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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91화 (91/201)

<91화>

등잔 밑의 흑막

2051년 11월.

현재 헬로우 아일랜드는 외부의 개입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 상황이다.

교감은 미국과 멕시코를 비롯한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견제하려는 국가들과 협상 중이었기에 섬의 관리 감독은 온전히 운영팀의 몫이 되었다.

“나우영 팀장님, 이번에는 6번 휴머노이드가 사라졌습니다.”

“또? 동선은?”

매주 월요일이면 대광장에 세워둔 20개의 휴머노이드 중 하나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같은 개체만 저러면 패턴을 찾아보기라도 하겠는데, 매주 다르니 범인 추적에 진전이 없다.

“전과 같이 히어로 사무소 몇 곳을 들렀다 복귀했습니다.”

히어로 매니저 강의가 끝난 이후 학생이 조직한 히어로 사무소들은 매뉴얼에 따라 이인자 또는 대리인이 맡아 운영되고 있다.

자중하기로 한 교감의 의사에 따라 외부로 파견 나가는 의뢰는 수주할 수 없다.

잔류하기로 한 히어로들은 본격적으로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진행되는 각종 공사에 노동과 능력을 제공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히어로 본연의 업무와 비교하면 만족도가 무척 낮았고, 몇몇 급진적인 히어로들은 시청에 불만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운영팀은 이 문제로 꽤 골머리를 앓았는데, 저 휴머노이드가 사무소를 비롯해 히어로들을 만나고 나서는 그러한 불만이 해소되는 모습을 보곤 더한 불안감을 품게 되었다.

‘대체 뭐라고 했길래.’

이번에 방문한 사무소는 바인딩 트랩. 트래퍼 학생이 차린 사무소였다.

“저기 사이드킥들은 뭐래?”

기이하게도. 해당 휴머노이드가 움직이면 그 기체를 중심으로 100m가량 내의 전자기기가 선택적으로 작동이 정지된다.

녹음기, GPS, CCTV같이 대상을 추적, 도청할 수 있는 모든 기계가 쓸모없어졌고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려면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없었다.

“똑같아요.”

“대가를 제시해도?”

“예, ‘돈으로는 꿈을 살 수 없다.’ 랍니다. 말은 달라도 뜻은 다들 비슷해요.”

휴머노이드가 히어로들에게 뭔가를 제안하였고 당사자는 수락했다. 그게 운영팀이 알 수 있는 전부였다.

“…큰일은 아니어야 할 텐데.”

* * *

-오늘부로 전 사무소 다 돌았어.

“고생했다. 반응은 어때?”

-좋아하지. 소원을 이뤄주겠다는데 누가 싫어할까.

간척지를 좀 늘린다는 가정하에 헬로우 아일랜드의 지리적 이점은 상당하다.

그리고 국가 총수를 상대하는 교감이라는 존재도 훌륭한 방패막이고.

세계 경찰이라 불리는 미국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각성자는 아마 그녀밖에 없지 않을까.

전에 교감실에 잠깐 들렀다가 화상통신 하는 걸 얼핏 들었었다. 유려한 협박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보상을 내걸며 협상하고 있더라.

하여간 내 목적은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는 중립적 무력 집단의 창설이고, 지금까진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다.

설득 방식은 전형적인 희망팔이. 섬으로 자원한 주민과 히어로들은 타인에게 말하기 쉽지 않은 결핍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이를 해결해주는 대가로 다크 넥서스에 소속시켰고 석 달에 걸쳐 내 사람을 늘려왔다.

시작은 친밀도가 높은 버든부터였다. 녀석은 아이라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게 자기 꿈이었다.

“아이라를 도와주신다면, 발바닥을 핥으래도 핥겠습니다.”

“그건 좀. 일단 기다려봐라.”

매저드에게 내 계획과 내막을 알린 뒤 도움을 요청하자 수면의 정령과 계약하면 해결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령탑에서 진행하는 옥션을 통해 수면의 정령을 구매. 실디네에게 들려 보냈고 곧장 계약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아이라의 수면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고 지금은 정상인과 다름없이 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 명씩 꾸준히 영입하다 보니 지금은 히어로 300여 명을 휘하에 들인 상황이다.

“소문은 좀 났나?”

-람처럼 독거 생활하는 히어로들을 제외하면 거의 다 알아.

“운영팀 쪽은 여전히 휴머노이드만 따라다니겠고.”

-응.

