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히어로 대전
“내용물요? 모르겠습니다. 금고는 얻자마자 자이젝에게 넘겨서요. 시장이 알지 않을까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다음은 자칼 학생. 나오세요.”
교감의 언행에서 알면서도 넘기겠다는 뉘앙스가 묻어나온다. 살짝 찔리긴 하는데, 어쩔 수 없다. 리쳇이 생각보다 큰 건을 물었거든.
-스타 링크와 마마존. 둘 중 하나는 우리가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둘 다 물류 회사로 검색하면 상위 10위에 항상 들어가는 기업으로, 매년 조 단위 적자를 감수하며 운영 중인 곳이다.
워낙 벌여 놓은 사업이 많아서 시장을 장악하지 않는 이상 흑자 전환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기에 해적을 동원해 경쟁자를 쳐내려 했던 것.
“금일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정상적으로 빌런 격파 강의가 진행되니 이 점 유의하시고 히어로 매니저에서의 경험을 잘 살리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발표자는 그레이스 멜론이었다. 녀석의 사연과 진심이 전해졌는지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비장하다.
나는 애들이 서로 으쌰으쌰하는 광경을 눈에 담다 컨테이너로 돌아와 현재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 받았다.
-스타 링크는 조금만 더 압박하면 무너질 거야. 그런데.
아, 참고로 해적에게 입수한 비리 장부를 이쪽으로 넘기는 게 골치였는데, 의외로 아이리가 도움이 되었다.
소환 학파에서 학대당하던 중 물과 바람의 정령, 실디네라는 혼종과 계약했단다.
들어보니까 이쪽 스토리도 꽤 스펙터클 하더라. 아무튼 실디네가 대양을 가로질러 내 손에 장부를 쥐여줬다.
-마마존이랑은 같이 일 못 하니까, 선택하라네.
“선택.”
하.
이래서 기업 놈들이랑은 말을 섞으면 안 된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하는 꼴이 아주 가관이잖은가.
“마마존은?”
-그쪽은 하라는 대로 하겠다네.
“스타 링크 쪽 정보 전부 풀어. 마마존은 덮고.”
-오케이.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스타 링크가 해적에게 청부를 해 경쟁사인 마마존에 큰 피해를 줬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나날이 하락하는 주가와 빚더미들. 미국 최대 법률사무소와 정치인에게 선을 대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다크 넥서스의 이름으로 멕시코 대통령에게 압박을 요청했다.
확실히 국가를 대표하는 정치인의 발언은 파급력이 상당하더라. 그 대가로 언데드의 파견 숫자를 대폭 늘려야 했지만.
[세계 최대 물류 회사, 스타 링크. 도산!]
[드러난 빚, 40억 달러!]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세계 주요 포털마다 스타 링크의 이름이 내걸렸다.
기사는 하나의 기업이 세상에 얼마나 악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논문 같은 내용이었고 누구 하나 변호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마마존, 주가 상승. 흑자 전환 신호탄?]
그러는 동안 마마존은 그동안 억눌려 왔던 것을 폭발시키듯 급속도로 성장했다. 엄밀히는 이제 경쟁사 눈치를 안 보고 시장을 점유하기 시작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자기가 살아 있는 한, 밀키 마이닝의 지시에 따르겠다네.
지금 마마존 회장이 50대 초반이니 적어도 반세기 정도는 더 살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IK 카라반도 엮어서 좀 키워.”
카라반 측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진 않았으나 앞으로 발생할 노동용 언데드의 수요를 생각해보면, 지금부터 토대를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
-안 그래도 IK 쪽이랑 논의 중이야.
“스타 링크 인사들은?”
회장은 아예 세속에 마음이 떠났는지 보유한 모든 걸 팔아 보석금을 내곤 산 중으로 들어갔다.
-성과 위주로 뽑았고 능력은 있어도 사내 정치하는 놈들은 전부 걸렀어.
떡 본 김에 장사지낸다고. 리쳇이 스타 링크의 인재를 밀키 마이닝으로 영입해와서 지금은 사원이 몇 배로 증가한 상태다.
“잘했네.”
-보스. 신설된 영업 3팀이 뭘 팔아야 하냐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이락시스트로 만들어진 장식품이 유행했으나 지금은 시들한 상황.
