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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10화 (110/201)

<110화>

핑키 (1)

“알은 왜 챙겨?”

얼굴을 구기며 묻는 마가렛.

종일 개미에 시달렸으니 저럴 만도 하지.

“색이 다르잖아.”

“그러네요, 이것만 벚꽃처럼 분홍색이에요.”

“우와 그레이스. 너 남 교수 편드는 거야?”

“그, 그런 게 아니라. 저는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한 것뿐이에요.”

살짝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언젠가 매저드 교수는 ‘마법사라면 모든 물질에 자신의 마나를 투사해 본질을 파악하려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마법에 한해서는 말 잘 듣는 제자였기에 이 독특한 색깔의 개미알에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불어 넣었고.

“오?”

알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졌다. 새하얗고 흐릿한 형체가 알 안에서 버둥거리더니 이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어 막을 찢고 나온다.

몸 전체, 심지어 겹눈까지 핑크색인 어린 개미는 주변을 둘러보다 알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내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사각.

“주인? 내가?”

고사리처럼 돌돌 말린 더듬이를 자기 앞 다리로 쓸어 넘기는 개미.

사삭.

“…그러니까. 여기를 지배하고 싶으니 도와달라?”

내 마나를 머금은 덕인지 녀석의 사념이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이곳에는 자신의 경쟁자가 수도 없이 많고 외부에는 ‘긴 혀’라는 천적이 침입해오는 위험한 곳. 자신을 도와주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

뭐 이런 식의 사념이었다.

“남 교수. 그냥 가자. 어차피 개미굴을 탈출하면 끝이잖아.”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마가렛은 이 개미의 요구를 꺼리는 기색이었다.

“아니, 이 개미를 돕는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마가렛.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

퀸이 마가렛을 다독이며 내게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오지를 가든 현지인의 조력을 받는 게 우선이다. 그들은 대를 거쳐서 그 환경에 적응한 사람들이니까.”

“네 말은 이 개미의 도움을 받자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 먼저 돕는 거고?”

“잘 알아듣네.”

“…알았어. 그런 이유라면 참아볼게.”

“저, 만혁. 베이스캠프는 어디에 지을 건가요?”

여기는 땅굴 앤트가 몰살당한 곳이라 좀 이동해서 깨끗한 방을 기지로 삼을 생각이었으나 저 개미 덕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빠각, 뜨득, 그극.

막 태어났음에도 벌써 땅굴 앤트의 갑각을 부숴 입에 쑤셔 넣는 분홍 개미.

그뿐만 아니라 실시간으로 몸집이 불어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성장세가 빠르다.

아마 며칠 내로 방금 죽은 여왕개미 수준까지 커지지 않을까 싶다.

때아닌 개미 먹방을 멍하게 지켜보던 마가렛은 이내 정신을 차리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B반을 가리켰다.

“재들은 어떻게 하게?”

명을 달리한 여왕개미의 먹이가 될 뻔한 B반 애들은 겉으로만 봐도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다.

“쉬게 한 다음 탐색조로 돌리지 뭐.”

아까 우리가 베이스캠프 이야기를 할 때 질색하는 눈치였다. 아마 탈출하는 쪽을 생각하고 있었겠지.

“괜찮을까?”

“나가고 싶으면 직접 발품을 팔아야지. 그게 동기부여도 될 테고.”

그때 B반 무리가 쑥덕대더니 학생 하나가 다가왔다. 푸석푸석한 머리, 퀭한 눈, 깨진 안경. 전신으로 ‘나 고생했어.’라고 표출하는 듯한 외관.

“우리도 네 의견에 찬성이야. 남 교수.”

오~ 곧 죽어도 히어로 지망생이라 이건가. 목소리는 달달 떨리는데 하는 말은 꽤 강단이 느껴진다.

“오냐. 힘내라.”

그러고는 라이트 마법으로 빛 구슬을 만들어 B반 녀석들의 머리 위에 띄웠다.

이끌리듯 고개를 들고 빛을 바라보다 이내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B반.

내 경험상 저렇게 쏟아내고 나면 좀 나아지더라. 뇌리에 깊게 박혀 있던 괴로운 장면들이 희석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핑키라고 하죠.”

“뭐?”

“저 개미요. 한동안 같이 지낼 거 같아서 이름을 붙였어요.”

핑키? 진심인가?

극악의 작명 센스에 속으로 한탄하던 중, 열심히 동족을 씹고 뜯던 분홍 개미에게서 사념이 날아왔다.

사각!

마음에 든단다.

“좋댄다.”

“정말요? 핑키야. 이것도 먹어.”

퀸이 땅굴 앤트의 잔해를 주워다 주는 족족 냠냠 먹는 핑키.

마가렛도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더니 이내 근처에 널브러진 땅굴 앤트 사체를 끌고 와 핑키 앞에 내려놓는다.

