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합숙 훈련 (1)
“길버트 슈타인 박사님.”
길버트 슈타인의 조수이자 VZ 핵심 개발 연구자 중 한 명인 마토는 심각한 일이 생길 때면 슈타인 박사를 풀네임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이를 알고 있는 박사가 이삿짐을 내려놓고 굳은 표정으로 돌아본다.
“무슨 일인가.”
“VZ-4가 하나 빕니다.”
VZ-4는 수류탄처럼 충격을 받은 지점에 지름 30m가량의 구형 보이드 존을 펼치는 투척용 VZ다. 히어로 협회에서 제작을 요청해 개발한 아이템이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짐작은 가는가?”
손톱을 깨문 채 기억을 더듬던 마토가 사색이 되어 입을 열었다.
“…버스에 타기 전에 어깨를 부딪친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 사람의 용모와 마주친 위치를 상세히 적어 히어로 협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유효 기간도 짧다 하셨으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VZ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신속히 회수하는 편이—”
-아잇, 됐습니다. 무능력자가 되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렇게 불안하시면 관리를 똑바로 하셨어야지!
쾅.
귀를 때리듯이 끊어지는 전화에 길버트 슈타인 박사는 광대를 움찔거리다 긴 숨을 뱉는 것으로 속을 달래고는 조심스레 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전화를 받은 리쳇은 평소 남만혁에게 대할 때와는 다르게 무척 공손하고도 사무적인 어투로 응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박사가 절절매며 동료의 실수를 고백하자.
-심각한 사항이군요. 알겠습니다. 저희 쪽에서 회수하도록 하죠. 인상착의를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협회와는 정반대의 반응에 박사는 안도했다.
‘역시 밀키 마이닝은 VZ의 위력을 제대로 아는구나.’
좋지 않은 의도로 사용하면 한순간에 히어로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다. 수년간의 고행 끝에 개발해놓고 아무도 모르게 이 연구자료를 묻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11월 말.
애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합숙 훈련이 시작됐다.
“왜 한국이에요?”
“맞아, 우리나라에도 좋은 곳 많다고요.”
“우우~”
A반은 알래스카, B반은 러시아 오이먀콘, C반은 아이슬란드. 하여튼 F반 말고는 전부 멀고 추운 나라로 갔다.
본래 우리 반도 캐나다 북부, 옐로나이프라는, 1년 내내 영하인 동네로 보내질 예정이었으나 내가 비용을 명분으로 결사반대를 외쳐 결국 한국의 계곡으로 오게 됐다.
멀리 가 봐야 시간이랑 몸만 축나지 여기서 하는 거랑 별반 차이도 없지 않냐는 내 말에, 교감은 골몰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쪽에는 최고 수준의 훈련시설이 있다던데, 그런 건 세계 톱을 다투는 아카데미에도 다 있는 거다.
이런 인생 선배의 고견도 모르고 저 어린것들은 그저 비행기 타고 멀리 가는 게 좋은 줄 알고. 쯔쯔.
“과거 미국의 넬러 사령관은 한반도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운 여름, 추운 겨울, 가파른 지형. 훈련에 최적화된 곳.’ 크으음.”
데커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애들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한다. 열 명의 원한 어린 시선을 받은 데커드가 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나를 쳐다본다.
“자! 한국이 고향인 남만혁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내 이름이 언급되자 앞장서서 시위하던 도수정과 곽재우가 어깨를 움찔한다.
“스쿠버다이빙 가능.”
리얼블루와 클린에어의 귀가 흠칫한다.
계곡의 깊이는 본래 5m 남짓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점점 깊어져 지금은 30m에 달한다.
“서바이벌 게임도 가능.”
겨울 숲에서 벌이는 서바이벌. 남자라면 설레지 않을 수가 없는 레저 아니겠는가. 꿍얼대던 블리딩블러드와 소구경이 입을 다문다.
“펜션에 노래방 기계 있고.”
칸탄테와 버추얼박스, 침묵.
“본가가 한국인 녀석은 훈련이 끝난 뒤에 집에 가도 된다는데.”
도수정, 곽재우가 내 시선을 피한다.
“불만이 있다?”
“아니, 막말로. 다른 반 애들은 전부 놀러 가, 는 느낌인데 우리만 진짜 훈련 온, 거 같잖아!”
