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빌런 이지욱 (2)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이지욱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손에 의해 입이 틀어막힌 녀석은 한동안 버둥거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살려는 줄게.”
포기한 듯 꺾였던 이지욱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온다.
“대신 나랑 일 하나 하자.”
* * *
“히어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학생만 출입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와서요.”
“무슨! 저 위에 있는 건 살인마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사람이 학생만 올려보내라고 합니까? 그것도 입학한 지 1년도 안 된 애들을?”
“…히어로분들은 대기해주십시오. 저희가 학생분들을 도와 빌런을 제압하겠습니다.”
경찰 본인도 부끄러운지 데커드의 눈을 피하며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거, 누구 생각입니까.”
“상부의 지시—”
“그러니까, 상부 누구냐는 말입니다.”
대화가 심각해지자 뒤에서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나섰다.
“무슨 일 생기면 저랑 재우가 지키면 돼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교수님.”
“맞아요. 저희끼리 한 번 해볼게요.”
“경찰분들도 도와주신다니까, 괜찮을 겁니다.”
도수정, 리얼블루, 소구경이 자신감을 내비치자 데커드는 경찰을 한 차례 노려보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교감 선생님, 지금—”
헬로우 아일랜드를 양지화하기 위해 동분서주 중인 교감에게 더 이상 골칫거리를 안기기 싫었던 데커드였으나 학생의 목숨이 달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예? 들여보내라니요. 아니, 빌런이 하나라고 해도 철 조작 능력자인데! …예, 알겠습니다. 예. 후우, 올라가세요.”
교감의 반응은 담백했다.
‘그 정도 빌런에게 당할 아이들은 없습니다. 올려보내세요.’
데커드는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대화를 시도했으나 긴장한 건 자기뿐이라는 듯. 학생들은 조금도 떨지 않고 있었다.
이에 의문을 느낀 데커드가 마지막 상담 학생인 클린에어에게 이유를 묻자.
“월말 평가전마다 만혁이랑 싸워서 그런 거 아닐까요.”
월말 평가전은 이전 달의 1위가 모두를 상대하는 방식이다. 남만혁은 여름 방학 이후에 진행된 모든 월말 평가전에서 우승해왔다.
F반 아이들은 온갖 수단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그와 대련을 해야 했고.
“그, 그렇습니까. 그래도 조심하세요. 다칠 거 같으면 도망치고요. 경찰들의 이해관계에 우리가 놀아날 필요는 없습니다.”
“네!”
아이들이 경찰의 안내를 받아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몸을 돌린 데커드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두 임시 교관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리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주변을 돕시다.”
여차하면 경찰을 무시하고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데커드가 몸짓 눈짓으로 전하자 집업미러가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러죠! 후배는 제가 지킬 겁니다!”
“전투 중에 마을로 내려갈 수도 있으니, 저는 어르신들을 대피시키고 오겠습니다.”
“아,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여기로 유인하고 한 곳에 뭉쳤다 싶으면 그거 던져.”
홀로그램 지도를 켜 인근의 협곡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남만혁.
“알았다.”
이지욱은 내키지 않았으나 이 일만 잘 해내면, 여기서 빼내 줄 뿐만 아니라 사람답게 살게 해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믿어볼 심산이었다.
“5분 뒤에 애들 온다. 걱정하지 말고 시킨 대로만 해.”
남만혁은 아이들이 실전에서 VZ를 겪길 바랐다.
‘지금 보이드 존의 위험성을 알아야 히어로가 돼서도 주의하지.’
“…어머니는?”
떨리는 이지욱의 목소리에 남만혁은 홀로폰을 조작해 드론이 유골함을 들고 날아가는 영상을 재생시켰다.
“장례 끝나면 담아서 줄게.”
이지욱은 친척이 없었기에 그의 어머니는 병원 지하에서 약식으로 장례가 진행되는 중이다.
최고급 유골함을 보여주자 눈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 이지욱.
