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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92화 (92/201)

<92화>

정령 트리오

알에서 튀어나온 건 새의 형상이었는데 희미한 붉은 선이 몸체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호롱?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긴장으로 떨리는 트레이시의 손에 제 몸을 기대는 정령.

“지구의 법칙에 잘 적응했구나. 순한 녀석이야. 이름을 지어주게.”

“…레드레이. 레드레이요.”

호로롱~

마음에 든다는 듯이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돈 투명한 새는 트레이시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갓 태어난 정령은 활동 시간이 짧네. 당분간 그 상태일 테니 잘 보살피게나.”

“넵. 그런데 음식은 아무거나 줘도 되나요?”

“정령 성장에 가장 좋은 건 자네의 마나일세. 그러나 정령도 지성체인지라 한 가지만 섭취하면 질려 할 수 있으니, 종종 같이 식사를 해보게. 친화력 상승에 도움이 될 게야. 함께 놀아주는 것도 잊지 말고.”

어째 반려동물 키우는 느낌인데.

“예!”

트레이시는 무척 기뻐 보였다. 무려 본인의 아버지가 구출되었을 때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스, 스승님! 제 알이!”

“어서 움켜쥐게나!”

매저드가 저리 급박하게 말하는 거로 봐선, 초기 신체 접촉이 무척 중요한 듯하다. 각인 같은 거려나.

“어어. 움직입니다!”

“놓치면 안 되네.”

“으윽.”

트레이시 때와는 달리 알이 쪼개지는 게 아니라 공포 영화의 어떤 장면처럼, 알 안에서 무언가가 요동치듯 껍질 밖으로 꿀렁꿀렁 몸체 일부가 튀어나온다.

그러다 알이 갑자기 회전했고 당황한 안토니오는 알을 놓치고 말았다.

“안 돼!”

비명 같은 절규. 알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사방으로 전격을 뿌려내며 강의실 내를 긁었다.

매저드가 가만히 놔둔 거로 봐서는 이 또한 중요한 의식인 듯하다.

안토니오는 뒤늦게 알을 품에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이미 태어났네. 그 알은 껍질일 뿐이야.”

매저드가 스파크가 이는 허공을 주시하자 강의실 곳곳으로 흩어졌던 전격들이 하나의 점으로 뭉치더니 길쭉한 막대로 변해 부유했다.

“잡게나. 마지막 기회일세. 인내하게.”

진중한 매저드의 음성에 안토니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막대를 잡았다.

끄으으!

감전당한 사람처럼 그대로 굳어버린 안토니오. 막대는 마구잡이로 전기를 뿜어댔다. 일반인이었다면 진작에 통구이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력.

그러나 안토니오는 번개를 다루는 마법사였기에 끝내 버텨냈다.

“허억, 헉. 네 이름은 인드라다.”

파즉.

침을 뱉듯 안토니오의 얼굴에 번갯불을 튀기는 막대.

“큭. 이 자식이.”

막대의 양쪽을 손으로 잡고 무릎으로 올려치는 안토니오. 즈즈즉 하며 일그러지는 게, 고통을 느끼는 듯 보였다.

저 조합 재밌네.

“다행이구먼. 재해가 될 뻔했어. 자, 이걸 정령에게 씌우게.”

개 목줄처럼 생긴 물건을 안토니오에게 건넨 매저드.

“산책할 때는 물론이고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는 절대 벗기면 안 되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강아지 입마개냐고.

안토니오가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인드라에게 목줄을 채우자 반항적인 기세가 크게 줄어들고 택배 상하차를 막 끝낸 노동자처럼 축 늘어졌다.

입마개 성능 확실하네.

“그런데 자네의 알은 얌전하구먼.”

나도 혹시나 해 아까부터 알을 잡고 있었는데 별다른 징조가 없다.

“지금쯤이면 흔들려야 하네만, 정말 아무 느낌이 없나?”

짐작이 가는 게 있긴 하다. 조금 전부터 뾰로롱☆마법 소녀, 블랙 위치로 변하고 싶다는 충동이 엄청나게 생기고 있다.

매저드가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눈빛으로 재촉한다.

하는 수 없이 입고 있던 저지에서 팔을 빼 망토처럼 만들고 카츄에게서 돌법봉을 빼 들었다.

