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블리딩블러드&리얼블루
단박에 수압이 바뀌면 아무래도 목숨이 위험할 수 있기에 서서히, 하지만 고통은 느낄 수 있게끔 해변을 심해로 변환한 뒤. 다량의 매직 미사일과 함께 쏘아져 나가 녀석의 복부에 침투경을 먹이기 직전.
탁.
팔목이 제삼자에게 붙잡혔다.
‘데커드?’
우락부락한 육체로 변한 데커드가 고개를 저으며 눈으로 트래퍼의 얼굴을 가리킨다. 흰자를 보인 채 축 늘어진 녀석.
‘이 자식이….’
구현을 해제하자 트래퍼의 상태를 확인한 데커드가 녀석을 의료 천막으로 옮겼다.
“마인 트래퍼 학생은 정신을 잃은 것뿐이라고 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 다행이에요.”
클린에어의 안도에 다른 아이들이 동조한다.
다행은 무슨 다행! 나만 일방적으로 처맞다 끝났는데.
…라고 호소해봤자 애잔한 눈빛만 돌아올 걸 알기에 속으로 삼키고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블리딩블러드, 올라와.”
“오늘은 다를 거다. 남만혁.”
본인의 피를 조작하는 능력. 숙련도에 따라 뽑아낸 피의 강도를 높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혈검’을 만들어 근접전 위주로 전투를 한다.
데커드의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자 지그재그로 스텝을 밟으며 내게 다가오는 블리딩블러드.
확실히 이전 월말 평가전 때보다는 몸놀림이 가볍다.
혈류를 가속해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데다 식스센스를 익힐 정도로 체술에 재능이 있으니 이런 성장이 놀랍지만은 않다.
‘위즈.’
“야호!”
휘릭.
어깨를 찌르는 혈검이 위즈의 꾸물럭대는 덩어리에 막혀 튕겨 나간다.
이어 슈트와 망토가 완성되자 블리딩블러드가 혀를 차며.
“또 그건가.”
“예! 여러분의 마법 소년, 위즈예요!”
거리를 벌린 블리딩블러드가 자세를 낮추며 나를 노려보다 숨을 고른다.
“블러드 혼!”
기합과도 같은 기술명을 외치자 녀석의 피부 위로 붉은 피막이 생겨나더니 한순간에 피의 창으로 돌변해 내 목을 찔러왔다.
눈꺼풀이 오르내리는 그 짧은 사이에 내 목전에 도달한 이 피 창의 끝을 잡은 건, 반쯤 우연이었다.
위즈의 입을 막을 셈으로 손을 올리고 있었던 게, 마치 예측한 것처럼 막아냈다.
“칫.”
“흐아악!”
혀를 차는 블리딩블러드와 하악질을 하는 위즈.
‘내 입으로 그런 이상한 소리 좀 내지 마라.’
“놀, 놀란 걸 어떻게 해요! 마법 소년은 예민하다고요!”
경기장을 벗어나 한참 뒤로 밀릴 정도의 충격임에도 내 손은 피의 창을 놓치지 않았다.
창의 형태로 결정화되었던 피는 이내 액체로 변해 블리딩블러드에게로 돌아가 피부로 흡수되었다.
“후으으.”
녀석은 붉은 연기를 입가로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새빨간 전신과 이마에 돋아난 핏빛 뿔.
지금 블리딩블러드의 외견은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참, 그리고 보니 너랑 도수정 핼러윈 때 데이트 했다며?”
“뭐, 뭐? 우리가?”
빠르게 도수정의 눈치를 살피는 블리딩블러드.
‘정신은 그대론가.’
블리딩블러드는 체내의 피가 고갈될수록 정신연령이 떨어진다. 본인이 말하길, 피가 모자라면 사고의 속도가 느려져 본능에 충실하게 된단다.
방금 대량의 피를 사용했음에도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건, 그만큼 체내 혈액량과 회수율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소린데.
‘한 달 만에 이게 되나.’
이전 월말 평가전에서는 혈검을 대련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면 말고.”
“…큭, 디아볼릭 네일!”
이번에는 세 개의 피 칼날이 경기장을 가로질러 내 머리와 상, 하체를 노리고 날아왔다.
