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와일드 (1)
“흐엑, 흐이, 크익.”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그들이 쫓아오지 않는지 확인하던 사미그는 발바닥 갑각이 벗겨지고 근육이 드러날 때까지 달리고 나서야 멈춰서 숨을 쉬었다.
【시청자 : 1078】
【현재 표시된 채널 : 제마 행성】
[익명88101-1 : 항복은 죽음이다. 알고 있겠지?]
[익명88101-30 : 사미그. 우리가 너를 그렇게 키웠니? 비루하게 패배하느니 차라리 명예롭게 가거라.】
[익명1093-120 : 위에 두 놈은 참가자 목숨으로 장난하지 말고 꺼져라!]
“컥! 1, 1093?”
익명 뒤의 숫자가 상위 차원부터 내림차순 정렬된다는 건 이 바닥 상식이었기에 분당 열 개꼴로 올라오던 행성 전용 채팅이 그의 등장으로 인해 완전히 멈췄다.
[익명1093-120 : 사마그, 네가 괜찮은 무장만 갖췄어도 그놈들 정도는 한낮의 파리 뜯기였겠지?]
여지를 주는 듯한 그의 언사에 재빨리 무릎을 꿇고 모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복종의 자세를 취한 사마그.
“맞습니다! 하지만 그놈들은 하위 차원 출신답지 않게 강합니다. …제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돌아가 봐야 같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키이익.”
[익명1093-120 : 옳거니, 너의 그 욕망이 마음에 드는구나. 받아라.]
[익명1093-120님으로부터 미확인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개봉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사마그는 상위 차원의 존재가 분명한 이에게서 온 상자를 조금의 망설임 없이 개봉했다.
킥?
상자 안에는 사마그의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은 검녹색 구슬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뭡니, 컵!”
사마그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로 입안으로 들어간 구슬.
끄륵, 끅.
목을 움켜쥐고 쓰러진 사마그의 몸이 이내 축 늘어진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어색하게 몸을 움직여 일어선다.
【경고!】
【강제 간섭 발생!】
“쉬이이이.”
손가락을 자기 입에 대는 행동만으로 시끄러운 알림과 행사기획팀에 상황을 전송하려던 시스템이 한순간에 마비되었다.
“흐읍!”
사마그의 형태를 한 상위 차원의 무언가는 상체가 몇 배나 부풀 만큼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희열에 찬 눈빛으로 광소했다.
“크하하하! 이 무거운 냄새! 네가 맞았구나, 와일드!”
* * *
“전투를 신청한다.”
물레방아에 눈코입을 박아 넣은 듯한 외형의 지성체가 대뜸 우리 앞을 가로막더니 결투를 신청해왔다.
“좋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싸움을 걸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이 행사의 규칙. 저렇게 신사적으로 나오는 건 물레방아 나름의 존중이나 해당 종족의 문화 같은 거겠지.
그런데 거기다 대고 조건이 있다고 뻔뻔하게 답하니 저리 당황하는 얼굴이 되는 것도 이해할만하다.
“조건이 뭐지?”
“나는 소환수 대신 이 친구가 싸울 거다.”
퀸의 어깨를 살짝 치자 녀석이 자연스럽게 파이팅 자세를 취한다.
“제자의 수련을 돕는 건가? 나는 상관없다.”
“뭐, 그런 셈이긴 하지. 자, 가라! 너로 정했다, 퀸몬!”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
웬일이래. 반말로 반항도 하고. 아, 저렇게 내 눈치만 안 봤어도 매력적이었을 텐데.
물레방아는 특이하게도 자기 자신만으로 퀸을 상대해나갔다.
“젊은, 처자가, 제법, 큭. 공격이, 맵구나!”
“그쪽도 잘 피하네요!”
부양하는 물레방아와 부유하는 퀸의 싸움은 상당히 볼만한 것이었다. 두 사람 다 기동력을 위주로 하는 전투 스타일이었기에 박진감과 속도감이 상당하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어느새 시야 밖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다.
둘이 전투에 집중하는 와중, 나는 은밀히 이 공동 어딘가에 있을 소환사 또는 소환수를 찾아 나섰다.
신사적인 태도 뒷면에 어떤 생각을 하는진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으니 만전을 기하고자 함이다.
‘찾았다.’
