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합숙 훈련 (2)
리플렉스가 돌아갔다. 첫날 대련을 통해 감각을 깨우친 셋을 제외하면 전부 실신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을 고려해 일일 고용을 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역시 교감이라고 해야 하나. 빈틈이 없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세이프레그입니다. 오늘부터 이틀마다 한 번씩 제 사무소에 가서 어르신들을 도울 겁니다. 자자, 타시죠.”
농기계를 개조해 트럭으로 만든 차는 시속 20km로 계곡을 내달렸다.
느린 만큼 오프로드에 강해 꽤 타는 맛이 나긴 하더라.
사무소로 가는 길에 파란색 고무장화를 신은 어르신이 밭에서 일하다 허리를 세워 반갑게 인사한다.
끼익.
“렉. 그 애들이여?”
“네, 소천 할아버지.”
“끌끌, 일 마치고 갈 테니께. 맥막 한 잔 말아놔.”
나중에 물어보니 맥막은 맥주 막걸리란다.
“애들도 있는데 드시게요?”
“아따, 애덜이 나랑 뭔 상관이야.”
“알았어요. 대신 다른 분들은 데려오시면 안 돼요.”
“야박하게 굴지 말어.”
“딱 한 잔만 말아둘 테니까 나눠 드시든지 하세요.”
세이프레그가 핸들을 돌리자 멈췄던 트럭이 다시 움직인다.
“사이가 좋으시네.”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내가 묻자 나를 힐끔 본 그가 맑게 웃는다.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요.”
도착한 사무소는 창고를 개조한 듯한 모습이었고 내부는 카페와 흡사했다. 세이프레그는 나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음료를 대접하고는.
“다 마시면 출발할게요. 슬슬 어르신들 밭일하실 시간이라.”
잠깐의 휴식을 가진 우리는 세이프레그를 따라나섰고 이내 ‘렉 정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이현 할머니.”
“자네 왔는가. 음? 뒤의 아이들이 전에 말했던 그거냐?”
“맞습니다. 타시죠. 데려다 드릴게요.”
“오냐.”
노인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훌쩍 뛰어 세이프렉의 어깨에 올라탄다.
심지어 외발로 서서 책을 읽는다. 곱게 땋아 넘긴 댕기 머리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자세.
놀란 도수정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묻자.
“금이현 할머니께서 체술의 고수셔서 그렇습니다.”
“체술이요?”
“예에, 비 각성자 히어로 출신이세요.”
아.
과거. 빌런 범죄 발생률에 비해 히어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가 있었다. 그때 일반인 중에 뛰어난 이를 고용해 빌런을 잡게 했었는데.
아마 이 노인이 그런 이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실지 모르겠는데, 한국의 독접(毒蝶) 금이현이라고 하면, 모르는 분이 없었습니다.”
오오.
“그만하거라. 애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하하, 죄송합니다.”
그렇게 세이프레그는 본인의 우람한 체격의 곳곳에 어르신들을 태우고 이동해 비닐하우스로 가득한 밭에 도착.
마치 버스에서 하차하듯 우르르 내린 노인들은 각자의 비닐하우스로 들어갔다.
“비닐하우스가 몇 개인지 보이시죠?”
“12개요.”
“네, 여러분은 합숙 기간 내에 저길 다 한 번씩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유는 가보면 알 거고요. 자자, 해가 지기 전에 끝내야 하니 빠르게 움직입시다.”
어리둥절한 아이들을 떠밀어 각각 다른 비닐하우스에 넣는 세이프레그. 나도 어영부영하다 11번째 하우스로 들어왔는데, 금이현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된 화로, 은박에 싼 고구마를 뒤적이는 모습.
“먹을 줄 아느냐.”
“없어서 못 먹죠.”
내 대답을 듣고는 자기 옆에 놓인 의자를 손으로 두드리는 노인. 가서 앉자 작대로 불을 가리킨다.
“네 인생은 저 불처럼 타오르는 인생이길 바라느냐.”
“아뇨. 잔잔하고 무탈하면 좋겠네요.”
“그럼 뭣 하러 영웅이 되려 하느냐.”
“저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으음?”
“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서요.”