중간에 걸리는 나무둥치들이 두부처럼 썰려 나가는 거로 봐선 보통 절삭력이 아닌 듯해 살짝 뛰어 몸을 수평으로 눕혀 칼날 사이로 피했다.
서걱.
아래로 늘어졌던 망토의 하단이 잘리는 모습에 침음을 흘리며 블리딩블러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내가 녀석에게 도달하는 속도보다 피 칼날이 회수되었다 다시 방출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블러드 혼!”
다시 한번 튀어나온 피의 창은 이전보다 빠른 속도였고 내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가슴팍을 때렸다.
위즈가 다른 부위를 덮고 있던 슈트를 회수해 가슴에 뭉쳤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관통되었을지도 모를 위력.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던 나는 잘린 나무둥치에 머리를 박고서야 멈췄다. 바닥에 닿은 정수리. 하늘을 받아들이듯 벌어진 다리.
내 평생 겪어본 수치스러운 자세 5위 안에 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치욕스러운 모습.
정적이 흐르는 와중 어디선가 셔터음이 들렸다.
찰칵.
“찍었어?”
“응.”
“크큭, 큭큭.”
“1학년 단체 톡에 올리자!”
“이미 올렸지.”
“꺄학학. 이거 봐!”
이 자식들이.
피 창을 맞은 위즈가 내 품 안으로 들어왔고 육체 강화 상태가 풀어졌다.
꾸물….
위즈는 오늘 너무 무리해서 좀 쉬어야겠단다.
‘고생했다.’
꾸물럭~
머리의 흙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서자 블리딩블러드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피 칼날이나 창을 뽑아내지 않고 저렇게 다시 혈검을 든 거로 봐선 체내 혈액량이 아슬아슬한 모양.
‘한 번 밀어붙여 봐?’
언데드 클럽을 동원하면 녀석을 한계까지 몰아넣을 수 있을 거 같아 일식이와 두식이를 부르려는 때에.
꿀꺽, 꿀꺽.
언제 가져다 놨는지 경기장 구석에 놓인 2L짜리 물통을 들고 입에 들이붓는 블리딩블러드.
“하. 약점 보완도 연구해 왔다 이거냐.”
저 녀석은 물만 있으면 피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다. 다시 자라나는 이마의 붉은 뿔과 전신의 피막.
“졌다.”
내 항복선언에 주먹을 불끈 쥐며 하늘로 치켜드는 블리딩블러드.
“예쓰!”
그렇게 좋나. 어어, 왜 울어. 사내자식이.
클린에어와 도수정의 부축을 받으며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블리딩블러드.
아니, 부축은 내가 받아야지. 골절 안 된 게 기적인데 지금.
“끄응.”
블리딩블러드의 저 디아볼릭 폼? 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저 공격 방식은 내가 봐도 상당히 괜찮다.
칸탄테의 초가속처럼 폭발적인 속도는 없어도 물만 보충되면 전투 시작부터 끝까지 같은 퍼포먼스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30분 뒤 마지막 경기를 진행하지요. 남만혁 학생은 의료 천막에 다녀오세요.”
체력이 상당히 떨어졌기에 군말 없이 의료 텐트로 향했다.
우리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의사가 내게 피로 회복 촉진제가 지금 상황에 좋다며 추천하길래 한 방 맞고 나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온몸에 활력이 돈다.
“역시 진품은 다르구만.”
빌런으로 활동할 당시 이런 회복제를 많이 맞았었다. 전부 어둠의 루트로 구한 거라 정상적인 게 없어 한동안 부작용에 시달린 적도 있었고.
“빨리 와~”
쟤는 왜 또 벌써 올라가 있냐.
휴식 시간이 꽤 남았음에도 경기장 중앙에서 팔을 흔들며 나를 재촉하는 푸른 머리칼의 소녀.
리얼블루의 특성은 블루 다이브. 파란색만 있으면 거기에 스며들 수 있는 능력이다.
“남만혁 학생, 준비됐나요?”
“네. 시작하죠.”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으나 사실, 앞선 아홉 명보다. 이 녀석과의 대련을 가장 기대하고 있다.
삐익—
경기 시작 호각이 울리자 리얼블루가 한 무리의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내 후방에서 다시 나타난 리얼블루는 관자놀이를 노리고 돌려차기를 하고 있었다.