월요일마다 움직이게 하는 휴머노이드는 더미다. 우리는 아이라의 정령, 실디네에게 마이크로드론을 들려 보냈고 내 사무소에 배치해놨다.

그걸 통해 소원을 접수 및 해결하고 다크 넥서스로 영입한다.

“참, 마리는 좀 어때?”

현대 과학의 총아.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첨단 기술로 제작된 게 마리다. 헤드라이트 사건 당시 수집한 자료들 덕에 저 휴머노이드들을 해킹할 수 있었다.

-보스의 누나가 케어를 잘해서 문제는 없어. 파츠는 제작 중이니까 내년 초에 교환하면 될 거고.

“아니, 내가 보낸 선물 좋아하냐고.”

-아, 어. 삑삑이 신발 싫어하는 애들은 없잖아.

보육원에서 병아리 신발을 신고 아장대며 돌아다니는 마리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음. 교감 쪽 협상이 끝나가는 느낌이면 과감하게 진행해버려. 들켜도 좋으니까.”

교감이 복귀하기 전에 최대한 히어로들을 영입하고자 한다.

섬을 지배할 무력 집단을 만드는 게 당면 목표다. 최종적으로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며 법과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고.

딩동~

식당 내에 오후 강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엇. 남 교수? 뭐야. 너. 왜 이렇게 음침해졌어?”

트레이시 그웬이 우연히 옆을 지나다 나를 발견하곤 놀란다. 녀석의 말에 창가로 고개를 돌려 내 모습을 살폈다.

붕대가 감긴 머리, 눌러쓴 후드, 광대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밤을 새우면서 헬로우 아일랜드에 집중하다 보니 이런 모습이 됐다.

머리는 며칠 내로 큐링 힐이 휴가차 한국에 들어온다고 하니 그때 치료받으면 된다.

“사색에 잠긴 남자가 멋있긴 하지.”

“뭐?”

“반하지 마라.”

“미, 미친. 야! 거기 서!”

헛소리에는 헛소리로 답하는 게 정석 아니겠는가.

강의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니라며 얼굴을 붉힌 채 쏘아붙이는 트레이시 그웬.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녀석을 내려다보며.

“아니라니, 윽. 왜 그렇게 봐.”

한숨을 쉬고 건성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다 치자.”

으아아!

분통을 터트리며 내 옷깃을 잡으려는 트레이시를 피해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금발 머리 모지리. 안토니오 골드우드가 매저드에게 상담을 받고 있었다.

“스승님. 마나량이 잘 늘지 않습니다.”

“허어. 어디 한번 보세. 으음. 이전에 측정했을 때보다 늘었네만.”

그 늘어난 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매일 아침 삼식이를 동원해 가공할 속도로 성장하는 내 마나를 보면, 저리 조급해할 만도 하다.

“그래도….”

“야. 적당히 찡찡대라. 스승님이 곤란해하시잖아.”

내 발언에 주먹을 움켜쥐는 안토니오였으나 매저드를 곤란하게 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분노를 표출하진 않았다.

“큭,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닐세. 마법사가 보유할 수 있는 최대 마나는 정해져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게. 자네들이라면 금방 도달할걸세.”

“예에.”

말꼬리를 늘리며 고개를 숙이는 안토니오.

“다들 모였으니 저번 주에 내어준 과제를 검사하겠네. 트레이시는 예외이니 이쪽으로 오겠나?”

“넵!”

매저드의 과제는 본인이 전개한 영역에, 보유 마나 절반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잔류시키는 것이었다.

보통은 3할, 재능이 있으면 5할까지 영역에 묶어 둘 수 있다고 한다.

나야 실전 중에 깨달은 바가 적지 않아 언데드 유지용 마나를 제외한 전량을 처음부터 투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챈트 에어리어가 적용되는 모양이고.

“흐읍!”

안토니오가 애를 쓰며 스파크가 이는 영역을 전개해 자기 마나를 불어 넣는다.

아,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

“크윽! 악!”

역시 아니나 다를까 새파랗게 변한 영역이 펑 하고 터져버린다.

“오호, 절반을 넘겼구먼. 잘했네.”

“후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좋단다.

말은 저렇게 해도 멍청하게 웃는 얼굴에서 본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안토니오.

매저드가 내 차례라는 듯 눈짓을 보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나 전량을 투사할 수 있으나 애 기죽을까 봐 나도 5할 즈음에서 영역을 해제했다.

“저도 여기까지입니다.”

“흐음. 알겠네. 둘 다 훌륭히 과제를 수행했으니, 내 작은 선물을 줌세.”

