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합숙 훈련 (3)
“오늘은 집업미러 님의 강의가 있겠습니다. 나와주세요.”
머리까지 지퍼가 달린 점프 수트로 전신을 가린 남자가 앞으로 나온다.
“후배들아아아!”
왜 저래.
지퍼 사이로 눈물을 짜내는 집업미러의 모습에 데커드가 한숨을 쉬며 옆구리를 툭 친다.
“으윽. 알겠습니다. 일단 계곡으로 가자!”
그를 따라 장소를 옮겼고 데커드를 제외한 12명은 발목까지 잠기는 얕은 계곡에 들어왔다.
“으으.”
겨울의 새벽 계곡물은 발만 담갔음에도 전신에 오한을 퍼트릴 정도로 차가웠다.
턱을 달달 떠는 아이들을 둘러본 집업미러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머리끝까지 잠긴 지퍼를 내린다.
드디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을까 싶었으나 안은 회색 연기로 그득했다.
“나와라, 연분아.”
뱀처럼 구불거리며 흘러나온 연기는 일렬로 서 있는 우리 앞에 오더니 이내 집업미러의 손짓에 의해 동강동강 끊어졌다.
“각자 앞에 있는 연분이에게 손을 대 봐.”
내가 손을 먼저 넣자 망설이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연기에 손을 대었고, 연기는 서서히 형태가 변했다.
“이래서 히어로명에 미러가 들어간 거였네요.”
도수정이 고개를 주억이며 자기와 똑 닮은 연기를 보며 말하자 집업미러가 고개를 끄덕인다.
“연분이는 자기에게 닿은 생명체의 외형을 복제할 수 있어. 그렇게 복제된 분신은 내가 조종하고.”
소구경의 리볼버가 그대로 연기의 허리춤에 메여있는 거로 봐선, 장비도 복제하는 듯하다.
“나 자신과의 싸움인가요?”
도수정이 안경에 튄 물기를 닦으며 묻자 집업미러가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답했다.
“맞아! 거기에 내 경험과 지식이 섞여 있지! 단순 물리력은 본체보다 약하지만 내가 지치기 전까지는 계속 부활할 거야. 기술 훈련용으로는 최고지.”
아카데미에서 비슷한 게 있긴 하나 저렇게 액티브하진 않다. 내겐 무쓸모여도 애들 궁극기 개발에는 도움이 되겠어.
“물 밖으로 나가면 휴식으로 인식하고 공격 안 할 테니까, 자유롭게 싸워.”
집업미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펜션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펜션까지의 거리가 꽤 되는 데도 이리 뚜렷하게 구현을 유지한다는 건, 숙련도가 상당하다는 거겠지.
버추얼박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머리에 덮어쓴 상자가 젖지 않기 위해 애쓰던 것을 멈추고 진지하게 자세를 잡는다.
“위험하다 싶으면 제가 개입할 테니, 걱정 말고 전력을 쏟아 보세요. 이런 기회는 잘 없습니다.”
“예!”
데커드의 조언을 기점으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이 시작됐고 나 역시 거리를 좀 벌린 다음 어제 독접 여사에게 배운 침투경을 연기에 사용해봤다.
반응이 한 템포 느린 연기가 백스텝을 밟으며 회피했으나 이미 손이 닿은 뒤였다.
손바닥에 차갑고 축축한 감각과 약간의 반작용이 전해져온다.
“에라이.”
닿은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나선의 묘로 마나를 회전시키는 걸 실패해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사이 연기는 가드를 올리고 복서처럼 스텝을 밟으며 다가온다.
“아니, 다리도 없는 게 뭔 짓이야.”
“집업미러는 격투에 조예가 깊습니다. 연기라고 방심하다가는 당할 거예요.”
데커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기 특유의 부유 능력으로 신속히 접근해 내 안면에 주먹을 날린다.
피한다고 허리를 틀었으나 그걸 또 따라와 잽을 친다. 이어지는 연타는 도저히 피할 각이 안 나와 턱을 당기고 의도적으로 뒤로 몸을 던짐으로써 충격 최소화를 노렸지만.
퍽!
순간 별이 보였다. 눈을 맞은 것도 아니고 이마에 주먹 끝이 잠깐 닿았을 뿐인데, 이런 충격이라니.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로 연기를 올려다보자 녀석이 검지를 흔들며 도발한다.
이놈이?
