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하위 종의 스트리밍 (1)
간만에 잡음 없이 잠들어서 그런지 머리가 맑다. 다만, 팔을 누가 쥐어뜯는 듯한 저릿함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퀸이 눈을 감은 채 암바를 걸고 있었다.
‘…이건 몸부림 수준이 아니지 않나. 윽.’
퀸이 깨지 않게 팔을 천천히 빼자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텐트 밖으로 나오니 삼식이가 작은 바위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심란하냐.”
돌곡? 돌곡, 돌고곡.
심란하진 않은데, 사마귀 대가리가 말한 부분이 기억에 없는 게 의문스럽단다.
“삼식아.”
돌곡?
“과거에 연연하는 남자는 인기 없다.”
돌, 돌곡! 돌고옥!!
자기 쿨한 남자라고 항변하는 삼식이.
“그렇지? 그럼 형이랑 상점 물건이나 구경하자.”
어제 잠깐 보니 지구에선 쉽게 구할 수 없는 아티팩트들이 널려 있었다.
“메이지 스태프? 삼식아, 이거 사줄까?”
돌곡.
고개를 내저어 단호하게 거절하는 삼식이.
하긴, 자기 능력만으로도 엄청난 효율을 뽑아내는 녀석이니 어지간한 스태프는 크게 도움이 안 될 거다.
여러 물건을 훑어보던 중, 어떤 아이템 하나가 내 눈에 걸렸다.
【무작위 악마 소재 상자 x1 : 100p】
【사용 시 S~C급 악마 소재 중 하나가 구매자에게 전송된다.】
【*주의사항 1 : 낮은 확률로 저주받은 소재 등장.】
【*주의사항 2 : 상자 개봉 시 환불 불가】
【S : 1%】
【A : 4%】
【B : 15%】
【C : 80%】
“랜덤박스? 이건 못 참지.”
지금 가진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상자는 최대 7개.
장바구니에 전부 담고 즉시 구매를 누르자 내 정면의 공간이 세로로 갈라지더니 검은 상자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삼식이가 상자를 집어 들려는 나를 막고 자기가 먼저 상자를 툭툭 건드려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안전한지 확인한 거냐?”
돌곡.
그렇단다. 짜식.
녀석의 반들거리는 두개골을 한 번 쓸어주고 그대로 박스를 까려다, 순간 지금 스트리밍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청자 : 15】
꽤 늘었네. 어디서 입소문이라도 난 건가?
“자, 여러분. 제가 이런 걸 구했는데 말입니다.”
빛이 들어오는 공동 쪽을 보고 앉아서 상자를 들어 보이자 하얗게 비어 있던 채팅창에 글자가 찍힌다.
[익명45491-13 : 악마 소재 상자 그거 로카에서 만든 포인트 회수 콘텐츠인데.]
[익명56155-108 : 쉿! 저 하위 종은 그런 거 몰라!]
[익명119592-904 : 그냥 열어요. 자기 운이지 뭐. 로카가 확률로 거짓말은 안 함.]
입질이 왔다. 나는 살짝 고민하는 척하다, 다소 연기가 섞인 대사, “에라 모르겠다!”를 외치며 상자를 열었다.
반짝!
[익명119592-904 : 빛났네? B급 이상임. 뭐 뜸?]
[익명56155-108 : 제발 쓰레기여라. 제발!]
내가 상자 속에 덩그러니 놓인 반투명한 천 재질의 소재를 꺼내자 채팅창이 급속도로 활성화됐다.
[익명56155-108 : 크크크, 그럼 그렇지. 다행이다.]
[익명119592-904 : 하필이면 점막 날개를. 그거 가공하기에는 손이 많이 가고 대체할만한 소재도 여럿이라 아무도 안 삼.]
“윽.”
상자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엄청난 썩은 내가 코를 파고들었다.
【점막 날개(B)】
【반대편이 비쳐 보일 정도로 얇은 날개. 질기며 충격에 강하다. 모종의 공정을 거치지 않을 시 심한 악취가 난다.】
다시 상자에 넣으려고 바닥을 더듬었으나 방금 열었던 검은 상자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익명45491-13 : 상자는 전송국 물건이라 자동 회수되는데.]
“그래요? 정보 고맙습니다. 으, 냄새 고약하네요.”
텐트로 들어가 퀸에게 줬던 가방을 몰래 꺼내 내용물을 빼고 거기에 넣고 지퍼로 채우자 그나마 냄새가 좀 가셨다.
[익명56155-108 : 얼른 다음 상자 까자. 너 고통받는 거 보고 갈래. 크크.]
“다음 갑니다.”
반짝!
이번에도 옅은 빛이 상자에서 흘러나왔다.
