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90화 (90/201)

<90화>

멜론 빵

“으아아!”

독에 당한 덕인지 자연체로 변하지는 못했으나 힘이 마가렛 못지않은 장사였다.

스치기만 해도 멍들 지경이라 놈이 기절할 때까지 붙잡고 있느라 힘들었다.

발작 같은 버둥거림이 끝났을 무렵, 나는 전신 타박상과 피부 화상, 그리고 머리카락이 소멸한 상태였다.

경기장 보호막이 풀리자 안개와 구름은 수련장 내 환경 조절기에 의해 금방 사라졌다.

이내 데커드가 관객과 한통속이 되어 나를 놀리고는.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의 토너먼트는 대대로 지명 방어전이 있어 왔습니다. 대견하게도 오늘은 남만혁 학생이 아카데미의 명예를 지켜줬군요. 안개 속에서 접전을 벌인 두 학생에게 다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데커드가 가져다준 매뉴얼 끝자락에 지명과 방어에 관한 내용이 쓰여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아무튼 쓸데없이 내 시간을 뺏긴 히어로 대전은 이렇게 끝났다. 이후 혼자서 기획과 진행까지 맡았다는 이유로 남은 축제 기간에 다른 의무적인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교감의 문자를 받았다.

아, 히어로 대전 뒷정리는 도수정을 필두로 한 F반이 자처해서 맡았단다. 자식들, 그래도 양심은 있네.

“남만혁 학생. 이그나이트 학생과 함께 양호실에 가서 치료받으세요.”

데커드의 말대로 나도 치료가 필요했기에 빨간 머리를 들것에 실어 나르는 의료지원팀을 따라 양호실에 왔다.

슬쩍 이그나이트의 몸에 손을 대 독을 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로 옮겨주세요.”

여자 의사의 지시에 따라 빨간 머리를 침상 위로 옮겼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이 의사는 해독과 정화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기본적인 처치야 할 수 있겠지만…, 불로 지짐당한 내 모공과 머리칼을 재생할 능력은 없다.

“아.”

양호실을 둘러보다 명찰에 출장 카드가 꽂힌 캐비넷을 발견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두피 재생은 어렵겠어요. 힐 후배가 복귀하면 다시 오세요.”

생각났다. 큐링 힐, 지금 마를린 베이커에게 가 있다. 그 말인, 즉.

“이러고 몇 달이나 살아야 한다고?”

분명 내 말을 들었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회피하는 사람들. 여기서 버티고 있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소독만 받고 나왔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후드를 눌러쓰고 아카데미 곳곳을 돌아다녔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래도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 겪는 축제인데 기억에 좀 새겨두자 싶어서—

“오?”

[1-A 엘리트 베이커리]

[2-A 울트라 베이커리]

[3-A 얼티메이트 베이커리]

동상문 인근에 자리 잡은 세 개의 빵집은 조립식 자재로 근사하게 지어져 있었다. 역시 아카데미에서 지원하는 클래스답다고 해야 하나.

전원 빵을 파는 걸 보니, 이것도 아카데미의 전통인 듯하다.

[크루아상 / 7$]

3학년 빵집의 줄이 가장 길기에 바깥에서 진열장을 들여다봤더니 빵 가격이 어마무시하다.

“저 돈이면 차라리 국밥을 먹고 말지.”

2학년은 6달러. 1학년은 5달러였다.

“남 교수!”

그냥 지나가려던 나를 케롤라인 칠링이 불러세운다. 반갑게 팔을 흔들기에 고갯짓으로 인사에 답하고 다가가 물었다.

“다 이렇게 비싸냐?”

“응? 비싼 빵은 없는데?”

큭! 부자 놈들이란.

“저건 얼만데.”

점포 구석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빵. 겉이 거뭇거뭇한 게 좀 태운 모양.

저건 싸겠지.

어차피 맛만 볼 생각이었으므로 탄 부분은 군고구마 껍질 벗기듯 떼어 내면 그만이다.

“어, 저건.”

“흠결이 있는 상품인데, 당연히 저렴하겠지?”

“…그, 응.”

한참 머뭇대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케롤라인.

“얼만데.”

“그냥 가져가.”

“뭐?”

“실패작이거든. 공짜로 줄게.”

뒤에 조그맣게 ‘버리려고 했던 거고.’ 라며 말을 덧붙인다.

멀쩡한 걸 왜 버려. 곱게 포장도 해놨구만.