“육체 능력은 동일합니다. 조종만 집업미러가 하는 거예요. 여러분도 똑같이 할 수 있어요.”
곽재우와 소구경도 나처럼 당해 쓰러져 있었고. 데커드가 다가와 그들을 부축해 일으킨다.
올해의 히어로로 선정될만하네.
원거리에서 다수와의 대인 전투를 수행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애들 자존심 좀 상하겠어.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나’가 저렇게 잘 싸우면, 아무리 멘탈이 좋아도 조금은 흔들리기 마련.
일어서는 순간 다가와 다시 잽과 뒤차기를 날리는 내 분신. 공격 하나하나가 날카롭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닌가, 윽.”
산소가 필요 없는 연기의 무호흡 공격은 무한정 이어졌고 점차 속도가 빨라진다.
피하고 막고 쳐내다 보니 손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놓친 공격 하나가 복부를 강타.
끄으읍.
첫날 리플렉스에게 맞은 간장 치기 급은 아니어도 내장이 한차례 출렁거릴 정도의 위력.
이어지는 연타에 손을 쓸 수 없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엔 계곡에 드러누워 있었다.
“첫 다운은 남만혁 학생이군요. 분발하세요.”
하하!
애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특성을 사용하지 않은 나는 약하다. 회귀 전에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각 낭만의 숙련도를 쌓으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후우.”
어지러움을 잠시 달래고자 물 밖으로 나와 쉬며 애들을 관찰했다.
식스센스를 익혀서 그런지 곽재우, 블리딩블러드, 소구경의 움직임이 다른 애들에 비해 확실히 좋다.
녀석들의 공수를 관찰하던 중, 나를 복제한 연기가 다시 검지를 까닥인다. 그만 쉬고 오라는 건가.
첨벙.
물을 의도적으로 강하게 밟아 물기둥을 솟구치게 만들어 연기의 시야를 가린 뒤 자세를 낮춰 달렸다.
하등 쓸모없는 수작이었으나 조금이나마 변수를 만들어보고자 한 행동이었다.
연기는 주춤하더니 별거 없다는 걸 알았는지 좀 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공격해왔다.
나름의 반항을 한다고 해봤으나 전과 달라지는 건 없었고, 그렇게 첫 미러전은 내 전패로 끝났다.
* * *
늦은 오후. 금이현의 비닐하우스.
“왜 맞고 다니느냐.”
퉁퉁 부은 얼굴과 시퍼렇게 변한 눈을 본 금이현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타박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선배라는 작자가 이리도 지독할 줄은 몰랐네요.”
“변명은 되었다. 여기 앉거라.”
코로 가볍게 웃은 노인이 어제와 같은 의자를 권했고 그 앞 간이 테이블에는 물이 담긴 바가지가 올려져 있었다.
“똑같이 하면 되죠?”
금이현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곧장 손을 담가 음차원 마나를 꼬았다. 자박자박하던 물이 어제처럼 손끝에서 회전하는 게 아니라 아예 손등을 타고 팔뚝까지 타고 올라온다.
“어어, 이거 괜찮은 겁니까?”
“잘하고 있는 게다. 이번에는 반대로 회전시켜 보거라.”
회전이 멈추길 잠시 기다리자 물이 스르륵 흘러내린다. 이어 음차원 마나를 반대로 꼬자 첫날 금이현이 보여줬던 것처럼 물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한다.
“이 상태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겠느냐.”
입가를 비스듬히 기울인 노인의 물음에 나는 이 현상을 일으키는 데 소모되는 마나량과 재생되는 마나를 계산한 뒤 답했다.
“계속이요.”
“무어라?”
“차는 게 더 빨라요. 지금의 300배 정도는 더 감당할 수 있겠는데요.”
“300배?”
“해봐야 알겠지만, 더 될 수도 있고요.”
처음으로 노인의 얼굴에 당황이 깃든다. 금이현은 한동안 골몰하더니 뒤에 조심스레 물어왔다.
“네 몸을 내 기로 한번 들여다봐도 되겠느냐.”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어요.”
고개를 끄덕인 금이현이 맥을 짚듯 손목을 잡는다. 그리곤 기운을 밀어 넣어 내 전신으로 퍼트렸다.