적당한 아이템이 없나 싶어 미래의 지식을 떠올려보는 그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보낸 이:크림슨 래빗]
[토리 아저씨 도움을 받아서 만들어봤어. 휴대용 바디아머야. 어때?]
[영상 첨부]
영상을 틀자 머쓱한 얼굴의 머신팩토리가 헛기침하더니 착용 중인 크로스백을 손으로 강조한다.
직후, 크림슨 래빗이 화로에 들어가 있던 쇠망치를 집게로 집어 머신팩토리에게 던졌다.
여기서부터 영상은 느리게 재생되었는데, 날아오는 망치를 본 머신팩토리가 움찔했고 그때 크로스백이 쇳조각들로 변해 겹겹이 쌓여 그의 반신을 덮었다.
쾅!
맞은 부위에서부터 파문이 일며
머신팩토리는 뒤로 밀리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저 조각들이 충격을 흡수하는 건가.”
이런 기술은 처음 본다. 저 두 사람이 만났기에 생긴 케미겠지.
“좋아 보이네, 그래도 일단 내부 테스트 좀 해보자.”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밀키 마이닝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 바디아머를 입히라고 지시했다.
광산에선 매일 크고 작은 사고가 생기는데, 저 크로스백을 휴대시키고 나서는 인명 피해가 현격히 줄었다.
사내의 중진들도 이건 먹히겠다며 내 지시가 없었음에도 자발적으로 마케팅 기획에 들어가더라.
리쳇도 바디아머를 파는 것에 긍정적이어서,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진행시켜.”
가격은 1만 달러. 여벌의 목숨이라 생각하면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이었으나 일반인 기준 고가임은 틀림없었기에 첫 달 판매량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업, 마케팅팀의 활약에 더해 실사용자의 추천이 이어지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호평 일색이야.
“잘 만들긴 했지.”
-빨간 토끼가 매력 포인트라는 말도 많고.
저 기계로 된 붉은 토끼는 크림슨 래빗과 머신팩토리를 상징하는 심볼이다. 발동 시 사용자가 원하는 부분에 토끼 심볼이 오게 하는 것도 가능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모양.
“그런데 VZ가 벌써 만들어졌다며.”
-맞아. 그 인간. 돈을 싹 연구 자재 사는 데 투자했어.
그러라고 투자한 게 맞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기간을 당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나중에 따로 알아보니 히어로 매니지 강의에 사용된 캡슐에도 VZ기술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비밀리에 연구팀 신설하고 UVZ 만들자.”
VZ가 개발된 이상 그블린이 아니더라도 이를 악용하는 빌런은 반드시 출현한다. 그때를 대비해서 UVZ의 개발은 필수.
내가 아는 거라곤 회귀전 UVZ 개발자가 자랑하듯 떠들어대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게 전부라 실제로 길을 찾아갈 사람이 필요하다.
리쳇은 VZ를 개발한 연구자들을 고용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왔고 나는 수락했다.
-쉽지 않을 거야. 그 사람, 지금 가장 주목받는 과학자거든.
“그렇겠지.”
영입하는 과정에서 길버트 슈타인 박사가 핵심 인사였다는 걸 알게 되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는데.
-하겠대.
제안하자마자 수락했다 한다.
“왜?”
-투자자라는 걸 밝혔더니 울던데.
이쪽도 꽤 사연이 길다. 요약하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받은 투자 덕에 지금의 결과가 있었다. 자식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아버지가 됐다. 정말 고맙다.’ 정도.
“어…, 잘 해결됐으면 됐지.”
* * *
밀키 마이닝의 규모가 두 달 사이 몇 배로 몸집을 불어났을 때. 모두가 바랐으나 나는 바라지 않았던, 10월의 끝자락.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남 교수, 네가 마지막이야.”
도수정이 교탁에서 나를 가리킨다. 전방의 홀로 보드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1-F 축제 컨셉 회의]
[카페 - 도수정, 리얼블루]
[총기점 - 소구경]
[코인 세탁소 - 클린에어]
[드라큘라 캐슬 - 블리딩블러드]
[슬럼가에서 제사 지내기 - 곽재우]
[노래자랑 - 칸탄테]
[보물찾기 - 트레이시 그웬]
[가상 현실에서 영화 보기 - 버추얼박스]
[리얼 방 탈출, 게임을 시작하지. - 마인 트래퍼]
카페 말고는 노골적으로 본인 개성과 연관된 컨셉들.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럴 거면 차라리 천하제일무투대회를 여는 게 낫지 않냐?”