【봉인된 흔적이 남은 악마의 가죽(A)】
【드라이어드에 의해 봉인된 악마가 죽어 남긴 가죽입니다. 오랜 봉인으로 인해 소재에 변이가 발생했습니다. 이 소재로 제작된 물품은 물, 대지, 피, 저주 속성에 강한 저항력을 가집니다.】
[익명56155-108 : 뭐야! 쓸만한 거 떴잖아. 재미없어. 악! 어, 엄마? 아니, 여긴 어떻—]
[보호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56155-108님이 채널에서 이탈되셨습니다.]
【시청자 : 14】
‘어느 차원이나 엄크는 있구나.’
흔한 컨셉러인 줄 알았는데, 진짜 잼민이였을 줄이야.
【알림】
【당신의 채널에 ‘상자깡’, ‘악마’, ‘하위 차원’, ‘하위 종’ 태그가 부여됩니다.】
【스트리밍의 제목이 ‘참가자:로맨’에서 ‘서몬&케이브! 하위 종이 2일 차에 상자깡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일 최대 시청자 수만큼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알아서 바뀌는 태그와 제목.
되겠다 싶은 참가자에게 편집자가 붙는 건가.
【시청자 : 16】
【시청자 : 22】
【시청자 : 45】
급속도로 늘어나는 시청자. 역시 어그로의 힘이란!
“이제 사람 늘 거 같으니까 편하게 좀 하겠습니다. 아니, 할게. 괜찮지?”
[익명119592-904 : 태세 전환이 대단하네.]
[익명9541-86 : 상자 깐다는 소문 듣고 왔느니라. 당장 열도록.]
“닥쳐. 결정은 내가 한다.”
일순 조용해지는 채팅창. 이후 엄청난 속도로 글이 올라온다.
웃음과 욕과 조롱이 뒤섞여 난장판이 된 채널.
[익명9541-86 : 잡것답지 않게 패기는 좋구나. 하지만 그 오만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빠르게 채팅이 올라가는 와중, 다수의 문장에서 ‘상위 차원’이 언급된 거로 봐선 저 녀석이 여기서 가장 높은 차원의 존재인 듯하다.
“얼마든지.”
[익명9541-86 : 기대하지.]
[익명9541-86님이 채널에서 이탈하셨습니다.]
* * *
-닥쳐, 결정은 내가 한다.
-얼마든지.
“이야~ 이 하위 종 녀석 지금 죽이긴 아까울 정도로 배포가 대단하네요. 그렇죠? 팀장님.”
손톱과 손톱을 맞부딪쳐 챠르륵 소리를 내며 흥분하는 데모니오.
그의 업무용 단말기 상단에는 ‘익명9541-86’이라는 계정명이 느릿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헛소리. 다음 플랜으로 넘어가라. 사람 보내놨다.”
서몬&케이브의 모든 구역은 포인트로 구매한 텐트처럼 안전 구역을 지정하지 않는 한, 매일 다른 지역으로 이동되거나 지형이 격변한다.
이는 행사기획팀에서 임의로 조정이 가능한 부분이었고 솜브리오 팀장은 의도적으로 다섯 공동 지역에 다수의 참가자를 밀어 넣었다.
“예이, 예이.”
“…데모니오 선배님. 이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자리에 돌아와 앉은 데모니오에게 허슬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럼, 저 로맨이라는 놈이 우리가 놓친 상위 차원 간섭 건을 떠들어서 회사 주가 떨어지면? 네가 책임질 수 있냐?”
“…아뇨.”
“그렇지? 그러니까 이게 최선이야. 입 다물고 팀장님이 시킨 거나 잘해. 어차피 이런 추잡스러운 건은 내 담당이라 네가 신경 쓸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허슬리를 물린 데모니오는 슬그머니 올라오는 자기혐오에 속으로 짧은 욕지기를 뱉어 떨쳐내곤 단말기를 붙잡았다.
“현상금은 이 정도면 되겠고 아이템은….”
* * *
[익명119592-904 : 쯧쯧, 곧 현상금 걸리겠네. 죽기 전에 상자는 다 까자.]
“현상금?”
[익명119592-904 : 방금 그 상위 종이 다른 스트리밍 채널에 들어가서 아이템이나 포인트를 대가로 너를 죽이라고 의뢰하는 걸 현상금 건다고 그럼.]
[익명137456-117 : 1만 번대 안쪽이면, S급은 몰라도 A, B급은 산처럼 쌓여 있을 테니까 비처럼 뿌릴걸? 쟤들은 자존심 건드리면, 수수료고 규칙이고 신경 안 써.]
엄청나게 몰려온다는 소리네.
[익명154789-358 : 야! 얼른 도망쳐. 다섯공동에 있는 애들 다 너 찾아다닌다.]
다섯 공동? 이 구역의 이름인가.
딸랑딸랑.
공동 입구에 설치해둔 원시 알람이 요란한 소리를 내자 텐트에서 퀸이 쏜살같이 튀어나온다. 좌우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녀석.
“주먹은?”
