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마왕 소환 (1)
심계, 사가(死歌)의 성.
“샤가르님!”
성 외곽을 순찰하던 샤가르는 더럽고 냄새나는 부랑자의 접근에 본능적으로 코를 막으며 창을 들었다.
“오지 마! 이 새끼야. 어우, 내 코 X발.”
부랑자는 그의 태도가 익숙한 듯, 한 걸음 물러섰다.
“저희 집 앞에 이상한 게 나타났습니다. 확인 좀 해주시면….”
부랑자라도 성에 들어와 1년이 지나면, 시민 대우를 하라는 마왕의 엄명이 있었기에 샤가르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별거 아니면 죽는다.”
“네, 아무렴요.”
자신의 엄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랑자의 뒤통수를 깨버릴까 싶었던 샤가르였으나 제보를 받은 이상 일단 확인은 해야 하니 침을 뱉으며 따라나섰다.
사가의 성, 외곽.
성벽을 따라 지어진 허름한 집들. 이곳에는 다른 성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자와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자, 그리고 신체와 장기를 팔아먹고 유흥을 즐기는 미치광이들이 모여 사는 실패자들의 소굴이다.
“병X들.”
샤가르는 바지에 달라붙는 거지들을 부츠로 걷어차며 이동한 끝에, 부랑자의 말대로 어느 집 앞에서 이상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진?”
“역시 마법진이었습니까? 휴, 건드리지 않길 잘했습니다.”
“…평범한 마법진은 아니다. 마법사님을 모셔 올 테니 아무도 못 올라가게 감시해.”
“예.”
샤가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부랑자 수십이 몰려들었다.
“비켜, 내가 먼저다!”
“먼저는 X병. 올라가면 끝이지!”
“으아아!”
엄중한 결계로 보호받는 이 성에 누군가가 마법진을 생성하기 위해선 성의 주인인 마왕의 허락을 받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설령 허락받았다 한들, 이러한 장소에 그 비싼 마법진을 그릴 리가 만무.
하여, 부랑자들은 이 마법진이 심계에 종종 등장한다는 ‘이세계’로 통하는 마법진이라 여겼다.
서로를 밀치고 밀친 끝에 마른 오이처럼 홀쭉한 마족이 마법진에 올라섰고 머리부터 사라지기 시작해 목, 가슴이 저쪽 세상으로 넘어갔을 때쯤. 돌연 강한 충격과 함께 마법진 밖으로 튕겨 나갔다.
피거품을 물고 쓰러진 마른 오이에 다가간 어느 부랑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죽었어.”
서로 올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던 이들은 동시에 마법진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마법사와 함께 도착한 샤가르가 피 냄새를 맡곤 혀를 차며 창을 휘둘렀다.
“마법사님 지나가시게 비켜라!”
“샤가르. 이만하면 됐다. 저 마법진이 무엇인지는 탑에서 나왔을 때 이미 알았네. 그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가세.”
새하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마법사는 더는 못 버티겠는지 샤가르를 내버려 두고 거의 뛰듯이 외곽구역을 벗어났다.
“예. …멍청한 놈들. 건드리지 말라니까.”
샤가르가 사체를 옮기는 부랑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생겨난 마법진은 이세계로 통하는 통로. 이건 심계에서는 누구나 어릴 적에 한 번쯤 듣고 동경해본 이야기다.
그러나 마족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가진 이세계는 몹시 드물다.
생각조차 그만두고 당장의 호기심을 채우려 하는 저들이, 샤가르의 눈에는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개구리처럼 보였다.
“가자니까.”
멀리서 기다리던 마법사가 역정을 내자 그제야 발걸음을 돌리는 샤가르.
“지금 갑니다!”
이후, 마법사는 마왕에게 마법진의 존재에 대해 보고했고 마왕은 대기하고 있던 샤가르를 불렀다.
“자네로군.”
“가이게이 님께 영원한 영광을! 부르셨습니까!”