구슬 형태인 엄지 크기의 빵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탄 맛이 강하긴 해도 빵 속의 슈크림에서, 만든 사람의 정성이 확 느껴졌다.

딱 적당 정도의 점성과 당분, 그리고 약간의 허브향. 겉이 타서 딱딱해지지만 않았어도 상당한 호평을 받았을 거다.

남은 것들은 탄 부분을 떼고 먹었고 역시 예상대로 훌륭한 맛을 자아냈다.

쟁반에 담긴 걸 다 먹고 10달러를 지갑에서 꺼내 케롤라인에게 건넸다.

“왜?”

“맛있었다고 전해줘.”

실패한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이 정도면 약간의 용기만 북돋아 줘도 충분히 본연의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자 묘한 웃음을 짓던 케롤라인이 다른 손님에게 대하듯, 크게 소리친다.

“구매 감사합니다!”

“근데, 이 사람이 만든 거 더 없냐? 슈크림 볼 아니더라도.”

“있지!”

그러고는 점포 내의 바구니들을 돌아다니며 묘하게 못생긴 빵들을 주워 담는다.

이거 재고 처리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으나 일단 군말 없이 사서 나왔다. 불평은 먹고 나서 해도 되니까.

컨테이너로 돌아와 번, 퓨즈를 불러 같이 먹었는데.

“맛있어!”

“으음. 별미로군요.”

그 사람이 만든 빵이 맞았다. 다음에 가면 누군지 물어봐야겠어. 히어로 사무소 취업에 실패해도 빵집을 열면 분명 대박이 날 인재니, 미리 약을 쳐놔야지.

* * *

“축하해.”

“뭐가요?”

“네 빵. 다 팔렸어.”

케롤라인 칠링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레이스 멜론 주변을 맴돈다.

“정말요?”

“응. 한 사람이 다 사 갔고. 탄 슈크림 볼을 맛있게 먹던데?”

“그건 좀…, 걱정되네요. 아니, 잠깐만요. 버린 거 아니었어요?”

“헤헤. 어쩔 수 없었어. 자.”

남만혁이 응원차 주고 간 10달러가 케롤라인을 통해 그레이스의 손에 쥐어졌다.

“빵집을 해도 성공할 맛이라더라. 하긴, 외형은 좀 그래도 맛은 네가 일등이었으니까.”

가게 오픈 직전, 선배들이 기습 방문해 점검을 한다는 명목으로 빵을 종류별로 먹고는 점수를 매기고 갔다.

맛으로만 따지면 그레이스 멜론이 압도적이었으나 미관이 하나같이 추레해 3등으로 격하되었다.

참고로 마가렛과 케롤라인은 동반 꼴찌였고 종합 1등은 의외로 도슨이다.

“고맙네요. 그분.”

“흐흥, 너도 아는 사람인데?”

“네?”

“내가 알기로 둘은 매일 만날걸?”

“누구죠?”

“남 교수.”

“…장난치지 마세요.”

케롤라인 칠링은 얼굴이 붉게 물든 그레이스가 귀여워 좀 더 놀릴까 하다 참았다.

‘남 교수, 화나면 무서우니까.’

안 그래도 오늘 외부 참가자가 남 교수를 도발했다가 실신한 채 실려 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차였다.

킥킥 웃으며 다 구워진 빵을 포장해 들고 나가려는데, 그레이스가 소곤거리듯 물어왔다.

“빵, 선물하면 좋아할까요? 아. 남는, 남는 빵요!”

케롤라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레이스 멜론을 껴안았다.

“아유우~ 네 선물 받고 싫어할 남자가 어딨어!”

그리하여 그레이스 멜론은 남는 시간에 열심히 빵을 만들어 남만혁에게 전했으나 과한 의욕 탓에 겉과 속이 모두 타버렸다.

이를 본 남만혁은 ‘이 정도면 암살 시도 아니냐.’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그 자리에서 모두 먹었다고 한다.

* * *

“문제가 조금 있는 학생이니 잘 돌봐주세요.”

“예?”

“잘 부탁한다!”

대뜸 교감실로 부르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갑자기 빨간 머리 자식을 맡으란다.

“알래스카 정부에서 요청한 사항이에요. 본래 2학기 편입시험 때 도착했어야 하나, 중간에 문제가 생겨 지금 왔다는군요.”

