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25화 (125/201)

<125화>

서몬&케이브 (2)

다차원방송국, 로카.

“하위 차원까지 초대장을 보낸 건 명백한 실수입니다.”

세 개의 손가락으로 보급형 연초를 입에 문 행사기획팀 팀장, 솜브리오는 이제 막 사원이 된 신참을 삭막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연기를 길게 뱉었다.

“후…. 역시 구제가 맛이 좋단 말이지.”

“팀장님!”

그의 외침에 다시 쳐다보는 솜브리오. 파란 피부에 길쭉한 귀. 특별한 외모는 아니나 옷맵시나 외관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룬다.

이 정도로 자신을 관리하는 녀석이 완벽주의자들만 모아둔 인사팀에서 튕겨져 행사기획팀으로 떨어졌다는 건, 내적으로 그만한 흠결이 있다는 의미다.

“허슬리, 자네 여기 다닌 지 얼마나 됐지?”

“2주 전에 정식 사원으로 발령 났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꺼멓게 타오르는 연초를 바닥에 비벼 끈 솜브리오는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팀장님, 대답해주십시오.”

지나가던 인사팀 사원이 허슬리를 보곤 인상을 구긴다. 이에 허슬리가 인사팀 사원을 붙잡으려 하자 솜브리오가 입을 열었다.

“단점이 장점보다 부각되면 어찌 될 거 같나.”

“제가 그런 머저리란 말씀입니까?”

솜브리오는 머리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곤 본인 책상에 있던 서류를 그에게 쥐여줬다.

“나는 네 유모가 아니다. 블루.”

“그딴 멸칭으로 저를 부르지 마십시오!”

격분한 허슬리의 모습에 피식 웃은 솜브리오는 그가 움켜쥔 종이의 끝을 가운데의 긴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내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면 실적을 쌓아라. 블루 포코.”

멸칭에 꼬마라는 뜻을 가진 포코를 붙이자 허슬리는 자신이 가진 모든 주름을 얼굴에 드러내며 분노했으나 그와의 격차를 잘 알기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익!”

“일합시다, 일. 팀장님도 신입 그만 괴롭히시고요.”

“네가 사수다.”

중재를 위해 개입한 사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 반면 팀 내 다른 사원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에이 씨, 얌마. 따라와.”

“저는 얌마가 아닙니다. 허슬—”

솜브리오의 책상에서 멀어지기가 무섭게 행사기획팀 사원, 데모니오가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허슬리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쥐었다.

“으윽, 놓으십시오!”

“행사기획팀은 폐급들만 모이는 오물통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방 다른 팀으로 발령 날 겁니다! 끄윽.”

데모니오의 날카로운 손톱이 허슬리의 두피를 파고든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놀란 허슬리가 눈을 부릅뜨자 그의 눈알 바로 앞에 검지를 들이미는 데모니오.

“두 가지만 명심해. 팀장님에게 건방지게 굴지 말 것. 내게 두 번 설명하게 하지 말 것. 이해했지?”

“…예, 윽.”

허슬리는 두개골 표면을 긁어대던 데모니오의 손톱이 빠져나가자 허겁지겁 회복 마법을 시전해 대칭이 무너진 육체를 복원시켰다.

“여기가 네 자리다.”

데모니오의 바로 옆 칸에 자리를 배치받은 허슬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 책상에 앉고 나서야 팀장이 쥐여준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하위 차원 인명록]

이미 구겨진 종이를 한 번 더 구김으로써 분노를 표출한 허슬리는 바로 옆에서 쳐다보는 데모니오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감정을 가라앉혔다.

“다음 장을 넘기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나올 거다. 그대로 하고 내게 결과 보고해.”

“…네.”

“대답은 크게.”

데모니오가 손톱을 보여주며 눈가를 좁히자 허슬리는 저도 모르게 복근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예!”

다른 팀에서 이쪽을 쳐다보자 허슬리는 수치심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서류에 파묻었다.

[개인별 업무지시]

위에서부터 사람 이름과 임무가 쭉 나열되어 있었고 허슬리는 마지막 줄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블루 포코 : 하위 차원 출신 소환사의 스트리밍 관리 및 특이사항 보고.]