넓은 소매에서 동그란 구슬 세 개를 꺼낸 매저드. 색이 영롱하고 묘하게 익숙한 향이 난다.

“소환 학파에 협조한 정령탑에 가서 받아왔네.”

짧게 뱉은 말이었으나 거기에 함축된 의미는 평범하지 않았다. 얼마 전, 아이라의 정령에 대해 자문하고자 녀석이 당한 실험과정을 매저드에게 알렸었다.

당시 매저드는 말로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으나 기분이 나쁨을 전신의 분위기로 뿜어내고 있어서 조만간 일이 한 번 나겠구나 싶긴 했는데.

“와. 이거 옥션에서 본 적 있어요. 정령알이죠?”

“잘 아는구나. 나 대신 설명해주겠느냐?”

“앗, 네. 내가 아는 것만 말할게. 정령 학파의 고위 마법사들이 단체로 마법진을 연성해 정령계과 거래를 한대. 정령알은 그렇게 구한 거고.”

“맞다. 덧붙이자면, 정령에게 아주 중요한 환경 적응력은 알 내에 있을 때만 형성되기에 야생에 방치하는 게 상식일세.”

정령계의 법칙은 우리 우주와는 궤를 달리한다며 말을 잇는 매저드.

“그걸 주워 다른 세계에 판다는 건, 몹시 몰상식한 행동인 게지. 내가 그들을 잘 다독였으니 당분간 지구에서 정령이 태어날 일은 없을 걸세.”

각자의 책상에 알을 내려둔 매저드가 굳은 표정을 짓자 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미 지구로 넘어온 알은 방치하면 반드시 죽으니, 자네들이 마나를 불어 넣어 살리게나.”

“실패도 하나요?”

아직은 마나 조작 능력이 불안정한 트레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괜찮네. 그 역시 환경으로 여길 테니.”

“아!”

“마나를 주입하게.”

정령은 알의 상태일 때 모든 게 결정된다.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을 버텨내려면, 강하지는 못해도 잡초처럼 끈질겨야 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욕지기를 뱉으며 저항할 수 있는. 그런 강력한 의지가 깃든 정령이 태어나길 바라며 마나를 때려 박았다.

상시 유지하던 언데드 클럽을 해제하고 소모되는 동안 급속 재생되는 마나까지 모조리 긁어다 밀어 넣었다.

“어어.”

트레이시가 이쪽을 보곤 눈을 크게 뜬다.

“야, 터지겠어. 적당히 해.”

녀석의 말대로 아기 주먹만 하던 알은 성인의 머리만큼 부풀어 올랐다. 정말 깨질 것처럼 바자작 소리가 안에서 들리기에 잠시 멈췄더니, 천천히 줄어들어 원래 크기로 돌아간다.

“후웁.”

작아지는 동안 모인 마나를 다시 들이붓자 재차 커진다. 이를 서른 번쯤 반복했더니 알은 처음의 영롱하던 색을 잃고 흑청색의, 그야말로 내 마나를 시각화해놓은 듯한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께름칙하면서도 포근하고 끈적거리면서도 부드러운 감각.

“후우.”

끝났다. 드디어 마나가 완전히 고갈된 것이다. 이 상태면 12시간 정도는 쉬어야 다시 원래 속도로 마나가 차오른다.

“재밌구나.”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내 알을 살피는 매저드.

“음차원 마나를 이렇게까지 머금은 정령은 없었을 게다.”

이유를 물으니 정령계의 왕들은 음속성 정령이 태어나면 반드시 주살한단다.

“왜요?”

“모르네. 알려지지 않은 역사이니 당사자들만 알겠지. 오, 자네의 알도 신비롭구먼. 부름과 전격 속성의 합일이라!”

“좋은 건가요?”

“아무렴! 이처럼 푸르게 빛나는 알은 유례가 없었을 걸세.”

안토니오는 본인의 집안이 뿌리를 두고 있는 소환 학파가 해선 안 될 짓을 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는지, 조금 전부터 시무룩해 있었으나 매저드의 칭찬 한 방에 활짝 웃는다.

특이하게도 트레이시의 알은 마나를 부여하면 할수록 투명해져 갔다. 아마 비가시와 관련된 속성을 머금은 거겠지.

매저드가 이 역시 특별한 현상이라며 알을 잘 잡고 있으라 조언하는 그때.

“꺅!”

쩌적.

“놓치지 말게!”

트레이시의 알이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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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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