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서몬&케이브 (1)
“하나만 고르게.”
매저드는 품에서 검은 표지의 책들을 꺼내 내 책상 위에 하나씩 쌓았다.
[심연의 구름]
[지옥의 업화]
[악마의 뿔 소환]
“내용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심연의 구름.’
훑어보니 심계에는 구름으로만 이루어진 지형이 존재하는데 그곳의 구름을 불러오는 마법.
이는 심계의 마나와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합쳐진 일종의 유독가스였고, 평범한 마족도 1시간 이상은 버티기 어렵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인간은 아마 1분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블린에겐 안 통해.’
인류가 짜낸 최후의 무기 중에는 이보다 훨씬 지독한 방사능 폭탄도 존재했다.
그걸 정면으로 맞고도 웃으며 걸어 나오는 그린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패스.’
지옥의 업화는 심계의 영원히 타오르는 땅이라는 곳에서 불을 끌어오는 마법이었다.
책 후반부에 수기로 기록된 걸 보니 불의 온도는 2천도 내외라는 듯하다. 엄청난 화력인 것은 사실이나 안타깝게도 이 정도 온도로는 블루의 실드를 뚫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악마의 뿔 소환은 앞선 두 마법과는 달리 악마 학파의 장로가 직접 개발한 마법이다.
초반부는 악마의 육체에 대한 설명을 고루 하게 써 놨는데, 요약하면 악마는 자신의 뿔을 지팡이처럼 사용하기에 인간 마법사는 그 위력과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장로는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뿔을 구한 뒤 자기 육체와 결합을 시도, 기적적으로 성공했다고 한다.
‘말만 소환이지, 그냥 악마의 뿔을 몸에 이식하는 마법이네.’
“이거로 하겠습니다.”
[악마의 뿔 소환]
“좋네, 기대되는구먼. 오늘 강의는 끝일세. 다음 주까지 자신이 고른 마법을 익혀오게나.”
여느 때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를 낸 매저드 교수가 강의실을 나서자 기가라이트닝이 당황하며 안토니오를 돌아본다.
“겁먹을 거 없다. 성공하라고 내주신 과제가 아니니까.”
후배의 시선을 받은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답하며 내게 눈짓으로 동의를 구한다.
“안토니오의 말이 맞다. 스승님은 마법사로서의 본질적인 소양을 키우기 위한 과제를 내시니까.”
알다시피 수강생의 탐구심과 향상심을 자극해 스스로 공부하도록 유도하는 게, 매저드 교수의 강의 방식이다.
“…흥. 혹시나 해서 말한다만. 저놈과는 경쟁하려 들지 마라.”
대뜸 나를 가리키며 콧방귀를 끼는 안토니오.
저건 갑자기 왜 또 시비야.
“왜죠?”
감정이 담기지 않은 FF의 반문에 녀석은 이를 악물고는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음차원 마나와 관련된 마법에 한해서는 따라갈 수 없다.”
오, 안토니오 자식. 이제 인정할 줄도 알고. 성장했구나.
“선배님의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시도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내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
둘의 답변에 살짝 놀란 안토니오는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나는 경고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강의실을 나갔다.
“선배님, 저는 수련하러 먼저 가보겠습니다!”
후다닥 달려가는 기가라이트닝에 이어 FF도 내게 인사를 하곤 강의실을 떠났다. 참고로 안나벨은 매저드 교수가 강의 종료를 선언하기가 무섭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순간에 조용해진 강의실. 얼마 전만 해도 일과가 끝나면 남산으로 돌아가 리쳇과 함께 지하 요새 건설을 지휘해야 했는데, 요즘은 네크로 마탑에서 고용한 언데드들 덕에 여유가 생겼다. 거의 완성단계이기도 하고.
“그냥 지금 해치울까.”
과제라는 것은 미루면 미룰수록 심적으로 불편하기 마련. 나는 일어나려다 말고 되레 앉아서 마법서를 펼쳤다.
사락, 사락.
강의실에는 내가 넘기는 책장 소리만 들렸고 얼마 후, 마법서 완독을 끝낸 나는 탄성을 뱉었다.
“체질을 가져온다라.”
마법서의 내용 대로면 뿔과 육체를 결합할 시 해당 뿔의 원주인이었던 악마의 체질을 다소 열화된 상태로 가져올 수 있다.