“안 아파요.”
괜찮다고 할 줄 알았는데. 소독약이 진짜 아팠나 보다.
“찾았다!”
“다들 이쪽으로!”
“입구 막고 포위해!”
통로 끝에서 들려오는 다수의 목소리. 그 잠깐 사이에 연합이라도 했는지 한둘이 아니다.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기 위해 영역을 최대한 넓게 펼치자 양쪽 공동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음?’
왼쪽 공동에 있던 세 사람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죽은 건 아닐 테고. 내 영역을 상쇄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법사가 있나.’
정리하면, 왼쪽 공동엔 마법사를 포함해 약 5명. 오른쪽은 7명. 소환수까지 하면 두 배.
숫자가 딱 맞아떨어진 걸 보면 나처럼 친구를 데려온 하위 종은 없는 듯하다.
“너 오른쪽, 내가 왼쪽.”
“네.”
“삼식이 데려가.”
“괜찮아요.”
붕대가 감긴 주먹을 들어 살짝 웃는 퀸.
제 딴에는 여유롭게 보이고 싶었나 본데, 잔뜩 구겨져 있는 미간 덕에 실패다.
“삼식아, 퀸 도와줘. 할 수 있지?”
돌곡?
“마나는 지금 절반 넘겨줄게.”
돌곡!
“괜찮다니까요.”
“데려가. 저쪽이 많아서 그래. 위험하면 내 쪽으로 오고.”
말을 끝내고 주먹을 내밀자 퀸도 주먹을 쥔 채 살짝 부딪친다.
“살아서 보자.”
“당연하죠!”
통로를 벗어나 공동으로 들어서자 성게처럼 생긴 공이 내 얼굴에 달려들었다.
“후읍!”
적의 선제공격은 예상하였던지라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 발밑에 전력으로 미르토스 해변을 구현.
풍덩!
대략 10m를 내려와 올려다보자 성게를 포함해 셋이 수면에 머리를 들이댄 상태로 나를 찾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내 능력이 뭔 줄 알고 저렇게 접근한단 말인가.
저 행동에서 상위 차원과 하위 차원을 가르는 기준이 단순히 지능은 아님을 확신했다.
‘넥서스.’
1학년 동안 미르토스 해안 중 바다의 넓이에 시간을 쏟았다면, 겨울방학 이후부턴 깊이에 투자했다.
결과, 우주 순양함 넥서스를 수중에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깊어졌다.
본래 넥서스를 내 발아래에 구현해 부상시킬 시 함포를 사용할 때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이곳처럼 협소한 곳에선 구현되다 마는 경우도 발생하고.
하지만 지금처럼 넥서스를 수중에 완벽히 구현하면, 장전에서 발포까지의 딜레이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부양에 쓰일 에너지를 함포로 돌릴 수 있어 위력이 배가된다.
‘주포 장전.’
풍덩.
지금쯤 함교에 있을 기드빈에게 사념으로 명령을 내리자 처음 나를 공격했던 성게가 물속으로 들어왔다.
‘용기 하나는 인정한다.’
성게는 주변을 살피며 하강하다 나를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으나 어느 순간 제자리에 멈춰서더니 급히 뒤돌아 올라간다.
끼이이이이!
수중에 울려 퍼지는 성게의 비명.
뒤에서 빛이 깜빡인다. 충전이 완료되었다는 신호.
나는 검지를 가볍게 내리긋는 것으로 의사를 전달. 저 멀리서 기드빈의 ‘예 써!’라는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쭈웅—
막대한 양의 물을 증발시키며 솟구친 광선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 * *
【긴급! 긴급!】
【서몬&케이브, 다섯 공동 지역 반파!】
툭.
솜브리오의 입에 물려 있던 연초가 차가운 사무실 바닥을 구른다.
급히 발로 밟아 불을 끝 솜브리오는 주포에서 뻗어 나온 에너지 포의 빛에 의해 드러난 함선의 전면부를 노려봤다.
“…넥서스.”
지구 기준으로 4년 후에 개봉하는 드라마, ‘솔라 파이럿츠’에 등장하는 함선의 이름이 솜브리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팀장님. 저 함선, 하위 차원에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않아요?”
같이 영상을 보던 데모니오가 감탄과 짜증이 반반 섞인 목소리로 묻자 솜브리오는 표정을 추스르며 답한다.
“글로리아 차원의 함선이다.”
“오, 그런 걸 하위 종이 어떻게 구했을까요? 잠시, 검색 좀. 이야, 160년 전 함선? 박물관에 기증하면 떼돈 벌겠네. 어? 그때면 팀장님이 엘라크 선장일 시절…, 큼. 죄송합니다.”
“지나간 일이다. 일에 집중해라.”
“넵.”
제국의 지도자를 두고 도망쳤다는 오명으로 인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던 과거가 떠오른 솜브리오는 눈가를 좁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연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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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