[천하제일무투대회 - 남만혁]
도수정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홀로 보드에 내 말을 옮겨 적었고 투표가 시작됐다.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보고 있으니 어째 카페를 골랐던 도수정이 천하제일무술대회에 표를 넣고는.
“과반수로 남만혁 학생의 컨셉이 선정됐습니다. 다들 박수. 참, 발안자가 기획부터 진행까지 모두 하는 거 알지? 고생해.”
이 자식들. 왜 말 같지도 않은 컨셉을 적어놨나 했더니 이걸 피하려고 그랬던 거였나.
부정하고 나서기에는 또 애들 분위기가 좋다.
“무투대회? 해보고 싶긴 했어.”
“잘됐네. B반 놈들. 콧대가 실력에 비해 너무 높았는데, 이번 기회에 눌러줘야지.”
“맞, 아. 활잡이만 믿고 나대는 꼴이 역겨, 워.”
“이참에 F반의 저력을 보여주자고.”
잠깐 딴생각을 한 게 이렇게 될 줄이야.
도수정이 자리에 앉자 데커드 교수가 일어나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린다.
“토너먼트 컨셉은 매년 있었으니까, 매뉴얼이 많아. 몇 개 넘겨줄게.”
“…고맙습니다.”
축제 준비 기간인 일주일이 흐르고 초기 컨셉인 천하제일무투대회라는 거창한 문구 대신 간단한 이름을 붙였다.
[히어로 대전]
“괜찮네. 천하제일무투대회는 좀 쓸데없이 길긴 해.”
“맞아. 근데 상품은 뭐야?”
“우승자에겐 MC래빗이 제작한 피스아머를 줄 생각이다.”
MC래빗은 머신팩토리와 크림슨 래빗을 통칭하는 단어고 피스아머는 쇳조각 갑옷의 이름이다. 회사 창고에서 하나 가져왔다.
오~
“우승 상금으로 피스아머를? 이거 어디서 구했어.”
도수정이 벌떡 일어나 피스아머의 출처를 물었고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크림슨 래빗이랑 친구라, 몇 개 받았다.”
“큭, 어느 틈에 선배랑!”
MC래빗 중 한 명이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를 자퇴했다는 사실은 이제 와선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너희도 생각 있으면 참가해.”
“너는?”
소구경이 조심스레 물었고 다들 귀가 움찔거린다.
“주최자가 끼면 되나.”
“참가 안 한다는 거지?”
“어.”
후우.
저렇게까지 안도할 일인가.
격동의 일주일이 흐르고 마침내 축제가 시작되었다.
나는 아침부터 아카데미를 방문한 사람들로 인해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한 교내를 지나 리얼블루가 힘들게 따낸 대수련장으로 향했다.
태릉촌의 훈련장처럼 넓은 공간에 경기장은 중앙에 크게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주변은 히어로 코스튬이나 도복, 일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스트레칭을 하는 중이었고.
“왔어?”
내 그림자를 덮으며 등장하는 소녀.
“마가렛?”
“안녕, 들었지? 그레이스는 못 와.”
A반이 빵집 컨셉을 잡아서 빵 굽느라 대회 참가는 어렵겠다는 퀸의 문자를 새벽에 받았었다.
“너는 안 바쁘냐.”
“우리는 자기가 맡은 일만 하면 되거든. 반죽 잽싸게 해주고 나왔지.”
“여기 참가하려고?”
“응. 상품이 탐나서. 저거 돈 있어도 못 구하는 거잖아.”
머신팩토리의 특성을 살려서 찍어내는 중이긴 한데, 현재는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실정이다.
“열심히 해봐.”
“너 참가 안 하는 거 맞지?”
“그래.”
“휴.”
왜 오는 사람마다 이걸 묻는지 모르겠다. 아예 셔츠에 참가 안 함이라고 써 붙여 놓을까.
나와 마가렛의 대화를 들은 주변 학생들이 서둘러 접수대로 몰려간다.
거참. 내가 그렇게 무섭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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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