이제는 구식 예절이다, 과례는 무례라는 같잖은 이유를 붙여대며 이름만 불러대는 수하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던 가이게이는 오랜만에 듣는 정식 인사에 흡족한 눈으로 샤가르를 내려다봤다.
“마법진을 네가 처음 발견했다고 들었다. 어떤 형태의 마력이더냐.”
마법사에게 이미 보고를 들었을 텐데도 이를 묻는다는 건, 전사의 견해가 필요한 것이라 여긴 샤가르는 본인이 느끼고 본 것을 일말의 정제 없이 입에 담았다.
“검은 구름 같은 마력들로 이루어진 기둥이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표현은 다르나 마법사의 의견과 샤가르의 의견은 일치했다. 이는 저 마법진이 이세계로의 통로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마왕은 신속하게 결단을 내렸다.
“노예를 자청하는 놈들이 건방지기도 하구나.”
마법진을 해석하면 이런 뜻이다. ‘제발 저의 주인님이 되어 주세요. 원하는 건 전부 드릴게요.’
그런데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양이 심상치 않다.
“이 마나를 감당할 수 있는 마족만 오라는 건가.”
사가의 마왕, 가이게이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샤가르, 오장 드라건을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라.”
“예!”
군말 없이 마왕을 명령을 수행한 샤가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왕성으로 복귀해야 했다.
“…죽었다? 용의 후손이자 전대 마왕의 피가 섞인 드라건이?”
“예.”
옥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가이게이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쪽 세상의 환경이 마족에게 맞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고.
“게리오스를 보내라.”
잠시 후.
“어찌 되었나.”
“죄송합니다.”
“허.”
이런 식으로 수차례 사가의 성 인재들이 죽어 나가자 가신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정적을 죽이고 계신다지?”
“그놈들이 마왕님께 말대답 따박따박 할 때부터 이리될 줄 알았네.”
“이 보게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청소부 게리오스가 없으니 이제 도시의 오물은 누가 처리할지 정해야 한단 말일세.”
“윽.”
이러한 성내의 분위기를 알아챈 마왕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안내하라.”
“예. 예? 마, 마왕님께서 직접 행차하시는, 헉. 모시겠습니다.”
샤가르는 마왕의 분개한 눈을 마주하곤 급히 고개를 숙이며 외곽지대로 그를 안내했다.
“저것이로군. …샤가르. 자네가 처음 봤을 때도 마법진이 이런 형태였나?”
“아닙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양과 왜인지 모를 불쾌한 기운이 성의 하늘을 덮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들어라.”
사가의 마왕이 마법진에 직접 들어간다는 소문은 성을 나서는 순간 도시 전체에 퍼졌고 외곽지역에는 이를 보기 위해 가신과 귀족, 상인들이 몰려 있었다.
마왕은 생각했다.
‘이제는 단순히 노예들을 부리기 위해 마법진에 올라가는 게 아니다.’
마왕으로서의 증명. 몽마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본마는 돌아올 것이다.”
노래와도 같은 그의 매력적인 음성이 외곽지역 전체에 울려 퍼졌고 이에 감화된 시민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우와아아아악!
그러나.
“죽었, 아니. 돌아가셨습니다.”
웅장한 환호와 함께 마법진에 올라서고 몇 분 만에, 마왕은 목이 분리된 채 돌아왔다.
“가이게이 님마저….”
치솟았던 흥분은 그와 동일한 크기의 공포로 변했고. 사람들은 처음 마법진에 몰려들었던 부랑자들처럼 너 나 할 것 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샤가르 역시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으나 경비대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마법진을 주시했다.
“응?”
그때 마법진 위로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종이 한 장이 바람에 밀려 샤가르의 발치로 떨어졌다.
[유능한 놈만 와라.]
“모두 정지! 이세계에서 메시지가 왔다!”
장소를 통제하는 경비대는 현지에선 최우선 명령권을 가진다. 마왕이 없는 지금은 그 권한이 절대적이라 해도 무방했기에 고위 귀족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샤가르의 말에 따랐다.
평소 그의 언행이 거칠기는 해도 사람 됨됨이는 나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 보여주게.”