하위 차원의 떨거지들을 지켜보는 것 자체는 괴롭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긴 허슬리였으나 그 아래에 쓰인 막대한 참가자 숫자에 도저히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수.”

“얌마, 사수를 부를 땐 이름과 존칭을 붙여야지. 이런 건 사회생활 기본 아니냐.”

“…데모니오 사수님. 정말 여기에 적힌 인원 전부 저 혼자 관리하는 겁니까?”

힐끗 허슬리에게 떨어진 팀장의 지시사항을 본 데모니오가 가볍게 턱을 까닥이며 답했다.

“쉽네. 사흘만 지나도 9할이 나가떨어질 거다.”

“아! 하긴. 벌레들이 버텨봐야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일주일이면 제가 할 일은 없겠군요. 차라리 데모니오 사수님의 업무를 돕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데모니오는 하위 차원에서도 상위 차원 못지않은 생명체가 종종 등장함을 알기에 허슬리의 헛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넘겼다.

* * *

혼몽의 마굴, 생존 1일 차.

이 행사는 과거에 유행했던 전기 쥐잡이 게임처럼 내가 부리는 소환수로 상대의 소환수를 제압한 뒤. ‘이런, 내 패배다. 다음에 다시 붙자!’, ‘좋다.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주마!’ 같은 대사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성장을 장려하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행사가 아니었다.

물론, 서바이벌이니 죽으면 진짜 죽는다느니 하는 흉흉한 설명에서 내심 짐작은 했으나 ‘참가자 간에 담합하면 어떻게든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내심 있었다.

“죽어라! 똥색 원숭이 놈! 크쉿!”

저 빌어먹을 종차별주의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원숭이라는 단어도 알아? 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벌레가 말도하고.”

“크샤아악!”

내 영역 안에서 퀸에게 복부를 두드려 맞고 날아간 저 이족보행 사마귀 대가리는 자신을 중급 차원에서 넘어온 치레종, 사미그라 소개했다.

놈의 소환수는 자신을 빼닮은 치레종이었고 놀랍게도 998번째 자식이라며 자랑까지 하더라.

원래 이 행사가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문화가 있는진 몰라도 나는 하여간 듣기 싫어서 삼식이에게 처리하라는 사념을 보냈고 직후 내 앞에 서 있던 사마귀 대가리 두 개 중 하나가 매직 미사일에 의해 사라졌다.

“감히 내 아들을!”

“야, 내가 궁금해서 그런데. 돌아가면 997명의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진짜 슬퍼?”

“…크아악!”

놈은 우리 주변을 떠다니는 둥근 구체의 눈치를 보더니 대뜸 얼굴을 붙잡고 되도 않는 눈물 연기를 한다. 이 자식, 스트리밍 무지하게 의식하는구만.

그러는 사이 퀸이 놈의 등에서 뻗어 나온 사마귀 다리 두 개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어 공격을 원천 봉쇄하고 나를 돌아본다.

어떻게 할지 물어오는 그 시선에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죽여.”

“잠, 잠깐! 살려줘. 네 말대로 나는 고향에 997명의 자식이 있어.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전부 죽을 거야. 하루만 버티고 네게 항복할게. 그럼 너는 승리 카운트를 얻고, 나는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우리 행성에서는 버티는 날짜만큼 돈을 준단 말이야.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놈의 그럴듯한 사연에 망설이는 퀸. 들었던 주먹을 다시 내리며 입을 열었다.

“만혁, 이건 아닌 것 같아. 이 사람이 범죄자인 것도 아니잖아.”

멕시코 갱단의 목숨을 뺏을 때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던 퀸이었다. 이 녀석은 그때처럼 합리화할 명분을 찾고 있다.

그렇겠지, 고작해야 18살. 내가 아는 그 강인한 퀸을 보려면 적어도 10년은 흘러야 할 터.

“네가 결정해.”

하지만 안 된다. 흐름에 맡길 거였으면 회귀한 보람이 없잖은가.

“응?”

“책임도 네가 지고.”

