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하위 종의 스트리밍 (2)
넥서스의 주포가 공동의 천장에 구멍을 뚫었을 무렵, 그레이스 멜론과 삼식은 반갑지 않은 괴물과 조우하고 있었다.
“와일드, 나의 대적자여!”
입과 손톱을 붉게 물들인 채 시체 더미 위에 앉아 있는 사자 머리의 수인.
돌곡.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가 나눈 추억은 피와 욕망일지니. 다시 쌓는 것 또한 흥겨우리라!”
시체 더미 위에서 도약하는 사자 수인.
삼식은 남만혁에게 미리 받은 마나로 매직 미사일을 시전했으나 수인에게 닿기 전에 사라졌다.
들그극!
“괜찮아.”
분해하는 삼식이의 앞을 막아서는 그레이스 멜론.
“꺼져라! 크헝!”
수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포효가 공동을 울린다.
평범한 하위 종은 최소 기절, 최대 사망까지도 이를 수 있는 고절한 피어였으나 그레이스는 눈의 초점이 잠깐 흐려졌다 돌아오는 정도로 무마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전투와 명예만을 위해 삶을 구가해온 그린에게 이 빈틈은 목숨을 빼앗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쒜에엑!
무반동 왼발 올려 차기. 사냥감을 일격에 꿰뚫기 위해 기형적으로 발달한 그림자 사자의 발톱이 그레이스의 턱을 때리고 회수된다.
포물선을 그리며 나가떨어진 그레이스가 낙법을 치며 용수철처럼 튕기듯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는다.
“으음?”
가격당한 부위에는 피 한 방울 맺혀있지 않았다.
“기이하구나. 분명 턱부터 머리까지 꿰뚫려야 정상이거늘. 크헝!”
고개를 기울이다가도 그레이스가 주먹을 말아쥐자 다시 포효를 터트리며 접근하는 수인.
앞차기, 돌려차기, 뒤차기, 회전 차기, 날아 차기, 뒤돌려차기.
순식간에 연계 공격을 그레이스에게 적중시켰으나 유효타는 없었다.
‘아무리 육체를 강제하는 중이라 하여도 하위 종 정도는 찍어 눌러야 하거늘.’
사자 수인의 생각대로 그레이스는 일격을 허용하고 나서야 방어 모션을 취할 정도로 반응이 늦었다.
지금도 수인이 관자놀이를 차고 다음 공격으로 들어가는 중에서야 팔을 들어 귀 옆에 붙인다.
그레이스의 반응 속도는 약 0.2초.
중위 종 중 전투에 재능이 없는 이들도 0.1초 안쪽인 걸 고려하면, 종의 한계라는 것이 얼마나 높은 벽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후욱, 흡!”
그리고 그레이스 멜론은 그러한 종의 한계를 ‘적이 지칠 때까지 버틴다.’라는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크흐흐흐, 재밌구나. 재밌어.”
페이크를 섞어가며 집요하게 그레이스의 턱을 공격하던 수인은 어느 순간 이 몸뚱이가 더는 쓸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아차리곤 실소를 흘렸다.
반쯤 곤죽이 된 다리를 늘어트린 채, 거북이처럼 상체를 웅크리고 가드를 올린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하위 종 계집, 너는 뭐지?”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남만혁이 여기서 히어로 명을 쓴다는 것을 떠올리곤 본인의 별명을 말했다.
“퀸. 히어로다.”
“호, 여왕이자 영웅이라. 오만한지고. 하지만 어울리는구나. 나는 발파록이다. 강체술사지.”
빠가가각!
통성명을 마치자 돌연 수인의 전신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고, 그레이스는 발파록이 최후의 기술을 쓰는 것으로 예상하여 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당사자는 초연한 얼굴이었다.
“내일이 기대되는구나. 히어로 퀸. 항복이다.”
그 말을 끝으로 수인을 둘러싸고 있던 모종의 아우라가 걷혔고 머리부터 녹아내렸다.
잠시간 긴장을 유지하다 시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벽에 기대는 그레이스.
“후—”
짝짝짝.
“잘 버텼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남만혁이 손뼉을 치며 통로에서 걸어 나왔다.