저게 뭔 개 소리야.
“아~ 놀고 싶어? 그럼 히어로 때려치우고 놀아.”
눈만 웃으며 그리 말하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는다.
아이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적당히 칭얼대야지. 버스 타고 오는 내내 저러더라. 유치원 애들 밥 떠먹이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됐냐는 내 눈짓에 데커드는 당황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다 입을 열었다.
“만혁 학생의 말대로 놀거리는 충분하니 훈련 후에 맘껏 즐기세요. 단. 오늘부터 시작하는 2주간의 합숙은 철저한 성과제입니다.”
“예?”
“초청한 교관님들이 1:1로 훈련을 봐주실 텐데. 그날 달성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자유시간은 없습니다.”
짐짓 엄한 목소리로 공지한 데커드가 우리 뒤로 손짓하자 펜션 안에서 세 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오오!
가장 앞에 선 사람을 보고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히어로 랭킹 19위. 리플렉스 님입니다.”
전신 쫄쫄이에 눈만 가린 코스튬. 하늘색과 붉은색이 섞인 디자인. 근육 덩어리의 윤곽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사나워 보이는 외관이다.
“켁, 젖비린내 나는 꼬마들이잖아. …이런, 실수. 또 속마음이 나왔군. 못 들은 거로 해라.”
“큼. 리플렉스 님은 여러분의 반사신경 훈련을 담당해주실 일일 교관님입니다.”
“교수님. 일일 교관이라 하시면 오늘만 봐주신다는 건가요?”
도수정의 물음에 데커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리플렉스 님은 매우 바쁘신 분이라, 오늘 하루도 겨우 모셨습니다. 그러니 다들 열심히 배우시길 바랍니다.”
“우와오, 쟤는 엄청난 미녀가 되겠어. 이름이 리얼블루? 내 명함이 어딨더라….”
리얼블루의 흉부를 지긋이 보며 중얼거리는 리플렉스.
“리플렉스 님.”
“이런, 또 실수를. 미안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하다. 이쯤 되면 일부러 저러는 거 같은데.
“다음은 세이프레그 님입니다.”
“후유우, 긴장되네요. 저는 요 앞의 마을에서 그린리프 사무소를 운영하는 아저씹니다.”
“사무소!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도수정의 질문에 세이프레그는 낡은 마대 같은 엉성한 코스튬으로 가려진 머리를 긁으며.
“주로 업어드리는 게 일과입니다.”
“예?”
“하하,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분들이 많다 보니까요. 그렇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사무소를 운영하는 히어로라길래 기대했는데.’라고 옆에서 투덜대는 트레이시 그웬.
“마지막으로 이분은 집업미러 님입니다. 바로 저번 주에 올해의 히어로 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무려 우리 아카데미 선배죠.”
집업미러. 대단한 활약을 한 건 아니지만, 특이한 구현계라 기억하고 있다.
“나도 드디어 선배 노릇을 하는구나. 크흑.”
머리까지 잠기는 점프 수트로 전신을 가린 집업미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퍼 사이로 흘러나오는 물방울들.
진짜 우나?
“나부터 하지. 시간이 없어서.”
리플렉스가 손목시계를 만지며 앞으로 나서자 데커드와 다른 두 히어로가 자리를 비킨다.
“음, 너! 앞으로.”
리플렉스 근처에 있던 블리딩블러드가 불려 나가 그와 마주 보고 선다.
“기초적인 강의는 이미 아카데미에서 들었을 테고. 거금을 들여 나를 교관으로 초대한 이유는 이 기술을 내놓으라는 거겠지. 이번 달에 전용기만 안 뽑았어도. 칫. 대련 위주로 가르칠 테니 준비들 하고 있도록.”
저렇게 대놓고 속내를 드러내고도 지금까지 히어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능력을 보유했다는 뜻이겠지.
학생들이 스트레칭을 마치길 기다리던 리플렉스가 대뜸 블리딩블러드를 등지고 선다.
“공격해봐라.”
촤악!
일단 팔에서 피를 뽑아내 검처럼 만든 블리딩블러드였으나 공격을 망설였다.
“어서! 네가 시간을 끄는 만큼 다른 학생을 가르칠 시간이 줄어든다는 걸 모르는 거냐.”