내 기준으로 1시 방향. 다음 공동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작은 통로. 그 안쪽에서 그림자에 숨은 흐릿한 형체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다 내가 양손을 들고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전신으로 주장하며 다가가자 녀석도 천천히 동굴 밖으로 나왔다.
‘흐릿한 게 아니라 애초에 이런 종족이었나.’
연기로 이루어진 실루엣. 정해진 형상은 없는 듯하다. 다만 그 속을 떠다니는 두 개의 구슬, 내가 아까 눈으로 착각한 게 이거지 싶다.
“로맨이다. 응? 아, 사념? 괜찮아. 경험이 있으니.”
언데드들이 보내오는 사념에 비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뚜렷하고 확실한 의사가 전해져왔다. 거기에 집중하자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난 녜블라. 노보소에서 왔어. 내 소환수는 루이다데아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소통은 그게 끝이었다. 엄밀히는 더 대화하고 싶어 하는 녀석의 치근덕을 내가 일방적인 침묵으로 끊어냈다.
방금 들은 자기소개에서 필요한 건 다 취했다.
‘어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소환수를 끔찍이 아낀다.’
약점투성이. 쥐고 흔들려면 수백 번도 가능한 연약한 개체. 지금은 그거면 됐다.
쾅!
천장을 박차고 어깨로 물레방아를 들이받는 퀸. 잠시 뒤 삐걱대며 일어나려는 상대에게 가속을 잔뜩 먹인 킥을 날려 완벽히 매장한다.
패색이 짙어지자 녜블라가 물레방아를 자기 몸으로 덮고는 내게 강한 사념을 보냈다.
-졌어! 그만해! 그냥 날 죽여.
“죽여달라고? 포기가 너무 빠르지 않아?”
-어차피 이 앞은 못 지나가. 여기서 편하게 죽는 게 나아.
녜블라의 의사를 퀸에게 전하자 녀석은 안개의 어깨쯤 되는 부분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승부로 하죠.”
-왜?
“저는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알았어. 그럼 나와 쿠아의 목숨값만큼 도울게.
“좋아요.”
퀸이 밝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자.”
“이렇게라니요?”
“지금처럼 네가 상대와 싸워서 승리하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지면, 만혁이 결정하고요?”
“어. 미리 말하는데, 나는 다 죽일 생각이다.”
“알아요. 당신은 못된 종차별주의자니까.”
아니, 내가?
“그건 좀 충격인데.”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다 이길 거니까.”
나도 부디 그래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안개 덩어리와 물레방아를 뒤에 달고 녜블라가 서 있던 쪽 동굴로 들어가자.
휘오오오—
비리고 역한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이거…, 피죠?”
정면에서 공기째로 밀려오는 무언가가 느껴져 급히 영역을 최대 거리로 전개하자 끄트머리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물체가 감지됐다.
“준비해, 온다.”
내 경고에 퀸과 물레방아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면에 나서 좁은 통로를 틀어막는다.
“와일드! 와일드으으으으!”
좁은 동굴에 울려 퍼지는 꺼림칙한 음성.
“저거 사마귀 대가리 아냐?”
“맞아요, 맞는데. 느낌이 좀, 윽!”
쿵!
놈이 시야에 들어왔을 뿐인데 퀸과 수레바퀴가 땅을 긁으며 뒤로 밀려난다. 녀석의 등을 내가 받치고서야 간신히 현재 위치를 유지하는 수준.
단지 다가오는 행위 만으로 이만한 압박이라.
‘상위 차원의 존재인가?’
내가 넥서스를 꺼내 인근 환경 자체를 무너트려 도망칠 찬스를 만들려는 찰나.
“그만. 하잘것없는 고깃덩어리들 따위엔 관심 없다. 와일드, 나와라. 그때처럼 붙자.”
“와일드? 그런 사람은 여기 없다.”
“그럴 리가. 이렇게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압축한 내 영역을 아무렇지 않게 뚫고 들어온 사마귀 대가리는 삼식이 앞에 서더니 팔짱을 낀 채 콧김을 내뱉었다.
“와일드!”
돌곡?
“그래, 너다!”
돌곡, 돌고곡.
사람 잘못 봤다는 삼식이의 말에 사마귀 대가리는 고개를 기울이더니.
“크, 크하하하하!”
벽을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미친 듯이 웃는다.
돌곡. 돌곡. 돌곡.