그가 이번에도 해변을 이용해 승리했음을 직감한 그레이스는 안심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 좀 쉴게요. 너무 힘들다 진짜….”
그레이스와 발파록이 싸우는 광경을 중반부터 본 남만혁이었기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어땠어요?”
누운 상태로 묻는 그레이스를 내려다본 남만혁이 픽 웃는다.
“구멍 하나 내니까 알아서 해결되더라고.”
* * *
행사기획팀에서 시설을 관리하는 사원은 다섯 공동 지역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리오 팀장님, 당장 시설 복구 의뢰를 해야 합니다!”
이번 서몬&케이브는 메가시티급 우주선, 흐라무스의 일부를 빌려 진행되는 중이다.
반파된 다섯 공동은 다행히 우주선의 가장 외곽에 배치된 지형이었고 중앙도시에 복구 의뢰를 넣으면, 최소한의 손실로 막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최대한 설득력을 가지게끔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시설담당자였으나 돌아오는 답은 부정적이었다.
“있는 자재로 때우는 건 어렵나?”
“안 됩니다! 자재 옮기는 동안 저기 있는 사람들 다 죽습니다. 이미 다섯은 죽었지만…, 승자라도 살려야죠! 보수 부위도 점점 넓어질 거고요. 팀장님, 사고는 이미 벌어졌습니다. 시말서는 이미 확정이란 말입니다. 그럼 최소한 막으려고 노력했다는 핑계, 아니 명분은 챙기셔야죠. 아, 돈 아낄 때가 아니라고! 어차피 회삿돈이잖아!”
“투카.”
“…제가 좀 흥분했죠? 죄송합니다.”
“시티에 의뢰 넣어라. 긴급으로.”
“알겠습니다!”
시티에서 나온 로봇들이 다섯 공동을 수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솜브리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테라포밍 펀드가 이번 달에 끝나던가.’
회사의 쓰레기통이라 불리는 행사기획팀에 지원이 있을 리 만무했고, 수리 비용 대부분은 팀장의 책임이었다.
* * *
【알림】
【다섯 공동 수리를 위해 일부 지역 이동이 제한됩니다. 】
【2, 3, 4, 5번 돔이 봉쇄됩니다.】
【수리 완료까지 약 28일.】
퀸의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런 알림이 뜨더니 내가 넥서스를 불렀던 공동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오는 길에 배낭 챙기길 잘했지.’
텐트는 상관없는데 배낭은 좀 전에 박스 까고 얻은 소재들을 넣어놔서 날아가면 속 좀 쓰릴 뻔했다.
“멀쩡한지 확인하긴 해야 하는데….”
지퍼로 바짝 닫아뒀음에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악취. 섣불리 열 엄두가 안 난다.
열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6연승!】
【승리 보상을 지급합니다.】
【*간섭 개체를 처치하셨습니다. 추가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승리 보상 : 10p x6】
【추가 보상 : 1,000p】
【전적 : 승리8 / 무승부1】
추가 보상이 이전보다 100p 늘었다.
‘강함에 따라 증감하는 건가?’
퀸이 반격조차 못 한 걸 보면, 신빙성이 있다.
【경고!】
【의도적인 시설 파괴는 규칙에 벗어나는 행동입니다. 2회 경고 시 행사에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경고라. 부서질 줄은 몰랐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주의하는 거로.
【시청자 : 1,388】
다섯 공동에 구멍을 냈더니 시청자가 다시 한번 급증했다. 채팅 올라오는 속도가 읽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그래도 드문드문 보이는 단어를 조합하면, 두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공동 천장 어떻게 부쉈냐고? 봤잖아? 돈 내고 다시 보기 하던가.”
얼핏 읽었는데, 지나간 영상을 다시 보려면 저쪽의 화폐를 내야 한다더라.
화난 악마의 얼굴 형태의 이모티콘이 채팅창에 수십 개 찍힌다.
“이 하위 종이 누구냐고?”
퀸을 가리키며 묻자 채팅창에 다수의 동그라미가 주르륵 올라온다.
잠깐 쉰다며 누웠던 퀸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퀸. 나의 미래이자 희망이라고 할 수 있지.”