“윽, 공격하겠습니다.”
머뭇대던 블리딩블러드가 혈검을 휘두르자 뒤돌아선 채 눈을 감고 있던 리플렉스가 한 걸음 움직이는 것만으로 공격을 피해낸다.
“저 정도는 나도 하겠네.”
옆에서 트레이시가 투덜거리는 걸 들었는지, 리플렉스의 이마에 핏대가 선다.
“계속. 전력으로 공격해라. 눈도 감겠다.”
이어지는 블리딩블러드의 공격을 모조리 회피하는 리플렉스. 저 인간 특성이 ‘반사신경 강화’이긴 한데. 저건 감각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피하는 거라 특성과는 관계가 없을 듯하다.
잠깐만, 그리고 보니. 빌런으로 활동할 당시 완벽한 타이밍에 기습했음에도 피하는 히어로가 종종 있었다.
저런 거였나. 뽀록이라고 속으로 욕 엄청 했었는데.
“봤느냐. 이걸 식스센스라고 한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산책하듯 공터를 돌며 블리딩블러드의 공격을 모조리 무효로 돌리는 리플렉스.
“노파심에 당부한다만, 내 특성과 조합이 좋기에 이런 퍼포먼스가 나오는 것이다. 너희는 따라 하지 마라.”
“후욱, 훅. 저, 저도 배울 수 있습니까?”
한참 혈검을 휘둘러대던 블리딩블러드가 묻자 리플렉스는 그제야 눈을 뜨고는.
“모른다!”
“예?”
“이건 재능의 영역이다. 자질을 타고났다면, 지금쯤 어떻게 하는지 감이 온다. 내가 그랬다!”
저런 전투 방식이 존재한다. 그걸 깨닫는 것만으로도 체득하는 괴물이 있기는 하다.
퀸.
반별 커리큘럼 자체는 비슷하다 하였으니 녀석은 지금쯤 눈을 감고 마가렛의 주먹을 피하고 있지 않을까.
“뭔가 느낌이 오는 돈줄부터 나와라!”
대놓고 돈줄이라 불렀으나 누구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저 능력을 보고 그의 랭킹이 상기된 것이리라.
‘대단하긴 하지.’
천만 히어로 시대에 랭킹 19위라 함은 실적과 정치, 그리고 프리실라 루드라가 그토록 강조하던 안목이 완성에 가깝다는 의미니까.
셋이 손을 들었다.
“소구경, 마인 트래퍼, 곽재우? 좋다. 차례대로 나와라.”
각자 10여 분간 리플렉스와 대련했고 몇 가지 조언을 듣더니 느낀 바가 있는지 옆 훈련장으로 넘어가서는 저들끼리 붙는다.
“다음은 너.”
리플렉스와 가까운 순으로 한 명씩 대련했고 전부 리플렉스에게 ‘재능 없음!’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 내 순서가 되어 앞으로 나서자.
“미라클 남. 지망생 주제에 대단한 별칭을 얻었군?”
“부러우면 너 해.”
“오만하기까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우측에서 관자놀이를 노리고 다가오는 훅.
이 자식이. 다른 애들은 데커드의 휘슬에 맞춰 시작해놓고.
“피해?”
“피하는 강의 아닌가?”
“그건 그렇다.”
어쩌자는 거야.
이어 원투 로우킥으로 이어지는 정석 콤보를 반복하던 리플렉스가 한순간에 내 품으로 파고들어 간장 치기를 먹인다.
순간 모든 내장이 들려 올라가는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엄청난 멀미가 뇌리를 강타했고 이내 입으로 아침으로 먹었던 스프를 게워내야 했다.
“흠, 그 정도는 아닌가. 실례했군.”
“큭, 실례. 정도로.”
“한 번 더 맞고 싶다고?”
“염, 병.”
“욕인가?”
못 알아먹은 듯해 배를 붙잡고 가운뎃손가락을 세우자 리플렉스가 씩 웃더니.
“균형을 맞춰주마.”
리플렉스가 땅으로 꺼지듯이 사라진다. 아, 공격해오는구나.
절체절명의 위기가 분명한데도 전혀 느낌이 없는 걸 보면 나는 식스센스라는 기술과는 인연이 없나 보다.
빌어먹을.
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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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