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이그나이트
남만혁이 주최하는 히어로 대전이 개최된 시각, 교감실에서는 헬로우 아일랜드에 대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히어로 매니저 운영팀장이자 헬로우 아일랜드 시장, 나우영은 교감의 지시로 섬에 잔류하길 원하는 이들을 조사해 보고했다.
“27,890명에게서 잔류를 요청받았습니다.”
“예상보다 많구먼.”
교감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는 노인. 그랜드 위저드 매저드. 마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
나우영은 전설적인 두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선배의 제자가 활약한 덕이겠지요.”
“허허, 부정하지 않겠네. …그런데 이 계획 말이네, 진심인가?”
매저드가 앞에 놓인 홀로 보드에 떠오르는 글자를 보곤 놀라며 묻는다.
[히어로 시티 프로젝트]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입니다.”
어느 도시건 명물이 존재한다. 특산품은 물론이고 동물, 건축물, 물건, 정치인까지. 프리실라 루드라는 헬로우 아일랜드를 ‘히어로’ 명물 도시로 성장시킬 계획이었다.
오래전부터 생각은 해왔으나 평생 입 밖에 꺼낼 일이 없을 이야기라 여겼다.
그러나 남만혁의 연설과 히어로 오디션으로 인해 섬의 주민들의 사고가 격변했고, 시뮬레이션을 굴려본 결과. 기적처럼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자네는 욕심이 많아.”
매저드는 후배의 프로젝트를 도우며 성장하는 아이들을 눈으로 보아왔다.
당장 어제 진행된 빌런 격파전만 해도 그 성장세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무려 10전 전승이었던 남만혁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긴 것이다.
당사자가 대충한 것도 아니고 마법을 제외한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전력투구했음에도 A반에게 승리를 내어줬다.
원인은 남만혁의 특성을 간파하고 상성이 좋은 학생이 그를 맡은 것.
예를 들어 남만혁이 언데드를 소환하면 내구 특성에 집중한 그레이스 멜론이 방어하고 다른 학생이 요격하는 식이었다.
드디어 정상적인 강의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움을 주고받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진 점,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힘, 그리고 사무소의 리더가 되어 히어로를 고용하고 부려본 경험이 그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는 머지않은 미래에 겪게 될 히어로 생활에 좋은 양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단기간에 해내고도 만족하지 않은 채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교감의 모습에 매저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렇기에.
“자중하게.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건으로 모은 이목이 너무 많아. 당분간은 내실을 다지는 게 나을걸세.”
“저도 매저드 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미국과 멕시코 측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명분을 주면 어찌 될지….”
비인도주의적인 운영이었던지라 하나만 덜미가 잡혀도 골치 아파지는 건 사실이다.
히어로 매니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의 조언이었기에 프리실라 루드라는 자신이 조급했음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신입생이 들어올 시기에 다시 의논해보도록 하지요.”
교감이 위성 뷰로 헬로우 아일랜드를 비추는 홀로 보드를 끄는 찰나, 대광장에 세워져 있던 20개의 휴머노이드 중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 * *
“승자는!”
결승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경기장 위에서 내 팔을 들어 올려 관중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데커드.
“남만혁!”
우와아아!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빌어먹을. 안 아픈 곳이 없다. 전신 타박상에 화상, 머리칼도 싹 날아갔다.
데커드는 내 머리에 눈을 두고는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는다.
이 썩을 놈이?
“기분 더러우니까 말 걸지 마쇼.”
전광판에 클로즈업된 내 머리. 그걸 보고 웃는 관객들.
하하!
“너희도 웃지 마.”
와하핫!
다 나가. X발 놈들.
* * *
1시간 전.
“축하합니다. 우승자는 스위프트입니다. 상품을 받아 가세요.”
이변은 없었다. 마가렛은 열심히 수련하고 철저히 몸 관리를 해왔으나 스위프트 또한 그 이상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철저하게 거리를 두며 마가렛의 궁극기라 할 수 있는 스택 펀치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 스위프트의 승리 요인이었다.