사실상 특성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라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다만, 두식이가 가지고 있던 뿔은 마왕 소환진에 모조리 소모했기에 내 수중에 있는 뿔이라곤 사가의 성 전 마왕의 뿔이 전부다.
“쓰읍, 이건 좀 찝찝한데.”
마왕의 종이 몽마였으니 내게는 전혀 필요 없는 매혹과 관련된 체질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대단한 체질이었으면 그런 시골의 성이 아니라 더 큰 성의 마왕이 됐겠지.
아, 그리고 책을 보다 알게 됐는데. 악마라는 건 일종의 직업이었다. 마족 중에 차원을 오가는 체질을 가진 종족이 주로 악마가 되는 모양.
‘두식이에게 하나 구해보라고 해야 하나.’
대륙 남부의 성들을 점령하며 수급을 벤 마왕의 목만 여럿일 터였다. 하여 두식이를 호출하려던 찰나.
츠즉.
목덜미에 심긴 칩에서 평소와는 다른 형태의 전기자극이 느껴졌고 내가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시야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미지의 네트워크에서 수신된 메시지, 1건】
【보낸 이 : 소환★마법단】
【*이 메시지는 소환수의 인권을 지속적으로 존중한 이에게만 발송되는 초대장입니다.】
【제목 : 소환수를 사랑으로 돌보는 당신을 ‘서몬&케이브’ 행사에 초대합니다.】
소환 마법단은 과거, 언데드포텐셜스카우트를 내게 선물한 정체 모를 집단이다. 블랙 위치가 나중에 말하길, 거절하려면 할 수 있었으나 당장 내게 필요한 듯해서 수용했었다고 하더라.
아무튼 언포스 덕에 지금의 언데드클럽이 존재할 수 있었으므로 소환 마법단에 대한 내 이미지는 꽤 좋은 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뭔지도 모르는 초대에 응할 생각은 없었기에 더 상세한 설명이 없나 하여 메시지 창의 금빛 문자를 노려보니, 새로운 창이 생겨났다.
【서몬&케이브】
【소개】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혼몽의 마굴에 초대된 소환사와 소환수가 생존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며 소통하는 프로그램.】
【규칙】
【1. 소환수는 1체로 한정한다.】
【2. 전투 중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의 개입이 발생할 시 즉시 탈락.】
【3. 소환사가 사망할 시 즉시 탈락.】
…….
…….
…….
【10. 순위는 전투 승리 횟수, 최종 생존일, 시청자 투표를 총합해 결정되며 비율은 3:5:2이다.】
【상품】
【1위 : 개인용 차원 포탈】
【2위 : 행성, 프렉시스1985A-115】
【3위 : 카룸 은하 지배자, 카룸의 혼】
【4위 : 시공간 조타수, 베르트랑의 머리】
【5위 : 차원 주화x100】
【특이사항】
【1. 이번 행사의 규모는 이전의 10배 이상입니다. 이에 따라 하위차원의 인재들을 초청하였으므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 개인별로 실시간 스트리밍을 진행하며 시청자는 참가자와 소통, 지원이 가능합니다.】
【3. 참가자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보장됩니다.】
【4. 행사 도중 사망 시 실제로 죽습니다.】
【5. 혼몽의 마굴 지형은 매일 무작위로 변합니다.】
【6. 하위차원에 해당하는 참가자는 차원문명보호법에 의해 상품 제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위차원 참가자를 위한 특전】
【1. 본인 이외 1명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2. 전투 회피권 1장 지급합니다.】
【3. 실시간 중계 개념이 존재하는 문명이라면 저희 쪽에서 일시적으로 수신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합니다.】
“삼식아.”
돌곡?
내 발치에 나타나 다리에 매달리는 삼식이에게 초청장 내용을 알려준 뒤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돌곡!
작은 주먹으로 자기 가슴뼈를 두드리는 삼식이.
우승할 자신이 있단다.
녀석의 의사는 확인했으니 이제 내가 고민할 차례다. 혼몽의 마굴. 삼식이가 999일간 버틴 후 죽어 언데드가 된 장소.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안토니오 골드우드 가문의 수호수이자 하나의 차원에서 왕으로 군림하던 나르 비앙트가 삼식이를 보자마자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을 정도.
“얼마 전에 다녀왔을 때는 이런 행사 아니었지?”
돌곡.