슬퍼하는 그를 잠시 바라본 남만혁은 아이들이 곧 도착한다는 리쳇의 음성에 몸을 숨겼다.
얼마 후.
“이지욱 씨, 자수하세요!”
“지금이라, 도 늦지 않았, 어!”
경찰에게 이지욱에 대한 정보를 들은 소구경과 곽재우가 자수를 종용하며 그에게 접근했다.
이지욱은 마음을 다잡고 저들이 가지고 있는 쇠들을 모조리 끌어당겼다.
소구경의 총과 곽재우의 창을 비롯한 각자의 무기와 소지품들이 하늘로 솟구친다.
“지금이야!”
아이들은 일부러 헐겁게 착용하고 있던 물건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재빨리 움켜쥐고 체중을 실었다.
빌런이 소지품을 조작한다면 무게를 늘려 부하를 주자는, 도수정이 제안한 작전이었다.
주춤하는 쇠붙이들. 처음에는 얼핏 작전이 통하는 듯 보였으나.
“으악! 올라간다.”
“빨리 놔!”
어머니를 양지에 모시고자 하는 각오가 이지욱의 정신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이는 철 조작 숙련도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좋아!’
이지욱은 빼앗은 철제 도구들을 사방으로 흩뿌린 뒤 작전대로 협곡을 향해 달렸다.
아이들은 재빨리 본인 무기를 찾아 확보한 후,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이지욱을 추적했다.
“20m라고 하지 않았어? 지금 재 보니까 26m인데?”
도수정은 경찰이 알려준 빌런의 철 조작 범위를 떠올리며 트레이시에게 물었다.
“측정을 잘못한 거겠지. 산이니까 경사도 있고.”
“그런가….”
조작계 각성자는 특성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발전 속도가 천차만별이다.
이지욱은 각성 직후에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벌인 데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끊임없이 능력을 사용해왔기에 특성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멈췄다! 거리 유지해!”
협곡의 좁은 길로 끌어들인 이지욱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타당, 탕!
철 조작 범위 밖에서의 총격. 이지욱은 고개만 내밀어 아이들이 모여 있음을 확인하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 사람 말 대로다.’
추적부터 거리 유지, 그리고 총을 통한 제압사격. 이 모든 것을 예상한 남만혁은 그에게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줬다.
‘이쯤이면 되겠지.’
VZ-4를 은밀히 꺼내 나무 밑동에 숨긴 후 총성이 멎는 순간 다른 나무로 이동하며 학생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다 적당한 거리가 되자 철 조작으로 VZ-4를 우그러트렸고 충격에 반응한 VZ-4가 작동되었다.
우웅.
짙은 보라색 돔이 펼쳐지자 F반 전원이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이다. 음?”
“잡아! …윽? 조상님?”
“아, 아아.”
탄환이 사라진 총의 방아쇠를 당겨대는 소구경, 허공을 바라보며 조상을 찾는 곽재우, 단절을 할 수 없어 극심한 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도수정.
일반인의 두 배 이상의 피를 체내에 보유한 블리딩블러드는 피를 게워내는 중이고, 청색 빛에 숨어 기회를 노리던 리얼블루와 환상 구현을 통해 이지욱을 제압하려던 버추얼박스는 모든 준비가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마인 트래퍼는 애초부터 함정 대부분이 철이라 논외 대상이며 클린에어, 칸탄테, 트레이시 그웬은 전투 히어로 지망이 아니었기에 다른 아이들보다는 충격이 덜했으나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다르지 않았다.
능력의 갑작스러운 소실은 가슴 한 켠이 떨어져 나간 듯한 감각이었고 이는 패닉에 빠지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도, 도망쳐!”
도수정이 외치자 아이들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지금처럼 예상 밖의 기현상이 벌어지면, 무조건 도망쳐서 몸을 사리라는 남만혁의 조언을 대련 때마다 들었기에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격을 적중시키라는 남만혁의 요구가 있었기에 아이들이 한자리에 몰려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품에서 가스총을 꺼내는 이지욱.
