흔들기라고 한다.

“…너답다.”

어째 자포자기한 듯한 도수정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뒤의 나무에 등을 기댄다.

이쯤 하면 충분한 거 같아 내 자리로 돌아가려는 때에.

“참, 만혁 학생. 비밀 금고의 내용물은 어떻게 됐지요?”

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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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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