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작센&안나벨&FF
“병원?”
임시 조례가 끝나고 데커드가 교실을 나가자 반 아이들은 작센과 안나벨 곁으로 모였다.
“그래. 폭포 훈련 도중 경추를 다쳐 반년간 식물인간으로 살았다! 재밌는 경험이었어, 으하하!”
1년 꿇었다는 거네.
‘저건 내버려 둬도 되겠어.’
달인계 각성자는 내가 굳이 붙잡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 특성이 무기에 관한 모든 걸 알려주기 때문에 해당 병기에 맞는 몸만 만들면 평균 이상은 간다.
해서, 나는 아까부터 이 악물고 내 시선을 피하는 옆자리의 유령, 안나벨에게 말을 걸었다.
“야.”
“…저요?”
“널 누가 구현했냐니까.”
우당탕, 쿵.
내 앞자리인 버추얼박스가 의자 채로 몸을 기울이다 넘어졌다. 나는 한심한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모르는 척하지 말고.”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다? 계약이나 제약 같은 게 걸려 있는 건가.
“누구에게도?”
“네. 절대.”
앞 머리카락 너머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그렇게 한동안 눈싸움을 벌이다 내가 항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알았어.”
“…그게 끝이에요?”
궁금하기는 한데, 추궁해서까지 알고 싶은 정도는 아니다.
“하아아.”
옆에 다가와 한껏 기대한 눈으로 지켜보던 버추얼박스가 긴 한숨을 뱉으며 아쉬워한다.
“넌 왜 실망하냐.”
“롤모델을 찾을 기회를 놓쳤잖아.”
“눈앞에 그 롤모델이 만든 결과물이 있는데?”
“결과물? 아! 오, 오오! 영감, 영감이 떠오른다!”
버추얼박스는 그대로 짐을 챙겨서 기숙사로 달려갔고 나는 멀뚱히 서서 내 눈치를 보는 녀석을 불렀다.
“안나벨.”
“네?”
“너는 왜 꿇었냐.”
“꿇, 꿇다니요! 저는 작센처럼 유급한 게 아니라 이번 기회에 학년 과정을 마치라는 프리실라 언니의 요청 때문에 도서관에서 나온 거라고요.”
흥분하면 말을 막힘없이 하는 스타일이구나. 이런 애들이 보통 실전에도 강하다.
아무튼 이어지는 녀석의 사연을 들어보니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을 정상적으로 마쳐야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주인’이 제약을 걸어둔 모양이다.
‘얘도 클럽 회원으로 받을 정도는 아니네.’
나는 뉴페이스 둘에게 관심 끊기로 했다.
* * *
[2052년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입학시험]
“드디어 왔어. 엄마.”
나이 17세, 히어로 명 FF, 특성 프로즌플라워. 얼음으로 된 꽃을 구현하고 조건에 따라 변형 및 증식 가능.
낡고 헤진 야구모자,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두꺼운 코트, 때 묻은 목장갑. 그리고 말할 때마다 나오는 새하얀 입김.
FF가 지나가는 곳 근처의 학생들은 모두 턱을 떨며 추위를 호소했다.
“으, 추워!”
“쟤 때문인가 봐.”
“저리 가!”
“우리 애 가까이 오지 마라.”
히어로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기만 하면 장래가 보장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극성스러운 부모는 매해 존재해왔고. 그때마다 지금과 같은 크고 작은 트러블이 일어났다.
FF는 입술을 꽉 물고 사람들의 시선과 욕을 참아냈다.
‘엄마.’
0도.
FF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항상 0도에서 살아왔다. 소녀의 아버지는 빌딩의 외벽을 청소하다 보조 직원의 실수로 추락해 죽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 바깥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붉은 조명 아래에서 어떻게든 돈을 벌어 왔다.
사람이 몇 살지도 않는 삭막한 동네의 노인들은 FF를 저주받은 아이라며 소녀를 손가락질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울지 말라며 품에 안았다.
FF는 나중에야 그 포옹 한 번에 어머니의 수명이 몇 달씩 줄었다는 걸 깨달았다.
12살이 되던 해. 소녀의 어머니는 행복한 히어로가 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다.
“혹시 빌런 아니니? 아들! 얼른 비슷하게 생긴 범죄자 있나 검색해봐.”