꽈드득.
쇠를 뭉쳐 작은 구슬로 만들고 VZ 경계선 앞에서 도망치는 학생에게 날렸다.
특성은 보이드 존 내부에 간섭할 수 없다. 그러나 외부에서 특성을 통해 물리 운동을 얻고 진입한 물질은 여전히 운동능력이 유지된다.
발출과 동시에 소닉붐을 일으키며 VZ에 진입한 쇠구슬은 가장 뒤에 있던 버추얼박스의 어깨를 관통했다.
“끄아악!”
처음 겪는 관통상은 끔찍한 고통이었고 평소 대련을 꺼렸던 버추얼박스에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한 명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자 다른 아이들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고성이 들렸으나 말 그대로 멀다.
이지욱은 바닥을 기어가는 버추얼박스를 쳐다보다 다음 목표를 눈에 담았다.
VZ 밖으로 튀어 나간 쇠구슬을 다시 조작해 푸른 머리칼의 소녀를 향해 쏘아내는 찰나.
삐이—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더니 소녀가 사라졌다. 쇠구슬은 허공을 지나 다시 VZ를 이탈한다.
“뭐지?”
그걸 시작으로 도망치던 학생이 한 명씩 모습을 감췄고 이내 협곡에는 이지욱 홀로 남게 되었다.
효과가 끝났나 하여 보이드 존에 한 걸음 들이자 엄청난 무력감이 찾아왔다. VZ가 아직 유효하다는 걸 확인하고 뒤로 물러나려던 차, 옆구리에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컥!”
날아가며 신속히 쇠구슬을 회수해 전신을 둘러싸는 철판을 만들었으나 사방에서 가해지는 충격 때문에 금방 찢어지고 말았다.
생겨난 틈을 철 조작으로 이어 붙이기 직전, 희끄무레한 손이 비집고 들어와 이지욱의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목이 졸려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 남만혁이 위기의 순간이 오면 뱉으라던 마법의 말을 입에 담았다.
“항…, 복.”
히어로는 상대가 전의를 상실하거나 항복하면 일단 포박을 해야 한다. 빌런의 인권 존중이 이슈가 되고 가장 먼저 생겨난 법.
멀리서 데커드의 몸을 복제해 조종하던 집업미러가 이를 듣곤 연기를 해제하며 욕지기를 뱉었다.
* * *
“잘했다.”
“헤헤.”
트레이시 그웬의 정령, 레드레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했다. 정령은 자연의 일부라, VZ 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힘 중 하나다.
레드레이의 능력은 건드린 대상을 인간의 시야로는 식별할 수 없게 만드는 힘.
위기의 순간 침착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떠올리던 트레이시가 정령을 불러내 아이들을 구한 것이다.
“집업미러도 고생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더 일찍 도착했다면 버추얼박스 후배가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건 집업미러 탓이 아닙니다. 당사자도 괜찮고요.”
병상에서 깨어난 버추얼박스는 되려 자신이 느낀 이 고통을 환상 속에 구현해 보겠다며 의욕을 내는 중이다.
“하아, 제가 이럴 거 같아서 하지 말자고 했던 겁니다.”
세이프레그의 타박에 집업미러와 데커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참, 데커드 교수님.”
세 교관 사이로 들어온 트레이시가 홀로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방금 연락이 왔는데, 만혁이가 내일 집업미러 교관님 강의 때 합류하겠대요.”
“지금 어딨습니까?”
“금이현 어르신 댁이요.”
“그러면 별일 없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이리하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지욱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경찰차로 수송되던 중 괴한의 포격을 받아 놓치게 되는데.
“널 뭐라고 부르면 되지?”
유골함을 건네받은 이지욱이 묻자 왜인지 초췌해 보이는 남만혁이 답했다.
“다크 넥서스.”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