당연히 그블린 이야기다. 놈들이 어떻게 멸망하는지 주요 간부들은 누구인지 어떤 식으로 공격해오는지. 나만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내가 이 빌어먹을 히어로 짓을, 정확하게는 히어로 육성을 해야만 한다.
“…프리실라 고것이 네 이름을 언급한 이유를 알겠구나.”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는 노인. 교감과 아는 사이였나.
“어르신,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보아하니 아카데미는 세이프레그를 교관이 아니라 중개역으로 쓰는 듯싶었다. 실제 교관은 이 노인들이겠지. 한 명 한 명이 범상치 않더라고.
“특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을 상정한 훈련.”
아하. 과연 교감이라 해야 하나. VZ를 캡슐로 사용해보고는 그 위험성을 인지한 게 분명하다.
“다른 곳도 똑같은 걸 배워요?”
“그렇지 않다. 저 각자 분야가 다르니. 어쩔 테냐.”
여기서 배울 건지 다른 비닐하우스로 갈 건지 묻기에 나는 노인에게서 작대를 뺏어 속까지 타기 직전인 고구마를 꺼내 은박을 벗겼다.
“드시죠.”
“음.”
아날로그로 기록하던 시절이라 많은 자료는 찾을 수 없었으나, 리쳇이 정부 쪽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다 속기로 적힌 프로필을 하나 건졌다.
금이현. 나비의 움직임처럼 가볍고 날렵하게 적을 처리해 ‘독접’이라 불림. 금이현의 표적이 된 빌런은 자신이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고 절명함. 신중하며 판단이 빠르고 실수가 없음. 대테러부대 대장으로 적격.
그리고 이 종이 위에 사선으로 ‘승인’과 ‘폐기’라는 붉은 글씨가 중첩되어 찍혀 있었다.
고구마를 까서 다 먹고 노인이 건네준 물을 마신 뒤에야 리쳇의 보고가 끝났다.
“여기서 배울랍니다.”
“그러냐.”
몸빼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는 의자를 뒤로 물려 공간을 마련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운동은 좀 하느냐.”
“아뇨, 몸 쓰는 재능은 없어요.”
그렇다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라고 덧붙였더니 노인이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말했다.
“나와 같구나.”
특성 체육 강의에서 기초적인 체술 훈련은 받았기에 자세나 힘을 쓰는 방식, 무게 중심의 이동, 회전을 고려한 공격. 이런 건 익혔다.
다만, 이론만 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준이 낮을 뿐.
이러한 이야기를 노인에게 들려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보거라.”
그러고는 대뜸 하우스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쇠구슬을 향해 손바닥을 내지르는 노인.
쩌적!
손과 쇠가 만나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닌데?
“지금으로 치면 변신계겠구나. 전신의 경도가 쇠와 같은 빌런과 사투를 벌인 적이 있다.”
“어떻게 됐습니까?”
“이겼다.”
쩌적.
손자국이 찍힌 쇠구슬이 반으로 갈라진다. 내부는 선반 톱니에 갈린 것처럼 가루가 된 상태였고.
이를 본 금이현은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이프레그가 같은 크기의 쇠구슬을 들고 와 교체하고 갔다.
“알려주리?”
“배우겠습니다.”
“내가 중국에서 유학할 적, 치한에게 당할 위기에 처했었다. 그때 지나가던 고승께서 구해주시며 알려주신 기술이다.”
오, 뭐야. 무협의 기연 같잖아.
“침투경. 상대의 내장을 파괴하는 장법이고 보다시피 경지에 달하면 내부가 쇠라 하여도 산산조각이 난다.”
“원리가 무엇입니까?”
“나선의 묘(妙).”
“예?”
“최초 각성자의 탄생과 함께 세상에는 또 하나의 원소가 생겨났다. 알고 있느냐.”
배우기는 했다. 포스라고 부르는 원소인데 각성자의 몸에 깃들기에 특성 사용에 소비되는 연료 정도로 여기고 있다.
포스는 회귀 전에도 인위적으로 다룰 수 없는 원소 중 하나였다.
“들어는 봤습니다.”
“고승께서는 이를 ‘기(氣)’라 칭하셨고 체내에 임의로 축적하는 법을 깨우치셨다.”
“대단하네요.”
“마음만 먹었다면 새로운 학문의 길이 열렸을 테지.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몹쓸 중생이 힘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었나 보네.