“샤랄라 랄라, 시릴리 릴리.”

“으, 또 그 주문!”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주문만 들으면 질색하는 안토니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돌법봉을 알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부딪치지 않고 안으로 빨려드는 게 아닌가.

“이거 좀 이상한데요.”

돌법봉이 빠지질 않는다. 되려 끌려들어 가는 느낌. 매저드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눈을 초승달로 만들고는.

“다녀오게.”

어깨를 툭 밀치는 매저드. 그로 인해 간신히 유지하던 내 중심이 무너졌고 단숨에 알 속으로 빨려들었다.

“야 이—, 음?”

인류 최강의 마법사고 나발이고 욕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어 입을 벌리던 찰나.

나를 둘러싼 이 어두운 공간이 어째 익숙하다는 걸 깨닫고 중얼거렸다.

“이 마력은.”

“맞아, 나야.”

내게 음차원 마나를 안겨준 낭만이자 19금 넥씨 게임, ‘뾰로롱☆마법 소녀’의 최종 보스.

“블랙 위치.”

그녀로 예상되는 소녀가. 어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어서 와.”

보랏빛 슈트와 망토. 어둠을 뭉쳐 만든 듯한 마법봉. 게임 일러스트 그대로다.

상상으로 구현되었다기엔 너무도 리얼리티가 넘치는 모습에 크게 당황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반갑다.”

“후후, 나도 반가워. 다시 보니 반갑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

“어머, 나를 그렇게 훔쳐봐 놓고는.”

“내가?”

“모른 척은. 뭐, 내숭 떠는 남자도 귀엽긴 하지. 언데드면 더 좋았겠지만.”

설마 낭만으로 고를 당시 잠시 회상한 걸 ‘봤다’라고 표현하는 건가. 그냥 게임의 내용을 떠올렸을 뿐인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으려나.

“정령은?”

이 녀석이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밀도로 농축된 음차원 마나가 그 기원인 블랙 위치를 구현해버린 것이다.

“여기.”

본인이 들고 있던 마법봉을 내민다.

“원래 그냥 검은 구체였는데, 내가 마법봉으로 만들어 봤어. 최상급의 아티팩트 등급이 떴으니까 고마워하렴.”

아티팩트 제작. 게임에 존재하는 시스템이긴 한데, 그걸 블랙 위치가 할 줄이야.

나는 엉겁결에 블랙홀 같은 구체가 달린 봉을 받아 들었다.

“우리 아이의 이름은 뭐로 할까?”

“우리 아이? 뉘앙스가 좀 이상하지 않아?”

“왜? 사실인데.”

킥킥대며 웃는 블랙 위치.

“오, 그래? 그럼 애 엄마 생각부터 들어볼까?”

“뭐어? 아하핫! 능글맞은 거 봐. 으음, 이름이라. 좋아.”

허공에 손가락으로 문자를 그리는 블랙 위치. 게임 내 사용되었던 문자 같은데, 잘 모르겠다.

“뭐라 적은 거야.”

“카오스.”

“좀 유치하지 않나. 애 이름으로는 별론데.”

내 즉답에 충격을 받은 건지, 블랙 위치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 쿡, 웃고는.

“그러네. 그럼 위즈로 하자.”

“위즈. 좋네.”

“마녀의 딸이라는 의미야. 잘 키워줘.”

“이게 어딜 튀려고. 육아는 같이해야지.”

“…쿡쿡, 너는 정말 재밌구나. 알았어, 종종 불러.”

이만한 마나량을 한곳에 집중시키면 블랙 위치가 나타난다는 걸 알았으니, 말하지 않아도 종종 부를 셈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블랙 위치는 모습을 감췄다. 이후 사방에 균열이 생기더니 빛이 새어 들어왔다.

“위즈. 나가자.”

검은 구체 속의 어둠이 꾸물렁대자 한순간에 사방이 터져나갔고 어느새 나는 강의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게 자네의 정령이구먼? 이름은 정했는가?”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팔뚝 크기의 마법봉. 트레이시와 안토니오가 이를 보고는 안색을 굳히며 뒤로 물러난다.

“예, 위즈.”

이름을 부르자 구체 안에서 재차 꾸물대는 녀석.

“허허, 지성이 높은 녀석이구먼. 자네를 정말 아비로 여기고 있어.”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이 나이쯤 되면 보이는 게 있기 마련일세.”