소환사는 없었단다. 아무래도 혼몽의 마굴은 방송국 스튜디오처럼 프로그램에 따라 규칙이나 용도가 조금씩 바뀌는 듯하다.
다 좋다. 상품도 3위 안에만 들면 그블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대단하고.
문제는 저 마굴에서 사망 시 실제로 죽는다는 것과 차원문명보호법이다. 막상 목숨을 걸고 1등 했는데 법 때문에 원하는 상품을 못 받으면, 그것만큼 허무한 건 없지 않겠는가.
하여, 메시지 창에 답장하기를 눌러 이와 같은 의문점을 적어 보냈더니 눈꺼풀이 몇 번 오르내리기도 전에 답변이 도착했다.
【제목 : 상품 수령 문의 답변.】
【내용 : 안녕하십니까. 귀하 문명의 경우 1, 2위 상품만 제외하면 모두 수령 가능하십니다. 그럴 일은 없겠으나 만약 귀하께서 우승 및 준우승을 달성할 시 해당 상품 가치만큼의 차원 주화가 지급될 예정입니다.】
답장에서 조롱이 느껴진다. 글씨체도 흐물거리는 게 비웃는 거 같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아쉬운 일이다. 저 상품들만 가져올 수 있으면 그블린 전 준비가 쉬워졌을 텐데.
“참가할까?”
돌곡!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삼식이. 녀석의 반들거리는 두개골을 한 번 쓰다듬고는 초대장에 떠 있는 수락 버튼을 누른다고 생각하자 일순 시야가 점멸하더니 반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여긴….”
크르릉!
작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내가 있는 곳과 같은 상자들이 셀 수 없이 늘어서 있었다.
“아트모. 지금 인간 고기 못 준다. 기다려.”
내 왼쪽 상자, 바닥까지 닿는 금귀걸이가 인상적인 새까만 사내가 퓨마를 닮은 동물의 목줄을 당기며 중얼거렸다.
“큭, 원시인 따위도 초대될 줄이야.”
이번에는 오른쪽의 상자에서 들려온 목소리.
“나를 말하는 건가?”
“너랑 저거. 둘 다 고약한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코를 움켜쥐는 중년의 사내. 놀랍게도 놈의 피부는 녹색이었다.
“그린?”
“…그린? 네놈. 지금 나보고 그린이라 했나?”
더 짙은 녹색으로 변하는 얼굴색.
저 단어에 화를 내는 거 보면 그 종족이 맞나 보다. 나는 저들이 싫어하는 말을 잘 알고 있다.
“가서 블루 똥꼬나 빨아.”
쾅!
눈을 초록색으로 물들이며 반투명한 벽을 주먹으로 치는 놈.
“너, 꼭 살아남아라. 살아서 내 손에 죽어!”
내가 보란 듯이 귓구멍을 후비며 무시하자 놈은 광분하여 상자 안에서 날뛴다.
‘어리네.’
노회한 그린에겐 이런 원색적인 도발이 통하지 않는다. 저렇게 쓸데없이 움직여서 체력을 낭비하지도 않고.
그럼 내 상대가 아니다.
회귀 전, 내가 죽인 그블린은 1억이 넘고 이 중 4할이 저런 놈들이었다.
“풍경 좋네.”
놈에게 관심을 끊고 주변을 살폈다. 상자 밖은 우주인 듯, 빛나는 점들이 박혀 있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잠시 감상하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눕자, 메시지 창이 떴다.
【하위차원 특전】
【동반자 1인을 호출하세요. 익숙한 통신수단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나는 동반 1인이 가능하다는 문구를 보자마자 떠오른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여보세요. 예, 스승님. 다름이 아니라 묘한 행사에 참여하게 돼서요. 예, 함께 해주실 수 있는지. 아, 연구 때문에 바쁘시다고요? …알겠습니다.”
쳇.
‘꿀 빠는 건 글렀네.’
하는 수 없이 차선으로 생각했던 녀석의 번호를 누르자, 벨이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다.
“어, 별 건 아니고. 좀 특별한 행사가 있는데 같이 갈래? 아니, 그렇게 성급하게 수락하지 말고.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그래, 진짜 목숨. …알았다. 메시지가 떴다고? 그거 수락 누르면 바로 오니까, 준비하고—”
“눌렀어, 아!”
금발청안의 소녀가 잠옷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해골 무늬 잠옷 실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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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