사각, 사각.

그러곤 자기가 주는 걸 먹는 핑키를 보고 신기해하는 마가렛.

“먹이는 퀸에게 맡기고. 너는 나랑 집 짓자.”

“집? 어떻게?”

시간은 좀 걸리지만, 흙집은 쉽게 지을 수 있다. 마침, 내 미르토스 해변에 조개도 살고 있으니 적당히 부숴서 조합하면 초기 형태의 시멘트도 만들 수 있고.

“내가 하는 거 보고 따라 해. B반! 너희도 이리 와서 도와.”

“아, 알았어.”

* * *

시험 3일 차.

진흙을 구워서 나는 도자기 향과 비릿한 바닷냄새가 공존하는 공동에는 단 하루 만에 세 채의 집이 들어섰다.

“만혁의 집은 좀 다르네요.”

예리한데?

“착각이야, 착각. 흙이 새어 들어와서 기와를 한 겹 더 얹은 것뿐이야.”

비도 눈도 올 일이 없는 지하에 웬 기와냐고 묻는다면, 개미 때문이라 하겠다.

밤사이, 어느 정도 성장을 끝낸 핑키가 알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아침 무렵에 태어난 새끼 일개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천장을 기어가는 바람에 흙이 비처럼 쏟아져 결국 기와를 만들게 됐다.

아, 참고로 내 집은 퀸이 의심한 대로 2층이 맞다. 공사판의 스페셜리스트, 일식이를 동원해서 층을 하나 더 올렸다.

“저기….”

퀸과 대화를 나누던 중, B반 대표가 찾아와 머쓱한 얼굴로 우릴 부르곤 말을 이었다.

“먹을 거 없어?”

우리는 첫날부터 공복에 시달렸다. 하루는 어떻게 참아도 이틀째부터는 미칠 노릇이었는데, 마가렛이 핑키의 먹방을 보다 자기도 먹겠다며 불에 땅굴 앤트를 불에 구웠다.

퀸도 나도 미간을 찌푸렸으나 막상 입에 넣고 보니 생각보다 괜찮더라. 약간 대게찜 느낌?

우리는 그렇게 허기를 해소했는데, B반은 도저히 못 먹겠다며 차려준 음식을 마다했었다.

“개미찜 말고는 없지.”

“…알았어.”

“어지간하면 그냥 먹어라. 다른 문화의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내 말에 걸음을 멈추고 잠시 나를 쳐다본 녀석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무리로 돌아갔다.

“만혁아, 핑키가 이상해.”

마가렛의 말에 얼른 핑키에게 가자 녀석은 돌돌 말린 더듬이를 미친 듯이 좌우로 휘젓고 있었다.

“음, 아.”

사각, 사각!

소중한 일개미들이 죽고 있으니 도와달란다.

“퀸, 네가 가봐.”

“네!”

사정을 설명해주자 퀸은 망설임 없이 해당 위치로 날아갔고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전신에 초록색 액체를 묻힌 채 돌아왔다.

“끝났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근에 또 다른 여왕개미가 탄생한 듯했다. 아마 핑키가 말한 경쟁자 중 하나겠지.

“핑키, 저런 개미 얼마나 있냐.”

녀석은 더듬이를 앞발로 만지작거리더니, 자신과 같은 존재가 30체 정도 있을 거라고 답했다.

“음…. 병정개미 만들 힘으로 일개미 몇이나 만들 수 있냐?”

사각.

뭘 먹느냐에 따라 다르긴 한데, 일반적으로 비율이 10:1 정도란다. 나는 잠시 고민한 후 결단을 내렸다.

“일개미만 계속 만들어. 병정 역할은 우리가 할 테니까.”

더듬이 잘리면 멍청해지는 건 일개미나 병정개미나 똑같다.

약점을 쥐고 있는 한 우리가 질 일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사가각!

그러면 침략자는 어떻게 막냐는 핑키의 말에 나는 손가락으로 B반과 나를 가리켰다.

“여기로 오는 통로는 두 개뿐이니까. 우리만으로도 충분해.”

핑키는 믿겠다며 일개미 생산에 집중했다.

고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해보면 알겠지만, 초반에 병력생산 대신 자원채집에 몰빵했는데 중후반까지 버텼다? 그럼 컨트롤이고 운영이고 필요 없다. 폭발적인 물량으로 그냥 찍어 누르면 되거든.

지금 내가 하려는 게 그거다.

* * *

4일 차.

퀸과 마가렛의 분전 덕에 주변의 안전이 확보돼서인지 어제 아침에 나간 일개미들이 오늘 돌아왔다. 등에 동물이나 거대 곤충을 얹어서 말이다.

핑키는 환장하며 먹어댔다.