미친놈. 시끄러워. 웃지 마. 삼식이가 작은 뼈 발로 바닥을 내리치며 그리 말하자.
“하! 내가 아무리 미쳐봐야 너만 할까! 그 중력구렁텅이 같던 마굴을 999일이나 버티고 왕이 되어선 한다는 게 모든 보상을 파괴하고 하위 차원의 말하는 고깃덩어리와 영구 주종계약? 큭큭큭.”
내가 삼식이를 바라보자 고개를 젓는다. 모르는 눈치다.
저 사마귀 대가리에 빙의한 무언가가 하는 말은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 나비가 단언하길 혼몽의 마굴에서 999일을 버틴 존재는 삼식이뿐이라 했으니.
“좋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네가 미쳐있어서 좋다. 와일드!”
사마귀의 날카로운 팔다리들이 삼식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혼자 헛소리를 늘어놓는 동안 내 마나를 최대한 삼식이에게 넘겨주었기에 간신히 반응할 수 있었다.
일만 개의 매직 미사일을 동시 구현해 하나의 덩어리로 압축, 놈의 공격에 맞춰 발출하는 것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이 집약된 매직 미사일은 사마귀 대가리가 뻗은 가느다란 팔에 닿자 각설탕이 물에 녹는 것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깡!
삼식이가 놈의 공격을 맞아 내게 날아왔고 나는 살짝 몸을 띄워 녀석을 받았다.
컥!
엄청난 충격이 복부에 가해진다. 얼른 미르토스 해변을 구현, 수중으로 들어감으로써 위력을 크게 줄였다.
물속에서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오자 나는 공동에 처음 들어왔던 입구 근처에 있었고 저쪽 통로에서 급히 일행이 달려 나온다.
사색이 된 퀸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내자 안도의 숨을 쉬더니 매서운 눈으로 사마귀를 쏘아본다.
“어우, 늑골이랑 갈비뼈 다 나갔네.”
돌곡….
미안해하는 삼식이의 두개골을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쓰다듬는데 중간에 구멍이 뻐끔 뚫려있다.
“너, 이거 쟤한테 맞아서 이렇게 됐어?”
돌곡.
그렇단다.
“내 이놈에 새끼를 확 그냥.”
돌곡, 돌곡!
고개를 저으며 나를 말리는 삼식이.
“휴, 고맙다. 말려줘서. 사실 이길 자신 없었거든.”
안광을 크게 키운 삼식이가 그제야 반달을 그린다.
가장 혼란스러운 건 이 녀석이겠지.
“괜찮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자고. 그래도 안 되면, 알지?”
돌곡!
그래, 튀면 되는 거야. 그건 내 전문이거든.
“와일드. 너는 지금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겠지?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약하다!”
퀸과 물레방아의 공격을 보지도 않고 막고 반격하며 외치는 사마귀 대가리.
뭔 소리야.
“너의 권능을 분쇄하기 위한 힘만을 가지고 왔음이니! 그때처럼 순수한 잔혹으로 나를 몰아치란 말이다, 와일드!”
삼식이는 놈을 아예 외면했다.
“도망치지 마라!”
“당신이나 도망치지 마세요!”
“음?”
묘하게도. 사마귀 대가리가 삼식이에게 추파를 던지는 사이 퀸의 헛손질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퍽.
페인트를 섞은 가벼운 잽이긴 하나 첫 유효타가 터지자 그제야 놈의 고개가 퀸을 향한다.
“고깃덩어리 주제에 신기한 재주가 있구나.”
“그쪽도 모가지 따면 고기 아닌가?”
오우야, 저건 전성기 시절 입담인데. 하기야 감정이 격해지면 본연의 성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니.
“옳거니. 틀린 말은 아니구나. 잠깐 놀아주마.”
퀸의 주먹이 최대 위력을 행사하는 포인트에 정확히 사마귀의 주먹이 동시에 동일한 속도로 도달했다.
“크읍!”
그러나 놈은 멀쩡한 반면 퀸의 어깨가 순간 크게 밀려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랫입술을 꽉 물고 거친 호흡을 뱉는 퀸.
“이게 하위 차원과 중위 차원의 차이니라.”
태생적 우월.
그러한 현실을 주지시키고 싶었는지 놈은 처음 마주했을 때 발현했던 그 거대한 압력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사마귀의 육체만을 활용해 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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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