어쩐지, 따로 찾아봐도 없더라니. 교감이 보호하고 있었나.

“이거 분명 말 나올 텐데 괜찮습니까?”

탈락한 아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알래스카는 미국의 지원이 끊긴 이후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한 명의 히어로가 절실한 상황이죠.”

“그건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집니다.”

어떻게든 거절한 명분을 찾아 들이대 봐도 교감의 의지는 확고했다.

“품으세요. 만혁 학생,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교감의 티칭 스타일은 대개 이런 식이다. 해당 학생이 부족하다 싶은 부분과 관련된 과제를 부여한다.

지금의 경우 포용력을 키우라고 맡긴 게 분명하다.

맞다. 나는 내 사람만 품는다. 적이 될 여지가 있거나 그럴 끼가 보이는 놈은 애초부터 거리를 두거나 싹을 자른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야만 하기에 변할 생각은 정말 조금도 없다.

만약 이번 생에 그블린이 침공하지 않고 내가 진짜 히어로를 목표로 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니잖은가.

‘음.…’

하지만 사실 맡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다. 복안도 지금 떠오른 게 있고.

교감은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니 내게 이그나이트를 맡긴다는 한 수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결할 심산일 것이다.

이걸 그냥 받으면 호구지.

“맡을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조만간 께름칙한 사건이 하나 생길 텐데. 모른 척해주십쇼.”

“…그러죠.”

확답을 들은 나는 그대로 이그나이트를 데리고 나와 남산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우리 어디 가는 거? 또 싸우고 싶다.”

지금은 번역기를 사용하는지 어휘가 부드럽다.

“아카데미 삼림관리청.”

“거기는 왜?”

“네 상대가 거기 있으니까.”

“빨리 가자! 와하하!”

웃기는. 너는 X 됐어 인마.

삼림관리청이라는 간판이 달린 오두막 안에 도착해 기다리자 곧 내 연락을 받은 번이 돌아왔다. 흙이 묻은 옷과 장갑을 털어 세탁기에 넣고는.

“오늘치 묘목을 심느라 좀 늦었습니다.”

“뭘, 일 중에 찾아온 내가 잘못이지. 그보다 이 녀석 자연계 각성잔데. 네가 교육 좀 시켜줘야겠다.”

“제가 필요한 거면 화염 쪽의?”

“어.”

당장에라도 덤벼들 듯한 이그나이트를 위아래로 살핀 번이 대놓고 픽 웃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고 이건 말이 통하지 않아도 먹히는 도발이었다.

“웃지 마!”

단숨에 불꽃으로 화해 야수처럼 달려드는 이그나이트. 그러나 번은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무런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버닝 글로브!”

글로브를 낀 것처럼 불룩한 화염이 뭉쳐진 주먹으로 번을 공격. 맹렬한 폭발과 함께 불티가 비산한다.

보글보글.

그때 주변에 생성되는 물공들.

“번 오빠! 훈련은 호수에서 하라니까. 응? 누구야?”

익숙하게 불씨가 될 만한 것들을 정리해나가는 퓨즈. 물을 조작하는 능력에 많이 익숙해진 모양새다.

“이그나이트. 한동안 신세 질 식구.”

“나 오빠 한 명 더 생기는 거야?”

“동생이야.”

“진짜? 와!”

나이는 모르겠다만 하는 행동은 퓨즈보다 못하니 동생이라 하자. 싫으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겠지.

“너. 왜 안 아파?”

의문을 가질 만도 하다. 저 정도 화력을 정면에서 받으면 상반신 가죽은 다 벗겨져야 정상인데 멀쩡하니까.

“간단한 이유다.”

항상 셔츠 앞주머니에 휴대하는 펜 라이트를 손으로 부수는 번. 직후 버닝 글로브의 폭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불길이 치솟아 번을 휘감는다.

“하루의 절반을 이러고 사니까.”

멋은 있는데. 튀는 불똥 잡는 퓨즈도 신경 좀 쓰지 그러냐. 나중에 무슨 소리 들으려고.

“이익, 익! 두고 봐.”

수백 개의 물공을 생성해 휘날리는 불티들을 잡는 퓨즈. 물 조작 숙련도가 높은 이유를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어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혀.”

멍하게 있던 이그나이트가 간신히 한 글자를 뱉는다.

“혀?”

“형님!”

그리고 대뜸 바닥에 드러눕더니 배를 보였다.

뭐야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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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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