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강해지려는 의지
‘강해.’
남만혁과 같은 반 아이들의 대련을 보는 동안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받아들이는 영혼에 따라 전술이 천차만별로 바뀌는 곽재우.
지정한 대상과 물질의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도수정.
한 발의 탄만 있으면 똑같은 탄환을 개수 제한 한없이 쏠 수 있는 소구경.
1년을 F반에 군림해온 빌런, 남만혁의 허를 찌른 트레이시 그웬은 말할 것도 없다.
어설프게 테두리를 그어 만든 경기장 안에서 나를 쳐다보는 남만혁의 눈은 다른 아이들을 볼 때와는 다르다.
저기엔 어떤 흥미도 호기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칸탄테.”
“왜 나야!”
* * *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노력했음에도 앞선 아이들처럼 활약할 자신이 없다.
우리 반 아이들은 강의가 진행된 9개월 동안 그와 대등한 수준까지 전투력을 끌어올렸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요즘은 서울을 떠들썩하게 했던 킬링랫 사건이 자꾸만 멀게 느껴진다. 내가 그 사건의 주역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심리상담소에서는 무력감이 원인이라며 꼭 훈련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일에 매진해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들었다.
저런 조언은 우리 할머니도 할 수 있겠다고 구시렁거리며 밖에 나와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마운틴 짐에 도착해 있었다.
‘모르겠다.’
언데드 클럽 하우스에 있던 침낭을 깔고 뻔뻔하게 며칠만 재워달라며 부탁하니 그들 중 최고 선배라는 일식이 달각거리며 허락했다.
그때부턴 아예 마운틴 짐에 눌러앉았다. 필수로 들어야 하는 강의를 제외하면 학점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거기서 몸을 움직이며 살았다.
어느 날. A반의 마가렛은 내 자세가 많이 답답했는지, 기초적인 권각술을 가르쳐줬고 열심히 따라 했다.
또 몇 주간 그것만 연습하니 이고강이라는 해골이 이것저것 알려줬다.
“왜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나 같아서. 나도 네 나이 때 그랬거든. 아무것도 못 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이런 나를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투박하게 쓰이는 바닥의 글씨.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언데드 컨테이너에 지내면서 이고강이 어떤 사람인지 들어서 알고 있다. 다른 세상에서 활약한 용사. 라고.
달각.
-극복은 없어.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거지. 당연한 이야기야. 세상은 그런 논리로 돌아가니까.
나도 모르게 힘이 빠져 어깨를 늘어트리자 가느다란 뼈 손가락들이 내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었다.
-걱정하지 마. 그 초라하던 나도, 결국은 목적을 달성했거든.
“목적이 뭐였는데요?”
-구원.
나뭇가지로 바닥에 써 내린 두 글자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니지. 지금은 자신을 믿기 힘들 테니까, 이렇게 해보자. 내가 인간의 육체로는 익히기 어려운 기술 하나를 알려줄게.
“네?”
-이걸 해내면, 너에게도 빛나는 재능이 있는 거야. 산 아래의 아이들처럼.
무력감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게 된 건, 이 기술의 이름을 듣게 된 날부터였다.
“그게 뭔데요?”
-초가속.
* * *
합숙 3일 차.
“산을 부수고 구름을 찢는 장풍을 배워보련? 파산파운은 우리 문파 93대 조사님께서—”
선우공 할아버지는 점잖고 다 좋은 데 가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다.
“네에, 식사 가져다드릴까요?”
“흠, 고맙구나.”
첫날에는 진짜 저런 장풍이 있는 줄 알고 배우기 위해 온갖 수발을 들었으나 익힌 거라곤 마당 쓸기와 달걀 줍기 정도였다.
어제 펜션에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이건 히어로 과정에 있는 1학년이라면 누구나 채워야 하는 봉사활동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지금처럼 선우공 할아버지의 식사 수발을 끝내고 나면, 뭔가를 배우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대신 초가속을 수련하고 있다.
“허허, 요령이 없어 몸만 축내는구나. 차라리 수영을 하거라.”
“에휴, 수영 핑계 대지 마시고 직접 씻으세요.”
“뭣? 누굴 변태로 만들려고! 그게 아니라, 지금 네가 연습하는 그 보법은 기의 순환과 폐활량이 중요하다는 소리다!”
