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27화 (127/201)

<127화>

와일드 (2)

놈의 주먹이 퀸의 팔뚝에 닿을 때마다 공동 전체를 울리는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과 같은 단순한 근접전에서 인간보다 몇 배나 긴 놈의 팔과 낫은 엄청난 어드밴티지를 가진다. 그럼에도 나는 퀸을 걱정하지 않았다.

쿵!

저 봐라. 나였으면 스치기만 해도 떡이 될 공격을 가드 위로 받고 있지 않은가.

물론, 충격에 의해 뒤로 조금씩 밀리기는 하나 놈의 공격과 공격 사이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발을 밀어 넣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언제까지 채소따개처럼 굴 테냐!”

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뻗은 팔 위로, 퀸의 주먹이 질주해 초록색 턱에 꽂혔다.

뻐억!

완벽한 카운터.

“이야, 이런 걸 방송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시청자 : 2】

이런 명경기를 보는 사람이 겨우 둘 뿐이라니. 에잉.

* * *

다차원방송국, 로카.

서몬&케이브가 시작된 지 3시간이 지날 무렵, 행사기획팀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솜 팀장님! 상위 차원에서 간섭을 허가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거절해.”

흡연이 금지된 사무실임에도 구제 연초를 입에 물고 검은 연기를 뿌려대는 팀장, 솜브리오.

“그게, 글로리아 차원입니다.”

팀장인 인상을 구기곤 통신기를 들었다.

“이쪽으로 넘겨.”

“옙!”

“담당자다. 직접 개입은 금지하고 있다, 끊지. 뭐? 이미 개입한 상위 종? …그 건은 이쪽에서 이미 처리 중이다.”

솜브리오 팀장이 통신기를 거칠게 내려놓자 인근 부서의 사원들이 어깨를 움츠린다.

“데모니오. 시스템 에러 로그 싹 긁어와.”

“옙!”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로카에 축적된 데이터와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몇 가지 정황을 찾아낸 솜브리오는 최종적으로 치레종 전용 채널의 채팅과 수상한 로그 공백을 발견, 추적하는 것으로 범인을 특정해냈다.

“치레종, 사마그라는 개체에 상위 차원종이 빙의했다. 위치는…, 음? 허슬리.”

자리에서 자신의 가르마를 점검하던 허슬리가 잽싸게 그에게 달려갔다.

“예, 팀장님.”

“하위 차원 중 지구에서 온 참가자. 기억하나?”

부서를 옮긴 뒤 처음으로 팀장에 받은 업무 지시를 떠올린 허슬리가 곧장 대답했다.

“예, 로맨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특이사항은?”

허슬리는 데모니오의 조언을 듣고 조사해본 결과, 하위 차원 참가자의 생존율이 극악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하여 체력과 시간을 아낄 겸 숫자가 줄어드는 3일 차부터 하위 차원 참가자들을 살필 계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팀장이 갑자기 물어오자 허슬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신입의 모습에 솜브리오는 말없이 데모니오를 쳐다봤다.

챙!

데모니오의 손에서 뽑혀 나온 기다란 손톱이 허슬리의 두피에 닿기 직전.

“당, 당장 스트리밍 띄우겠습니다!”

빠른 후속 조치만이 살길이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체득한 허슬리는 잽싸게 로맨의 스트리밍 주소를 입력했다.

“아예 놀진 않았군. 데모니오, 냄새나는 손톱 치워라.”

“냄새라뇨! 제가 얼마나 깨끗하게 관리하는데요. 온전한 피 맛을 느끼려면 청결은 기본입니다. 기본!”

손톱의 길이를 줄이며 입맛을 다시는 데모니오의 모습에 안도하는 허슬리.

‘외워둬서 다행이다.’

마지막 줄이라 눈에 들어온 게 그에게 있어 천운이었다.

【참가자 명 : 로맨】

【위치 : 다섯공동 지역, 2번 방】

【상태 : 전투 중】

【소환수 : 삼식】

【시청자 : 2】

“저건?”

솜브리오의 눈이 시청자의 숫자에 잠시 눈이 머물다 이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개체로 향한다.

“보자. 아, 여깄네요. 이름, 사미그. 행성 자원을 담보로 악마에게 초대장을 산 별 볼 일 없는 중위 차원종입니다.”

자료를 찾아 종이 다발을 뒤적이는 허슬리 대신 중위 종 관리 담당인 데모니오가 팀장의 의문에 답했다.

“저놈이군. 탈락시켜.”

한눈에 봐도 종의 틀을 벗어난 외형이었기에 솜브리오는 빙의 개체임을 확신하고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옙, …에러? 시스템이 안 먹힙니다. 하여튼 개발팀 이것들은! 제가 가서 해결 볼까요?”