퀸의 육체적 능력은 이미 전성기에 비해 크게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내구 특성의 경우 핑키의 더듬이를 섭취한 덕에 리즈 시절을 넘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녀석의 멘탈. 수치상으로도 내가 느끼기로도 당시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

“…알았어.”

목숨이 걸린 선택과 책임 속에서 강하게 성장하길 바란다. 마침 연습하기 좋은 환경이기도 하니, 이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조우하는 모든 소환사의 생명을 퀸의 결정에 맡길 생각이다.

키이이익!

퀸이 팔에 힘이 풀자 사마귀 대가리는 얼른 자기 팔을 회수한 후 새끼의 사체를 쳐다보지도 않고 우리가 지나온 방향으로 내뺐다.

【결과 정산】

【무승부】

【보상 : 5코인】

‘승리가 10코인, 무승부가 5코인. 그럼 패배는, 아. 이건 생각할 필요 없나.’

상대의 소환수를 죽이고 도망치게 했음에도 무승부 판정이 났다는 건, 죽음이나 항복만을 패배로 간주한다는 뜻이겠지.

코인은 이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으니 항복하는 순간 쓸모를 잃고 죽으면 코인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퀸이 녹색 점액이 묻은 주먹을 바닥에서 솟아난 종유석에 비벼서 닦은 후 내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상태창.”

【참가자 : 로맨】

【생존일 : 0】

【승리 : 1 / 무승부 : 1】

【랭킹 : -】

【시청자 : 0】

【코인 : 15】

첫날 스트리밍이 시작된다는 알림과 함께 기초적인 지식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이 창도 그중 하나인데, 보다시피 현재 우리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승리가 하나 있는 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금귀걸이 놈을 죽인 덕이다.

갑자기 불려와 당황하는 퀸에게 설명하던 중이어서 삼식이에게 처리를 맡겼더니 매직 미사일 세 발로 깔끔하게 해치우더라.

‘랭킹이야 100위부터 표시된댔으니 그렇다 쳐도 시청자가 아예 없는 건 좀 그러네.’

몇 명 정도는 볼 법하지 않나? 마이너가 취향인 힙스터가 분명 존재할 텐데.

“곧 늘 거야. 힘내.”

옆에서 같이 상태창을 보던 퀸이 내 시선을 읽고는 제 나름의 위로를 건넨다.

“오냐.”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답하자 퀸이 내게 속삭인다.

“귀여워.”

누가, 내가?

“너, 지금 나 꼬시냐?”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깔깔대는 퀸. 그런 녀석을 내버려 두고 상태창에 코인이라는 단어를 강하게 의식했다.

【구매 목록】

【장비】

【기술】

【음식】

【도구】

【기타】

상점창을 처음 열었음에도 고민 없이 아래쪽의 검색창에 그 단어를 입력했다.

“너 웃을 때가 아닐 텐데?”

내 얼굴을 보며 폭소하던 퀸에게 싸늘하게 말하자 놀라며 반문한다.

“앗, 왜?”

나는 녀석에게 상점창의 물품 하나를 보였다.

【지구식 생리대 : 10코인】

【*하위 차원 문명의 물품은 유통상의 관계로 책정가가 다소 높을 수 있습니다.】

“홀리—”

자주 들을 수 없는 퀸의 감미로운 욕을 잠시 감상하던 나는 바로 다음 물건의 가격을 녀석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기초화장품 : 20코인】

그제야 자신이 맨얼굴임을 자각한 퀸이 내게서 몸을 돌렸다.

“뭐야, 인제 와서.”

“무, 뭘.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럼 가자.”

“으응.”

주춤대며 걸음을 망설이는 퀸이 우리가 지나온 길을 힐끔거리며 돌아보는 한심한 모습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퀸, 너는 네 정의가 화장품보다 못하냐.”

“…아니.”

“그러면 이미 선택한 결정을 번복하려 들지 마. 그리고.”

녀석의 뒤에서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너는 화장 안 해도 귀여워.”

어느 드라마에서 본 오글거리는 대사 한 발 날려주자 퀸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성큼 저만큼 나아가선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역시 젊어서 그런지 리액션 훌륭하다.

‘이걸 스트리밍했어야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상태창을 열어 시청자를 확인하자.

【시청자 : 1】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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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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