“기요? 그게 뭔데요?”
“기라는 것은 사람의 내장과도 같느니라. 어설프게 제어할 바에야 본능에 맡기는 것이 낫다. 심장이 그러하듯 말이다.”
“자세히 알려주세요.”
사흘 만에 처음으로 일방적인 요구가 아닌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 재빨리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전신 세맥으로 기가 뻗어나간 순간. 호흡을 멈추거라. 그때가 육체가 가장 활성화되는 순간이니.”
“세맥이 뭔가요?”
“세맥은—”
선우공 할아버지로부터 호흡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나흘.
“허억, 헉. 후우.”
“네 폐는 기를 많이 머금는구나. 심장 또한 이를 당연시 활용하고. 허허, 참.”
이고강 오빠도 내게 숨이 길다며 초가속과 잘 맞다는 소리를 하긴 했었다.
“좋은 거죠?”
“아무렴. 호흡공은 네가 독보적일 게다. 그리고 축하한다. 성공했구나.”
“헤헤.”
합숙이 시작되고 7일째에 처음으로 초가속을 성공시켰다. 그때부터 대련이 있는 마지막 날까지 맹훈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14일 차 아침.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마당에 선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질 게다.”
“아, 할아버지! 이럴 때는 빈말로도 이길 수 있다고 해주셔야죠!”
“그놈은 독접이 인정한 내공 괴물이다. 나 때로 치면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는 소린데…. 어려울 게다.”
“씨이.”
“허나, 패자가 주목받는 경기도 있는 법. 그러니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너를 보이고 와라.”
“…네!”
* * *
정신이 몽롱하다. 세 번째 초가속을 사용한 직후 기억이 없다. 일단 남만혁에게 주먹을 뻗은 거 같기는 한데….
“일어났어요?”
눈을 뜨자 의사 선생님이 다가와 몇 가지 기구로 측정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축하해요.”
“네?”
“각성하셨어요. 칩 로그를 확인해보세요.”
“각, 각성이요? 어어. 스테이터스 로그!”
【새로운 특성을 습득하셨습니다.】
【명칭 선정 중…, 완료.】
【특성 : 버프 송 / 그레이트 브레스(new)】
돌연 눈물이 쏟아졌다. 아파서도,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아서도 아닌. 그저 나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이 순수하게 기뻐서였다.
아카데미에 왔으니 저절로 히어로가 될 거라는 꿈같은 희망만으로 살아왔던 날들이 떠올랐다.
이어 그런 나 자신을 인지하고 무력감에 빠졌던 날과 무작정 찾아간 마운틴 짐에서의 수련. 그리고 선우공 할아버지의 가르침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눈물로 감정을 털어낸 나는 의료 천막을 나서며 되뇌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 * *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피 웅덩이는 출혈로 인한 내 피였고 칸탄테의 기절은 단순한 산소 부족이었다. 3초 만에 산소마스크를 썼으니 후유증도 없을 테지.
“끄으응.”
전신이 뻐근하다. 나만 고생이지 나만 고생이야. 어흐.
옆 천막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 하니 칸탄테가 재각성을 한 모양이다.
설마 1학년 때 재각성자가 나올 줄은 몰랐다. 막상 기프트를 또 받았다고 생각하니 살짝 배 아프다.
큼. 아니지. 어른이 애들이 사탕 먹는 거 보고 침 흘리면 쓰나.
그리 자책하는 동안 큐링 힐의 치료가 끝났다.
“얼굴이 좋으시네요.”
“저요? 하하. 그렇게 보이셨다면, 다 마를린 님을 소개해주신 남만혁 학생 덕분입니다.”
엘리트 중 엘리트. 너무 뛰어나 병원 밖에서 돌려야 할 정도로 영향력이 높은 의사가 바로 마를린이다.
원래 지금도 그 사람 밑에서 배우고 있어야 하는데, 내 두피 치료를 위해 국내로 잠시 들어왔다.
온 김에 합숙도 따라온 거고. 전에 이야기했을 때는, 내년에 돌아갈 계획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면, 나중에 밀키 마이닝 의료 재단에 가입해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전에 우연히 들었습니다. 지인분이 거기서 일하신다고요.”
리쳇이 슬쩍 전달한 거다.