개체를 찾을 수 없다는 화면을 팀장에게 보여준 데모니오는 내심 자신을 파견해주길 기대했다.

“…잠깐, 보류다.”

“역시, 제가 가야. 네? 아니, 왜요? 저거 놔두면 하위 차원 애들 다 죽을 텐데요.”

“봐라.”

팀장은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당긴 채 연초의 끝으로 화면을 가리켰고, 그곳에는 치레종에게 크로스카운터를 날리는 퀸의 모습이 다각도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시스템이 승부를 결정 낸 타격을 인지하고 자동으로 편집한 것이다.

“와.”

싸움과는 담을 쌓은 허슬리마저 감탄을 터트릴 정도의 깔끔한 정타가 치레종의 턱에 가해진 순간 쇠기둥 같던 사미그의 두 다리가 힘없이 접혔다.

앞으로 꼬꾸라지는 빙의체의 모습에서 안도의 숨을 쉬는 데모니오와 허슬리.

그렇게 로맨 팀의 승리로 상황이 종료되나 싶었으나 갑자기 물웅덩이를 만들더니 물을 뿌려 기절한 치레종을 깨우는 것이 아닌가.

-저거, 정상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무승부 할래?

-네.

“왜 안 죽여!”

데모니오가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자 흥미를 느낀 인사팀 몇이 행사기획팀 파트를 힐끔댄다.

잠시 후 깨어난 치레종은 두리번거리더니 대뜸 크게 웃고는 로맨의 소환수인 삼식과 금발 머리 인간을 눈에 담더니.

-크하하하! 무승부? 웃기는 소리! 패자도 영광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나 발파, 아니지. 이놈 이름이…. 그래, 사미그. 나 사미그는 항복한다!

서몬&케이브에서의 항복이란 죽음을 의미한다. 참가자의 머리에 심긴 칩 속에서 조합된 약물에 의해 뇌가 타들어 가면서도 빙의체는 광기 어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미친놈이네요. 저거 상위 종이 중위 종 몸 강탈한 거죠?”

죽음에 초연한 태도. 상위 종 대부분이 가진 공통적인 기벽이다.

“아마도. 그리고 죽기 전에 명예 운운하는 상위 종은 하나뿐이지.”

솜브리오의 말에 허슬리는 반사적으로 고향별 야만인의 멸칭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그린!”

* * *

【결과 정산】

【승리 보상을 지급합니다.】

【*간섭 개체를 처치하셨습니다. 추가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승리 보상 : 10p】

【추가 보상 : 900p】

【승리 : 2 / 무승부 : 1】

간섭 개체에 추가 보상이라. 하긴, 누가 봐도 벌벌 떨며 도망치던 그놈이 아니긴 했다.

900포인트면 90승을 달성한 것과 같은 양.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야. 만약 퀸이 없었다면 나나 저 수레바퀴 녀석은 순식간에 죽었겠지.

이런 행사에 부정이 일어났다는 게 알려지면, 주최 측의 신뢰도가 의심받겠지.

‘먹고 입 닫으라는 건가.’

마침 목격자도 몇 없다. 적당히 포인트를 뿌려 무마하려는 속셈일 테다.

주최 측의 행태가 썩 내키진 않으나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일단은 순순히 받아들여야겠어.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엉망이 된 퀸의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꽤 심하게 찢어졌다.

“고생했다. 좀 쉬어.”

“네.”

주먹에 굳은살 붙인다고 강철인형을 맨손으로 쳐댈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내구라고 완벽한 건 아닌가.’

아무리 내구 특성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모자라다.

-우린 갈게. 이만하면 살려준 빚은 갚을 거 같아.

안개 덩어리와 수레바퀴가 일어난다.

“그래, 가라. 잘 살아남고.”

스멀스멀 나아가던 안개 덩어리 속 구슬들이 돌연 나를 본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여준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공격적인 사념이 쏘아져 들어왔다.

-상위 차원의 부자들은 죽어도 집에서 부활할 수단이 있어. 그리고 연기도 잘하지.

그것은 비웃음이 담긴 경고였다.

-나를 죽일 기회를 놓친 착한 바보들아.

* * *

“너보고 바보라네.”

“누가요?”

“저거.”

“녜블라가? 왜죠?”

“몰라. 중2병이겠지.”

“…그런데 만혁, 포인트로 그것 좀 사줄래요?”

그게 뭔지 되묻지 않았다. 퀸이 저렇게 쑥스럽게 말하는 거면 당연히 그 물건이겠지.