하늘로 도망치던 마법사가 되돌아와 종이를 건네받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세상의 마나가 섞여 있네. 문자는 맞춤법이 틀리긴 했어도 심계 공용어일세.”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법사님.”
마왕을 제외하고 가장 현명한 이를 뽑으라면 이 마법사였기에 마족들은 그를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크흠, 우선 대화를 나눠봄세. 이쪽도 유사한 재질의 종이를 준비해서 보내보자고.”
“알겠습니다.”
바로 옆의 건물로 들어간 샤가르는 책장에 꽂혀 있는 단 한 권의 낡은 책을 집어 들고 그나마 글자가 없는 뒤표지를 찢어 마법사에게 넘겼다.
“클린.”
마법사는 그의 손 위에 있는 종이에 청결 마법을 반복해 시전한 뒤, 받아 들고 저쪽이 심계어에 익숙하지 않은 걸 고려해 최대한 단순한 단어를 조합해 글자를 적어 내렸다.
[죽음. 두려움.]
[안전. 복귀. 원한다.]
두 줄의 문장이 적힌 종이를 마법진 외곽에 올려놓자 순식간에 사라졌고 금세 답장이 도착했다.
[알았으니까, 쫄지 말고 와.]
[일 잘하면 소원 들어준다.]
마법사는 이 건방진 문장에 분개했으나 저 구석에 굴러다니는 마왕의 목이, 날붙이에 의해 절단된 것임을 상기하고 감정을 가라앉혔다.
“답신이 왔다.”
오오.
“이제 죽이지 않겠다는군. 실력에 자신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도전해도 좋다.”
마법사는 그들이 서로 먼저 올라가겠다고 난동을 피울 줄 알았으나, 이들도 머리가 있는 마족. 눈앞에서 장군과 마왕이 죽어 나갔는데 누가 가볍게 저 마법진에 발을 올리겠는가. 그것도 종이 한 쪼가리만 믿고.
“…내가 다녀오지.”
방대한 양의 마나를 뿜어내는 이 마법진이 여기에 계속 존재한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성의 결계가 부서지고 말 것이다.
이는 사가의 성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을 잃는 것이므로 마왕이 없는 미래를 내다본 마법사는 배팅을 하기로 했다.
‘다음 대 마왕은 나다!’
목숨을 건 도박으로 명분과 명예를 얻어 마왕의 자리에 오를 생각이었던 마법사는 방어마법으로 전신을 무장한 뒤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사라진 마법사.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기다렸다.
5분이 지났을 무렵. 마법사는 얼굴 한쪽이 퉁퉁 부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어떻습니까?”
샤가르의 질문에 마법사는 허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답했다.
“…마왕이 있었다.”
마법사는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것들을 그대로 읊었다.
“유황 지대의 그린시즈를 아는가?”
“성문을 맨몸으로 부순 언데드 아닙니까? 근래 세 개의 성을 차지했다고 들었습니다.”
외부 소식에 빠삭한 샤가르가 말하자 마법사가 긍정했다.
“그가 주인으로 모시는 분이 계셨네.”
기겁하는 마족들이 소란스럽게 웅성대자 마법사는 침을 삼키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그린시즈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왕일지도 모르는 이가 그분을 보좌하고 있었어.”
“그럴 수가…. 혹시 그분과 계약은 하셨습니까?”
고개를 젓는 마법사.
“그분은 내가 마왕이 아니라고 했네.”
정확하게는 ‘그따위 좁쌀만 한 마나를 다루면서 마법사라 칭하고 다니냐.’라는 마생(魔生)에 다시없는 모멸을 당한 마법사였으나 이 사실은 죽을 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마법진을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 언제든지 올라와 자신의 시험을 받으라 하셨네.”
“시험에 통과하면 보상이 있는 거군요?”
“…그렇지. 엄청난 보상이 있네.”
아마도.
뒷말을 삼킨 마법사는 ‘다음 사람 올라오라고 해. 끊기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는 남만혁의 협박을 수행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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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