“네. 병원을 하늘에 띄운다네요. 권력과 파벌, 국경에서 자유로운 의료 시설을 만든다고 합니다.”
넥서스에 방이 남아돌아서 일부를 병동으로 개조할 예정이다.
“성공만 한다면 대단하겠습니다.”
“무조건 성공합니다. 그러니 미리 가입해 입지를 다져놓으시는 게 어떠신지.”
“그 정도입니까?”
“확실합니다.”
“으음. 고려해보겠습니다.”
합숙에 온 뒤로 1일 1회 큐링 힐에게 영입 멘트를 날리고 있다. 세계 제일의 힐러가 될 양반이라 이런 노력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지금은 마를린에게 배울 게 많으니까 일단 풀어 두고 아카데미 졸업에 맞춰 당겨오면 되겠지.
‘약은 꾸준히 치면 되고.’
치료가 끝나고 천막 밖으로 나오자 F반 애들이 식당에 모여 있었다.
“왔다!”
“남 교수! 괜찮아?”
“피가 부족하면 말해라.”
괜찮다며 손을 흔들자 구석에서 나를 살피던 데커드가 손뼉을 쳐 이목을 모은다.
“클린에어와 버추얼박스는 저와의 대련을 통해 훈련 성과를 확인했습니다. 리얼블루와 블리딩블러드는 남만혁 학생과의 대련을 요청했고요.”
“트래퍼는요?”
“마인 트래퍼 학생은 경기장에 먼저 가 있습니다. 준비할 게 많다더군요.”
오. 마음에 든다. 본인이 유리한 전장을 만들고 있다는 거잖아. 기특한걸.
“트래퍼가 준비되면 출발하죠.”
우웅.
데커드가 홀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 연락이 왔군요. 바로 갈까요?”
식당을 나서자 방금까지만 해도 그저 흔한 펜션의 마당이었던 공간이 서바이벌장처럼 지붕이 없는 집들과 커다란 타이어, 드럼통 따위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START’라고 쓰인 종이가 붙은 라디오가 발에 채여 집어 드니. 찰칵, 소리와 함께 테이프가 재생되었다.
-마인 트래퍼다. 먼저 사과부터 하지. 나는 이런 식으로 싸우는 방법밖에 모른다. 함정을 무사히 돌파하면 너의 승리다.
철컥.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워진 벽의 창문에서 미약한 격발음이 들려 즉시 앞으로 굴렀다.
방금까지 내 머리가 있었던 곳을 지나가는 작은 구슬.
“와, 재밌겠다.”
“자, 위험하니 여러분은 물러서세요.”
데커드가 반짝이는 눈으로 이쪽을 보는 아이들을 데리고 열 걸음 이상 떨어진다.
나는 바닥을 구르는 캡슐을 집어 들고 반으로 쪼갰다. 안에서 걸쭉하게 흘러나오는 붉은 페인트.
-방금 그 캡슐을 3회 이상 맞거나 급소에 적중당할 시 네 패배다. 그럼 행운을 빌지, 프로페서 남.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트래퍼의 목소리. 이 자식, 내가 피할 걸 예상하고 녹음했네. 이거 맞았으면 꼴이 우습게 될 뻔했어.
파이브 파이트 리그에서 트래퍼는 항상 상대 팀 한 명 이상을 묶거나 격퇴하곤 했다. 리그 평점 자체는 트래퍼가 나보다 훨씬 높다. 죽은 적이 거의 없거든.
그런 녀석이 작정하고 필드를 짰으니 골머리를 앓을 법도 하지만…,
상성이 안 좋다.
필드에는 필드로 대응하는 게 정석 아니겠는가.
녀석의 함정 대부분은 화약을 사용한다. 그리고 화약은 수분을 머금으면 끝이다.
“미르토스.”
그리스의 해변을 구현하자 가설되어 있던 벽과 타이어들이 물에 둥둥 떠다닌다.
모래사장에서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 공기 주입식 고무보트와 노를 꺼내 물 위에 띄웠다.
저 앞에 GOAL이라 쓰인 나무판자가 파도에 흔들리기에 노를 저어 다가가 집어 들려는 순간.
퓩.
보트에 무언가가 꽂히는 소리가 났고 내가 앉은 엉덩이 뒤로 작살이 튀어나왔다.
이 미친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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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