약간 간지럽기는 해도 금이현의 기 자체가 청량해서 그런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발가락과 머리끝까지 오간 기운은 처음 들어왔던 손목으로 빠져나갔다. 긴 날숨과 함께 팔목에서 손을 뗀 금이현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네가 마법사임을 알고 있었다. 마법사가 다루는 마나와 우리 무술가가 사용하는 기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지금의 너처럼 혼용한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모두 죽었다.”
“저는 왜 되는 거죠.”
“모른다. 이런 경우는 없었으니. 그저 음기지체인 줄로만 알았거늘.”
난로 위에 올려 데워둔 차를 한 모금 마신 노인이 말을 이었다.
“지금과 같은 일이 허용되려면 이 음기가 너의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짐작 가는 게 있느냐.”
“아.”
음차원 마나는 블랙 위치가 내 슬롯에 들어온 후에 생성된 마나다. 블랙 위치의 것이라 판단해도 될 터.
이 가정이 맞다면, 평소에 한 마나 최대량 훈련은 그저 마나를 담는 통을 확장 시키는 것뿐이었을 수도 있겠네.
“있나 보구나. 기이한지고. 그 방대한 기를 빌려주는 당사자는 괜찮다더냐.”
“물어보죠, 뭐.”
바가지의 물을 버리고 엎은 뒤, 그 안에 위즈를 넣었다. 이후 마나를 압축해 주입.
점차 어둠이 확장되었고 어느 순간, 비닐하우스 내부가 시꺼먼 어둠에 잠겼다.
저 앞의 화로가 장작을 태워 불타고 있었으나 ‘밝다’라는 개념 자체가 소실 당한 듯. 어떤 빛도 퍼져 나오지 못했다.
“흐흥.”
사르륵.
내 뒤에서 등장한 블랙 위치가 위즈를 쓰다듬으며 내 무릎 위에 앉는다.
“의자에 앉아.”
“그러고 있잖아?”
슬쩍 옆을 보니 금이현의 얼굴이 시퍼렇다. 동공이 움직이는 거로 봐선 생체활동은 하는 모양인데, 여기 혹시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위험한 공간인가.
“내 몸의 마나—”
“맞아. 맞고, 괜찮아.”
묻지도 않았는데 답하는 블랙 위치.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다.
“그렇다면야. 잘 쓸게.”
“얼마든지. 또 봐. 위즈도 안녕.”
내가 해제할 것도 알았다는 양, 인사를 건네고 위즈에게 뽀뽀를 한 뒤 어둠에 녹아들듯 사라지는 녀석.
마나를 회수하자 어둠에 잠긴 공간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멈춘 듯한 화로의 빛이 다시 밝아졌다.
“큽, 쿨럭.”
“괜찮으세요?”
“방금 그것이 네 오리진이냐.”
음. 굳이 따지면 로맨티시스트가 근본이고 블랙 위치는 파생된 낭만이라 오리진까지는 아니다. 많이 의지하고 있긴 하지만.
“아뇨.”
“…클클, 하나만 약속할 수 있겠느냐.”
“들어보고요.”
“침투경을 사람에게 사용할 적에는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의 심정으로 고민해다오.”
판사? 뭐, 신중하라는 뜻이겠지. 그런 건 자신 있다. 애초에 어지간한 악인이 아니면 내가 나설 일도 없을 테고.
“노력은 해볼게요.”
“그래, 그거면 됐다. 잠시 기다리거라.”
전화를 걸어 세이프레그를 부른 금이현은 내게 양기를 흡수시키기 위해 가져왔다는 모종의 열매를 그에게 들려 돌려보냈다.
물어보니 다른 학생이 사용하게 될 거란다.
“너의 기운에 어설픈 양기를 흡수시켜서 될 일이 아니니라. 무얼, 걱정 말거라. 다른 영약을 준비해달라 하였으니.”
“어떤 영약입니까?”
“네 그릇을 개조하는 영약이다.”
듣자 하니 내 마나통이 택배 상자라면 영약을 통해 아이스 박스로 바꾼단다. 이후 금이현은 사량발천근은 기(氣)에도 적용된다며 길게 설명을 이었으나 저쪽 세상의 용어가 너무 많이 나와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알겠느냐.”
“예, 어르신.”
그러나 아는척했다. 또 듣기 귀찮으니까!
“다시 듣거라.”
…귀신같은 노인네.
중요하다며 설명을 반복했고 이는 내가 펜션에 돌아가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 * *
며칠 후.
오늘 훈련을 마치고 펜션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리쳇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긴급 상황. VZ-4 탈취당함.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