여성용 생필품, 서바이벌용 도구를 상점창에서 포인트로 산 뒤, 퀸의 주먹을 치료할만한 치료제도 살펴봤다.

【붕대 : 1p / 지혈】

【소독약 : 10p / 경상 치료, 소독 / 세포재생 촉진】

【새살솔 연고 : 50p / 경상 치료 / 환부 급속 재생】

【엘릭서 : 100p / 중상, 내상 치료 / 신체 손상 회복】

【그레이트 큐어 캡슐 : 1,000p / 모든 부정적 효과 상쇄 및 신체 복원】

새살솔 연고 정도면 되겠지. 당분간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가방이랑 옷, 텐트도 사자.

‘일단, 이 정도면 됐나.’

총소모한 포인트는 120p 정도. 치료제랑 생필품만 비싸지, 옷이나 도구들은 5p 내외더라.

“자.”

“읏!”

새살솔 연고랑 생필품이 든 가방을 넘겨주자 빼앗듯이 가져가더니 내가 안 보이는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잘 어울리네.”

기능성을 중시한 복장. 군복처럼 다수의 주머니가 달린 상의와 과격한 움직임에 최적화된 펑퍼짐한 바지. 그리고 어떤 환경에 노출되더라도 피부를 보호해줄 코트.

“완벽하네. 전쟁 나가도 되겠어.”

퀸은 무어라 말하려다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신하곤 한 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물, 소독약, 연고, 붕대.

그리곤 주먹에 물을 뿌려 자기 피와 사마귀 대가리 놈의 피를 씻어내는 퀸. 인상이 찌푸려진 거로 봐선 꽤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이리 와. 내가 해 줄게.”

“…네.”

녀석의 손을 내 손 위에 올려놓고 손목 부근쯤에서 물을 살살 붓자 퀸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아파도 참아.”

“…….”

무어라 꿍얼거리기는 하는 데 잘 안 들린다. 뭐, 보나 마나 불평이겠지. 원래 한 성깔 하는 녀석이니.

그렇게 이물질들을 씻어내고 말린 뒤 소독약을 뿌리자 퀸이 전신을 떨며 나를 쳐다본다.

그 눈에는 엄청난 배신감이 담겨 있었는데, 마치 ‘어떻게 네가 내게 이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참아. 이거 10p짜리다.”

그래도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기에 도망 못 치도록 아예 깍지를 껴서 잡은 뒤 상처에 한 번 더 뿌렸다.

“끼아악!”

처음 듣는 비명을 지르며 내게 잡히지 않는 손을 꽉 쥐는 퀸.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아픈가 보다. …나는 다치지 말아야지.

“엄살 부리지 마. 이제 절반 했는데 나머지 손 할 때는 어쩌려고.”

“조, 조금만 쉬고—, 꺄악!”

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으나 나는 망설임 없이 다른 한 손에도 물을 붓고 소독약을 뿌렸다.

“짧게 아프고 마는 게 낫다.”

갑작스러운 고통보단 예정된 고통이 더 두려운 법이다. 치과 예약일이 하루씩 다가올 때마다 얼마나 두렵던가.

아무튼 소독을 끝낸 퀸의 주먹에 연고까지 발라주고 붕대로 잘 묶었다.

“약효는 6시간 지속된다니까, 아예 잠이나 자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자기 손을 바라보던 퀸의 고개가 홱, 나를 향한다.

“저기에서요?”

통로 구석에 놓인 텐트를 가리키는 퀸이 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보다시피 텐트는 하나만 샀다. 좁으면 하나 더 살 생각이었는데, 네 명까지는 너끈하겠더라.

“왜?”

“아무리 그래도 한 텐트에서 자는 건 좀.”

“으휴, 그래. 이해한다. 네 나이 때는 뇌가 핑크빛이긴 하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영역을 전개해둘 거니까 네 욕망 정도는 사전에 차단할 수 있어.”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그만큼 일찍 일어나서 활동하면 된다. 애초에 밤낮도 없는 곳이고. 피곤한 채 움직이는 것보단 훨씬 낫다.

“내, 내 욕망?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들켜서 당황하는 거 봐라. 역시 아직 애는 애다.

나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퀸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하곤 통로 양쪽에 다 쓴 소독약 병과 남은 붕대를 꼬아 만든 원시적인 알람용 함정을 설치해두고 영역을 전개한 채 텐트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고 얼마 뒤, 텐트 밖에서 어슬렁대던 퀸이 슬그머니 들어와 내 옆에 눕는다.

“야.”

“네, 네?”

“좀 떨어져라. 텐트 넓은데 왜 이렇게 붙냐.”

“……!”

퀸이 무어라 항변하는 듯했으나 나는 곧장 잠들었기에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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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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