“신중하셨군요.”
“그래, 그러하여 일인전승을 원칙으로 하셨지.”
“일인전승이라면 침투경을 배우는 건 제가 처음입니까?”
“옳다. 무얼. 부담가지지 말아라. 그저 그분의 무학이 잊히지 않고 다음 시대에 전해지길 바랄 뿐이니.”
땡잡았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나 일단 분위기에 맞춰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준비됐습니다.”
“우선 네 특성을 들어봐야겠구나.”
해변을 구현하자 살짝 놀란 금이현은.
“물과 친숙하겠구나?”
“그런 편이죠.”
“특성을 취소하고 잠시 기다리거라.”
비닐하우스 밖에서 수돗물을 한 바가지 떠온 노인은 그걸 의자 위에 올려두곤.
“손을 담그고 수의 기운을 손끝으로 끌어들이거라.”
만약 내가 마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저 말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비됐을 것이다.
나는 골든팁을 매개로 중급마법사의 연구를 둘러본 경험과 매저드를 통해 겪은 워터 학파의 마법을 통해 ‘수’의 기운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물에 손을 잠그고 10여 분. 될 거 같으면서도 되지 않는 감각이 한참 가슴을 간질이던 그때. 노인의 손이 내 팔에 닿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청량한 기운이 팔을 타고 내려가 손바닥 전체에 퍼졌다. 직후 물이 출렁이더니 이내 회전하기 시작한다.
머리로는 이해했음에도 실제 눈으로 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에 고개를 퍼뜩 드니 금이현이 나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느냐.”
“대강은요.”
“이번에는 혼자 해 보거라.”
골치 아프게도 방금 노인을 통해 느낀 기운은 분명 마나와는 다른 것이었다.
내 몸에 맞는 속성만 추려 체내에 축적하는 게 마나라면, 이건 자연의 마나를 내 몸이라는 필터를 거쳐 가공하는 감각이다.
‘어렵네.’
역시 나는 몸을 쓰는 재주는 없나 보다. 도저히 금이현이 사용했던 기를 자연에서 끌어오거나 움직이는 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에라이.
하도 답답해서 음차원 속성 마나를 노인이 사용했던 방식대로 압축해 움직였더니.
꿀렁.
되네?
“사특한 기운이구나. 이래서 고것이 내게 보낸 것이로고. 여전히 뇌두를 굴리는 실력은 일절이구나.”
“예?”
“되었다. 계속해보거라. 음이 깊다고 한들 그만한 양으로 균형을 맞추면 될 일이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금이현은 방금처럼 물을 회전시키는 수준까지 도달하길 원했고, 나는 해가 질 때까지 반복해야 했다.
“내일도 이리로 오거라.”
“어, 제가 알기로 내일은 집업미러의 강의가 있어서요.”
“끝나고 오면 되잖느냐.”
“…예.”
화덕에 불을 끄고 노인과 함께 비닐하우스를 나섰다. 우리가 마지막인지 앞에 학생과 노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능이 있느니라.”
“제가요?”
금이현은 내게만 들리게끔 작게 말하곤 세이프레그의 정수리에 가볍게 올라탔다.
“으아아아, 남 교수우우.”
트레이시 그웬이 비척대며 다가와 내 어깨에 매달린다.
“야, 나도 힘드니까 엉기지 마.”
“고준석 할아버지가 보법이라는 걸 알려주는데—”
하소연은 우리가 자력으로 숙소까지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고 다른 아이들도 공감하는 듯, 중간중간 말을 붙여왔다.
전체적으로 듣자 하니 나처럼 무공 비슷한 기술을 배우고 있는 듯하다.
특히 도수정의 경우엔 소수권법이라는 이상한 근접 박투를 배우는데, 할머니의 손이 하얗게 변하더라면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해댔다.
참나, 구라도 적당히 쳐야 믿지.
“남 교수, 너는 뭐 배웠어?”
“맨손으로 쇠구슬 내부 가루 만드는 거.”
“야, 너 그거 습관이야.”
“뭘.”
“거짓말 말야. 어지간해야 믿지. 뭐? 쇠구슬을 가루? 쿡쿡, 웃기긴 하다. 야.”
…이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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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