저 성가신 특성을 가지고 영리하게 굴었으니 상대하기가 평소보다 몇 배는 버거웠을 것이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고 울음을 참는 마가렛과 그런 녀석을 바라보는 스위프트.
나는 둘을 번갈아 보다 우승 상품을 전해주기 위해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축하한다.”
그냥 주기는 뭣해서 나름 고급스럽게 포장한 상자를 녀석에게 건넸다. 스위프트는 안에 든 크로스백형 피스아머를 살피고는 다시 포장하더니 마가렛에게 다가가 무심히 상자를 내민다.
“내겐 쓸모없는 물건이다.”
약간의 정적 후, 경기장 내에 울리는 묘한 탄성.
오~
“나 준다고?”
“그래, 그건 네게 어울린다. 나는 자연체로—”
“고마워!”
거대화가 아직 풀리지 않아 3m에 달하는 마가렛이 스위프트를 끌어안자 녀석의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스위프트는 흔들리는 눈으로 바로 뒤에 있던 내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 재밌는 상황에 초를 칠 생각은 없었기에 슥, 외면하는 그때.
쾅!
대수련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1학년 최강자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왔다!”
타오르는 듯한, 아니 진짜 타고 있네. 뭐야 저거.
“이그나이트.”
마가렛이 문소리에 놀란 틈을 타 재빨리 품에서 벗어난 스위프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아?”
“알래스카 출신. 특성은 전신발화.”
알래스카며 추운 지역 아닌가? 그런 곳에서 화염 각성자라. 난방이 어렵던 고대에 태어났다면 신으로 추앙받았겠어.
“그리고 최근 자연체를 터득했다지.”
“그렇구만. 고생해라.”
나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였기에 이곳으로 오는 빨간 머리를 무시하고 경기장을 내려가는데.
텁.
놈이 내 손목을 잡는다.
“미라클 남. 나와 싸워!”
통역기를 쓰지 않은 어설픈 한국말.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나는 여기 주최자고. 이쪽의 스위프트가 우승자다. 쟤랑 붙어.”
그리 말하고 팔을 빼려 했으나 더 꽉 움켜쥐는 놈.
“안다. 스위프트 강하다. 하지만 네가 더 강하다.”
“누가 그래. 나 스위프트 못 이겨.”
“거짓말. 여기 오는 동안 1학년 최강이 누군지 물으니 다 네 이름 말했다. 남만혁.”
독종이네 이거.
짜증을 담아 팔을 홱 빼자 그제야 손목을 놓는 빨간 머리.
“일 없다.”
“겁쟁이. 도망치면 대한민국에 있는 네 집 불태운다.”
해제해두었던 리쳇을 구현하는 데 0.2초.
하나 보육원 식구들 안전 확인하는 데 0.3초.
이 건방진 X끼 인과관계 조사하는 데 1.5초.
도합 2초 만에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블러핑이라는 걸 간파했으나 간단히 넘길 만한 발언은 아니었다.
“한국 문화 중에 말이다. 선이라는 게 있거든? 이걸 넘으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해줘.”
“역시 전투 민족! 좋다, 나는 선 넘었나?”
“그래, 넘었지.”
바깥에서 온 기자를 비롯해 눈이 많다. 마법과 언데드는 사용하기가 어렵다. 근래 들어 언데드의 이미지가 바뀌고는 있으나 아직은 꺼림칙하게 느끼는 것도 사실. 하여,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무력 수단을 꺼냈다.
찰싹!
그날 이후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줄리아나 존스 모험 키트의 채찍, ‘찰싹이’를 꺼내 들었다.
“그게 네 무기? 먼저 공격해라! 오!”
말하기 전에 이미 채찍을 휘둘러 놈의 팔을 감았다. 그리고 당겨서 중심을 잃게 할 생각이었으나.
화륵.
단숨에 불타 잿가루가 된 채찍.
“끝인가? 내 차례다. 버닝 대쉬! 버닝 펀치!”
어디 만화라도 보고 온 건가. 기술명을 일일이 입으로 외치면서 싸우는 놈은 또 오랜만이네.