5년. 돈 한 푼 없이 사회로 내던져진 아이가 타락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엄마, 한국에 얼음 폭탄 터트리는 빌런이 있대!”
“뭐? 이리 줘봐!”
학부모는 곧바로 학생의 홀로폰을 빼앗아 112를 눌렀다.
‘엄마.’
소녀가 히어로 아카데미에 지원한 건, 스스로가 이 세상에 준 마지막 기회였다.
“예! 여기 빌런이 있다니까요. 사람들 눈이 이렇게 많은데, 뻔뻔하게 돌아다니고 있어요. 예, 예. 히어로 아카데미요. 어서 와—”
‘미안해, 엄마. 나, 히어로는 못 할 거 같아.’
FF가 눈을 부릅뜨고 얼음꽃을 불러내 증식시키려는 찰나.
퍽!
“—서. 꺅!”
세모 안경을 쓴 여성 학부모가 뒤에서 다가온 남자의 어깨에 밀려 바닥을 뒹군다.
“거, 잘 좀 보고 다니지.”
꽃무늬가 그려진 남방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여자를 밀었으나 몹시 당당하게 행동했다.
세모 안경 학부모가 넘어지며 떨어트린 홀로폰을 주워 드는 남자.
“여보세요, 서히아 입학시험 진행팀입니다.”
-아, 예. 빌런이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무 일 없습니다.”
-예?
“그냥 아줌마가 호들갑 떤 겁니다. 아시잖아요. 매년 이러는 거.”
-역시 그랬습니까. 서히아에서 빌런을 방치하고 있을 리 없죠. 잘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예에.”
뚝.
“야!! 이게 미쳤나! 내가 누군 줄 알아?”
“아줌마, 그쪽이야말로 내가 누군 줄 알아?”
사내를 위아래로 훑는 세모 안경의 시선. 이내 별거 없다고 판단했는지 한껏 입꼬리를 당기며 콧방귀를 꼈다.
“네까짓 게 잘 해봐야 경호원이지. 지금이라도 엎드려 빌면, 옷값만 받는 거로 끝내줄게.”
사내는 입 안의 껌을 바닥에 퉤 뱉더니.
“나 입학시험 감독관인데.”
“어디서 거짓말을! 너같이 놈이 감독관이라는 소리는 들은 적 없어!”
“아하, 내부 정보를 들었다?”
입학시험에 관한 정보는 극비리를 유지하는데, 어느 교수 하나 때문에 어그러질 때가 종종 있다.
“상, 상식적으로 그렇잖니! 대단한 교수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너 같이 젊은 것을 감독관으로 쓰겠어?”
아차 싶은 학부모가 급히 말을 덧붙였으나 주변의 혐오 어린 시선은 바뀌지 않았다.
“쓰면 어쩔 건데.”
“흥, 그러면 그딴 저급한 아카데미에 내 애는 안 보내지.”
남자는 몸을 돌리곤 비웃음을 머금은 채 답했다.
“그 말 꼭 지키쇼.”
“사과하라니까!”
하아.
따라붙어 어깨를 잡으려 하는 학부모의 모습이 남자는 한숨을 쉬곤 작게 중얼거렸다.
“미르토스.”
풍덩.
“끼악! 어푸, 어푸! 사람 살려!”
1.5m 깊이의 웅덩이를 구현한 남자, 남만혁은 버둥거리는 아줌마를 무시한 뒤 FF에게로 몸을 돌렸다.
“괜찮냐.”
“…응.”
“야.”
“왜?”
일단 부르긴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남만혁은 문득 나비에게 빼앗은 꿀맛 사탕이 떠올라 품에서 꺼내 FF의 작은 손에 억척스럽게 쥐여줬다.
“힘내 인마. 네 잘못 아니야. 시험 잘 보고.”
“…그럴게.”
요즘 여자애들은 원래 이렇게 대답을 늦게 하는 건가. 안나벨도 그렇고. 속으로 구시렁댄 남만혁은 정확하게 작년 오늘, 데커드 교수가 섰던 자리에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08:50]
“아아. 마이크 테스트. 잘 들리지? 앞으로 5분 뒤에 시험 시작되니까 준비해라.”
남만혁의 멘트에 아카데미 앞 광장 인근에서 대기하던 진행팀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세모 안경 학부모는 가슴께까지 밖에 오지 않는 물속에서 빠져나와 수치심 가득한 얼굴로 남만혁을 노려보다 입을 열려는 순간.