일개미가 가져온 동물 중, 토끼나 조류를 닮고 그나마 손상이 적은 것들은 우리가 먹었다.

시험을 치르는 동안 아무것도 안 먹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B반도 끝내 후추 뿌린 토끼고기에 함락됐고.

“잘 먹었어. 시킬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으면 개미찜도 줄 때 먹어볼 걸 그랬네.”

“그러게, 내가 쟤들 개미찜 해먹을 때 얻어먹자고 했잖아!”

셋 중 하나는 다수결에 의해 의견이 묵살됐었는지 불퉁한 목소리를 내었고 B반의 안경 리더가 미안하다며 달랜다.

그러고는 자기네들 구역, 뒤쪽 통로를 지키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핑키. 이 먹이들 바깥에서 가져오는 거지?”

사각.

그렇단다.

“바깥은 어때?”

사가각.

핑키는 인간이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라 일축했다.

나날이 지성이 늘어나는 녀석의 판단이니 아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사각.

“천적 때문에?”

‘긴 혀’라는 본인보다 족히 열 배는 큰 괴물이 밖으로 나간 일개미 절반을 먹어 치웠다고 한다. 어미 때부터 자신들을 괴롭혀온 놈이라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물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개체는 아닌 듯싶다.

애초에 10일만 버티면 되는 우리가 그런 무리수를 감행할 이유도 없고 해서 인근 경쟁자들을 처리하는 것에 집중했다.

바깥에서 들여온 먹이들은 동족을 포식할 때에 비하면 세 배 이상의 효율을 냈고, 이는 모조리 일개미의 생산에 재투자되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핑키의 입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먹이를 업은 일개미의 행렬을 보며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오늘부턴 병정개미 만들어.”

사각!

다음 날.

우리는 이곳과 유사한 형태를 가진 공동 33곳을 단 하루 만에 점령했다.

물론, 중간에 여왕개미끼리 연합한 무리가 소소하게 저항했으나 말 그대로 소소했던지라 퀸이 나설 것도 없이 핑키의 군세에 의해 찢겨나갔다.

역시, 어느 세상이건 물량에는 장사 없다.

* * *

“이틀 남았나.”

만 단위로 불어난 일개미가 끊임없이 핑키에게 먹이를 공급하는 모습을 진흙집 2층에서 느긋하게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순간, 첫날 이후 조용하던 위즈가 갑자기 품속에서 꾸물거린다.

“어우 씨. 놀래라. …긴 혀를 사냥하자고? 왜?”

꾸물.

‘불가능에 도전해야 진정한 마법 소년!’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사념을 던지기에 싹 무시했다.

9일 차.

원하면 언제든 안전하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긴 혀라는 괴물이 없었다면 무리해서라도 7일 차쯤에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사각.

공동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해진 핑키는 기와 위에 누워 일개미가 가져온 산딸기를 입에 넣는 나를 겹눈으로 바라본다.

“왜.”

사각.

“언제 가냐고? 보자, 10시간쯤 남았네.”

들어오자마자 스톱워치를 켜놨으니까, 남은 시간은 확실하다.

사가각.

“응?”

사각, 사각.

높아진 지능만큼 길게 이어진 녀석의 말을 요약하면, 떠나기 전에 ‘긴 혀’를 함께 처치하자는 소리였다.

굳이 그려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 내가 거절하려는 찰나. 어느새 나타난 퀸이 내 옆에 앉는다.

“일개미들이요.”

“왜.”

“우리가 사라지면 더 많이 죽을 거예요.”

서두에서 이미 다음에 나올 말을 직감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거 봐.

“알았다.”

“그러지 말고 핑키를 도와서—, 네?”

“알았다니까. 바깥에서 너한테 한 소리 듣느니 실패하더라도 한 판 붙고 말지.”

“만혁….”

일단 지르긴 했는데, 실물을 봐야 견적이 설 것 같아 뒤에 마가렛과 퀸을 달고 그 괴물이 자주 출몰한다는 곳으로 향했다.

“여기야?”

사각.

일개미 하나가 길을 안내했고 녀석은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공동으로 우리를 데려왔다.

구멍의 넓이로 놈의 체격이 대충 짐작이 간다.

“이 정도면 그래도 할만한데?”

“그러게요.”

“오면 내가 붙잡을게.”

퀸과 마가렛도 걱정과는 달리 여왕개미의 절반 정도 되는 구멍의 크기에 안도한다.

그리고 그때.

쐐액!

천장에 난 구멍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고 잠깐 정신을 파는 사이 내 옆을 기어가던 일개미 하나가 순식간에 끌려 올라가 어두운 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방, 방금 그건.”

놀란 얼굴의 퀸.

“썩을.”

혀.

저 커다란 구멍은 괴물의 혀가 지나는 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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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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