우리 애들이 학기 초에 저랬었고 대련에서 호되게 당한 뒤로는 잘 외치지 않게 됐다.
하는 행동을 보니 꽤 싸움을 해왔을 텐데도 이러는 거 보면, 셋 중 하나다. 외치면 강해지는 특성이거나, 페이크거나, 멍청하거나.
나는 두 번째에 무게를 뒀다. 한국말을 어눌하게 하는 것부터가 기만이 들어간 연기라고 본다.
내 복부를 향해 다가오는 주먹은 푸른색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저기에 닿으면 죽을 것이라 직감, 곧장 뒤로 물러나며 미르토스 해변의 바다를 부분 구현했다.
치이익.
들리진 않았으나 놈의 주먹 근처에 엄청난 양의 기포가 생기는 거로 봐선 저지하는 데 성공—
컥.
기포들 사이로 튀어나온 붉은 주먹이 내 명치에 꽂힌다.
수중이라 느려졌음에도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놈. 나를 죽일 셈이다.’
부분 구현을 반복해 놈을 물에 빠트려 놓고 호흡을 고른 뒤 생각을 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언데드 클럽을 총동원하고 남는 마나로 서몬 애시드 좀비까지 소환해 총력전에 들어가려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구현해둔 물이 모조리 증발. 경기장 천장에 운무를 이룬다.
경기장은 외부와 격리되어 있다. 공간이 상대적으로 협소해서 그런지 증발한 수증기는 천장에 구름의 형태로 뭉쳤고 이내 물방울을 지상에 뿌려댔다.
그리고 빗줄기 너머로 전신이 푸르게 타오르는 인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걸 맞고도 서 있는 건 네가 처음이야!”
입에서 증기를 뿜어내며 환희에 찬 붉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는 이그나이트.
“나 아니었으면 죽었다.”
“거의 그랬지!”
해맑게 웃으며 답하는 빨간 머리. 저거 완전 사이코패스 아냐. 저게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면, 빌런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호텔 좋아하나?”
“아니. 거긴 재미없어.”
“싫어도 사는 게 또 인생의 맛이지. 곧 즐기게 될 거다.”
정신 검사 좀 해보고 빌텔에 넣어둬야겠다. 리쳇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직 살인 전과도 없고 나이도 어린 편이니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면 교화가 좀 되지 않을까 싶다.
안개? 바닥을 때리고 튀어 오른 물이 증발해서 생긴 건가. …잘됐네.
“미르토스.”
“소용없어!”
2톤에 달하는 물을 빨간 머리 위에 구현해 떨어지게 했음에도 놈은 자연체로 변해 모조리 기화시켜버렸다.
숙련도를 올린 덕에 할 수 있게 된 나름의 필살기가 허무하게 사라졌으나 노린 바는 따로 있었기에 쓰린 속을 달래며 회피와 해변 구현에 집중했다.
“벌레처럼 도망치지 말고 싸워! 네 돌보는 집 태우기 전에!”
일관성이 있는 개X끼네 저거.
마침 안개가 충분히 껴 팔을 뻗으면 손가락 끝이 잘 보이지 않는 수준이 됐다.
“여기다.”
먼저 경기장 중앙으로 놈을 유인하자.
“받아라!”
안개마저 지워내며 내게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빨간 머리.
‘포이즌, 영역 전개. 서몬 애시드 좀비.’
영역을 전개하는 이상 언데드 클럽은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될 듯하여 뺐다.
“버닝 스트레이트!”
액체 상태의 좀비는 해변 구현과 다름없이 놈에게 닿기 전에 증발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했다. 문제없다. 노림수는 이게 끝이 아니니까.
“윽. 나, 왜 어지러워? 무슨 짓 했어!”
내 영역에 부여된 마비독이다. 마법에 무지한 이가 내 영역에 들어온 이상 이걸 회피할 방법은 없다.
빨간 머리는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으나 이런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놈의 등을 발로 차 넘어트린 뒤 뒷머리를 눌러 땅에 처박았다.
“얌전히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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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