빛에 다이브를 한 리얼블루는 자신의 시야가 닿는 공간 안에선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
물질에 큰 변화를 줄 정도로 물리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지금처럼 다시 나와야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기동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다만, 본인의 체모로 제작한 도구가 아니면 다이브 도중 모두 떨어져 나가기에 날붙이 같은 무기를 착용하지 못하는 게 좀 아쉽다.
그렇다고 체술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맞고 버티는 강화계나 위치를 특정하는 탐지계 각성자에게는 약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좀 지친 상태긴 해도 네 돌려차기 정도는 그냥 막—”
뻐억!
아야 했다. 그런데 왜 하늘을 날고 있지?
블리딩블러드 때처럼 꼴사납게 넘어지는 것만큼은 면하기 위해 허공에서 필사적으로 버둥대 균형을 잡았고 간신히 발부터 땅에 닿았다.
바닥을 긁으며 삼점착지를 한 후 고개를 들었지만, 경기장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목덜미 부근에 오한이 느껴져 급히 엎드리니 뒷머리 위로 강한 돌풍이 스쳐 지나간다.
“앗! 어떻게 피했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나를 내려다보는 리얼블루.
“네 공격 패턴이야 뻔하지.”
“그런가?”
화사하게 웃으며 다시 파란 빛무리로 변해 사라지는 리얼블루.
사각에서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선 감지하는 게 우선이기에 나는 영역을 전개하고 리얼블루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5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데커드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날 무렵.
“큭.”
영역을 통해 빛무리가 내 턱 아래에 집중되는 걸 간신히 감지하고 머리를 뒤로 확 넘겼다.
“안녕?”
그러나 내 얼굴 바로 앞에 나타나는 리얼블루의 무릎. 나는 그대로 니킥을 인중에 맞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의료 천막의 병상이었다.
천막의 천장에 달린 하얀 전구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X끼들.”
오늘의 F반은 내가 아는 그 빌빌대던 꼬맹이들이 아니었다.
“많이 컸네.”
* * *
블리딩블러드. 합숙 5일째. 마을에서 동떨어진 산중의 초가집.
“…….”
“오늘도 다른 말씀 없으시면, 팽이버섯 죽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입가를 움찔거리는 적발의 노인.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블리딩블러드가 이윽고 누런 장판에서 엉덩이를 떼자 노인이 헛기침을 한다.
크험!
그리곤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고 거기엔 붉은 글씨로 ‘돼지불백.’이라 적혀 있었다.
“구해보겠습니다. 오적수 어르신.”
“음.”
오적수. 그는 60년 전, 혈귀라 불렸던 빌런이었다. 사람을 죽이기 직전 히어로들에게 사로잡혀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오랜 기간 치료를 받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으나 곧장 감시 대상으로 지정되고 지리산에 유폐되었다.
정부가 진행한 ‘치료’는 단전을 폐하고 뇌의 일부를 덜어내며 혀를 자르는, 아주 비인도적인 수술이었다.
기를 모을 수 없는 몸. 욕망이 거세된 뇌. 대화가 불가능한 혀.
좌절하기에 충분한 조건들이었으나 오적수는 그럼에도 삶을 택했다.
그것이 자신이 괴롭힌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죗값일 테니까.
20년 전부터 히어로 지망생에게 무술을 전하는 것도 업보를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하는 작은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학생들에게는 그저 몸을 보하는 수준의 기초공과 초식 정도만 가르쳐왔다.
‘마공은 안될 말이지. 암.’
히어로는 물론이고 정부의 블랙리스트에서 조차 잊혀진 오적수였으나 그는 누구보다 자신과 마공을 경계했다.
다만, ‘기’를 감지하는 이들의 숫자가 점차 줄어 근래 들어서는 백에 하나도 보기 힘든 상황이다.
게다가 최근엔 무공을 익히기보단 봉사활동으로 온다고 하니, 아무리 오적수라 해도 의욕이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본래 올해부터는 시늉만 하고 학생을 받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블리딩블러드를 보곤 생각이 달라졌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블리딩블러드입니다. 이름이 길어 불편하시다면, 러드라 불러주십시오.”
‘천, 천혈지체!’
혈마의 무공을 무덤까지 가져가려던 오적수의 각오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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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