“아줌마, 지금 입 열면 댁 아들 내가 어떻게든 탈락시킨다.”
“…….”
“잘 참네. 아까도 이렇게 하지 그랬어. 자, 주변 홀로 페이퍼에 주의사항 적혀 있으니까 확인해라. 나중에 몰랐다고 변명해도 소용없다.”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입학시험 안내】
【1. 09:00 시작, 늦게 도착한 학생은 자격 박탈.】
【2. 수험생 간 약탈 금지.】
【현재 시각 08:57】
예년과는 다른 공지에 몇몇 학생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올해부터 상식적인 선에서 폭력이 허용된다. 물론 신체에 심한 손상을 입히거나 죽이면 탈락은 물론이고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되니까 적당히 해라. 음? 아, 시간 됐다고요? 시작하란다.”
고저 없는 시작 신호에 긴가민가해 멀뚱히 남만혁을 쳐다보는 학생들과 학부모.
“뭐해, 가라니까.”
“으아아아아!”
“우오오!”
“1등은 내 거다! 다 비켜!”
학생들이 골 지점인 동상문을 향해 달려 올라가자 학부모들의 고성이 뒤따른다.
“골렘 조심해!”
“산길을 타!”
“평소대로만 하렴!”
“르엘리트! 1등 못하면 집에 올 생각 하지 마! 용돈이고 게임이고 다 끊을 줄 알아!”
마지막은 그 아줌마의 발언이었고 FF는 그녀의 말 중 학생의 이름을 기억했다.
‘르엘리트.’
속삭이듯 작게 말해 뇌리에 각인시킨 FF는 남만혁 옆을 지나치며 그를 눈에 담았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 악의도 선의도 심지어 동정심마저도 아닌 그 눈빛은 FF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엄마?’
자신을 사랑했던 마지막 한 사람과 저 남자가 겹쳐 보이는 건, 타인에게 받는 호의가 처음이어서 그런 것이다. FF는 이 생경한 감정을 그렇게 믿기로 했다.
* * *
감독관의 업무는 학생 간의 싸움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는 역할도 있었기에 나는 학생들 뒤를 따라 올라가는 중이다.
“X 될 뻔했네.”
오늘 새벽. 교감이 시험 감독관이라는 귀찮은 일을 내게 떠넘길 때만 해도 속으로 수천 번을 욕했는데, 지금은 백 년근 산삼이라도 한 뿌리 캐서 보내줘야 할 판이다.
“FF가 여기서 왜 나와.”
FF는 ‘내 슈퍼빌런 선배’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후에 혜성같이 등장해 세상을 추위에 떨게 하는 인물.
대표적인 업적으로 혼자 지구의 적도를 얼려버린 일이 있다. 그 이후 종적을 감추긴 했지만, 아무튼 포텐셜이 어마어마한 건 확실하다.
“그 아줌마, 내가 구해줬다는 건 평생 모르겠지?”
FF가 슈퍼빌런으로 활약할 당시, 얼음꽃을 맨눈으로 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눈에 생기가 있던데, 잘 달래면 히어로로 전향시킬 수 있지 않을까.’
쩌저정!
FF를 그블린 전에 어떻게 끌어들일지 고민하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얼음이 대량으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이야, 옥수수 제대로 털었네.”
르엘리트라고 했던가, 앞니 두 개가 사라진 진상 아줌마의 아들이 기절해있었다.
쩌정!
멀지 않은 곳에서 재차 울리는 굉음.
“저쪽인가.”
가보니 이번에는 학생 셋이 얼음으로 된 수갑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감독관님, 도와주세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한 번만 봐줘요. 네?”
근처의 흔적을 보니 꽤 격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런데도 상대를 속박 정도로 끝냈다는 건, 아카데미 입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거겠지.
‘잘됐네.’
나는 멍청하고 건방진 둘의 이름을 확인하고 탈락에 체크한 뒤 동상문으로 향했다.
“오.”
오르막길 끝단쯤부터 얼음으로 된 가시덩굴이 지면에 광활하게 깔려 있다. 마치 미르토스를 얼음 가시 버전으로 구현한 듯한 광경.
그리고 그 끝에는 사선으로 잘린 얼음꽃의 줄기 부분으로 학생 하나를 위협하는 FF가 보였다.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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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