그러고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적응한 환경이 복수인 듯하네. 이런 종류의 정령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지. 저쪽 세상에 놀러 간 게 대부분이니 놀라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스승님.”

“허허, 잘 보살피게나. 그보다 정령의 속성을 확인해보세. 어찌 보면 초기 각인보다 중요한 게 정령이 살아갈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니.”

매저드는 정령이 지구의 법칙에 적응한 것과는 별개로 선호하는 환경을 제공해주는 게 성장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의실 뒤의 진열장에서 방석을 꺼내 우리 앞에 놓고는.

“트레이시, 레드레이를 이곳에 내려놓게.”

“레드레이. 일어나.”

날개를 한차례 푸드덕거린 새가 트레이시의 명령에 따라 방석 위에 앉는다.

그러자 방석 귀퉁이에 달린 네 개의 구슬 중 두 개에 불이 들어왔다.

“파동과 은밀의 속성일세. 자네의 정령은 딱히 환경을 조성해줄 필요가 없겠구먼.”

“그런가요?”

“지구가 대신해주고 있는 셈일세. 안토니오?”

“예, 스승님. 이 자식! 이리 와!”

나가기 싫어하는 고양이를 억지로 잡아끄는 것처럼 낑낑대다 간신히 방석 위에 인드라를 앉힌 안토니오.

“번개와 부름일세. 비 오는 날에 벼락을 맞게 해주면 최선이겠고. 평소에는 자주 이름을 불러주게.”

그렇게 단순한 행위도 ‘부름’에 속하는지 묻고 싶었으나 매저드가 하는 말이니 의미가 있겠지 하여 넘겼다.

하지만 당사자인 안토니오는 의심이 섞인 눈으로 매저드를 바라봤다.

“이 스승을 믿게나. 대련 상대로는 최고이니 자주 부르며 부딪히게.”

“헉,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법봉 형상의 위즈를 방석 위에 올려두자 귀퉁이의 구슬들이 전부 위즈와 같은 흑청색으로 물든다.

“장난기가 많은 아이구나.”

매저드가 위즈를 검지로 툭 건드리자 방석의 구슬들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이후 천천히 흑색과 청색으로 물들었고.

“융합과 어둠 속성이구나.”

어둠이야 어느 정도 예상한 바지만, 융합은 아예 처음 듣는 속성이다.

“융합이라 하시면?”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를 게다.”

익살스러운 얼굴을 한 매저드가 위즈를 가리키며 답한다.

찜찜한데.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위즈에게 말을 걸었다.

“융합이 뭔지 알려 줄래? 윽?”

마법봉의 구슬에서 꾸물대던 어둠이 확 튀어나와 나를 덮쳤다. 이윽고 위즈는 내 겉을 얇게 덮었고 익숙한 복장으로 변했다.

“블랙 위치?”

바로 마법 소녀의 복장이었던 것.

“흐흡!”

트레이시와 골드우드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다.

하.

보라색 슈트까지는 좋으나 소녀 취향의 프릴 망토와 치마바지는. 빌런으로 살며 갖은 수모를 겪은 나로서도 신선한 치욕이었다.

“위즈, 다른 옷으로 못 바꾸냐.”

빛과 같은 속도로 그렇다는 의미의 사념이 전해져왔다. 빌어먹을.

“그게 자네의 정령이 가장 바라는 환경일세. 두 속성 모두 쉽게 충족시킬 수 있으니 운이 좋구먼.”

“이게 운이 좋다고요?”

“따로 시간을 낼 필요가 없지 않나. 외형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거라면, 금방 적응하게 될걸세. 본디 마법사에게 오명이란 숙명과도 같은 것. 아니면 로브를 하나 더 걸쳐도 될 일 아닌가.”

“그렇기야 합니다만.”

흐흡. 푸핫!

입을 틀어막고 웃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본 매저드가 나를 툭 치며 고개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자네가 바란다면 타인에게도 융합시킬 수 있을 걸세.”

아하?

그 뜻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둘이 내게서 황급히 거리를 벌린다.

“이리 와.”

트레이시는 몰라도 안토니오, 네놈은 무조건 입힌다.

“저, 저리 가. 아, 안돼!”

“돼!”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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