우리 미래의 그블린 학살자님이 잘 주무시도록 들고 있던 가방을 녀석의 머리 아래로 밀어 넣었다.
“으으, 으.”
코를 벌름거리며 괴로워하는 퀸. 악몽이라도 꾸는 거겠지. 크흠.
“자자, 질문은 됐고. 뽑기나 하자. 다들 그거 보려고 온 거잖아?”
【무작위 악마 소재 상자 x10】
이번에도 갈라진 공간 사이로 쏟아진 박스들.
나는 먼저 생수를 사서 손을 씻고 신중하게 박스를 쌓아 제단처럼 만들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익명48978-890 : 나 저거 알아. 하위 종 문화, 우상숭배. 맞지?]
[익명43385-1010 : 어. 저러다 가끔 신내림이라는 정신착란에도 빠진대.]
[익명48978-890 : 으, 미개해!]
[익명8008-200 : 1010의 말이 틀린 건 아닌데, 누굴 우상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 허상의 존재라면, 정말 정신착란에 빠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상위 차원에 실존하는 대상이라면.]
[익명48978-890 : 대상이라면?]
[익명8008-200 : 해당 존재의 힘이 깃들기도 해.]
[익명48978-890 : 우와!]
“와랏!”
혼신의 기원을 담아 상자 5개를 연속으로 열었다.
반짝….
어쩐지 축 늘어지는 듯한 어설픈 빛들.
【멋쟁이 악마의 수염(C) x2】
【요염한 악마의 팔꿈치 비늘(C)】
【막 명성이 생긴 악마의 어금니(B)】
【훼손된 이름 없는 악마의 뿔(B)】
“으아아아아아!”
[익명48978-890 : 정신착란 맞지?]
[익명8008-200 : 저 하위 종은 운이 없었네.]
홧김에 나머지 상자도 열려다 혼자 주저앉아 자기 머리를 때리는 삼식이가 눈에 들어와 가까이 다가가자.
돌, 돌곡!
화들짝 놀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삼식이.
“뭐 하냐.”
돌곡, 돌고옥! 돌골—
삼식이가 자신은 무능하다며 비판을 길게 하길래 중간에 사념을 끊고 상자를 들이밀었다.
“삼식아, 나한테 미안해?”
돌곡….
“만회하게 해줄까?”
돌곡!
“자.”
자기 상체보다도 큰 상자를 받아든 삼식이는 달각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린 뒤 상자를 열었다.
파아앗!
새하얀 빛이 공동을 채웠고 사그라들 무렵엔 상자 위로 하나의 물건이 둥실 떠올랐다.
【기원을 삼키는 악마, 그레블로스의 뿔 레플리카(S)】
떴다.
“삼식아!”
돌, 돌곡!
“그래, 해냈다! 네가 해냈다고!”
삼식이를 잡아 들고 목말을 태워 공동을 한 바퀴 질주했다. 짧은 양팔을 위로 들고 돌돌 대며 환호하는 삼식이.
[익명48978-890 : 우상숭배, 지금 하러 갑니다.]
흥분이 진정된 다음 남은 상자 3개도 삼식이에게 맡기려다가 혹시 낮은 등급 나오면 또 풀이 죽을 듯해, 방금의 소란으로 깬 녀석에게 맡겼다.
“저기….”
“퀸, 네 차례다.”
“저, 저요?”
“믿는다. 우리의 희망!”
“읏, 그렇게 말해도…. 열게요?”
“세 개 한 번에 가자!”
“에잇!”
검은색도 빛이 있다면 이러할까. 퀸이 마지막에 연 상자 위로 검은 기둥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축하드립니다. 무작위 악마 소재 상자에 ‘변이 : 행운’이 깃들었습니다.】
“변이?”
【*변이 : 서몬&케이브의 모든 오브젝트를 대상으로 발생하는 무작위 이벤트. 변이의 효과는 방대하다.】
“만혁, 이것 좀 보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상자 안을 가리키는 퀸.
【일점압축의 악마, 소마의 주먹(SS)】
그곳에는 금빛의 손 한쪽이 고급 방석 위에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들어서 꺼내려는데.
“이거 무게가 꽤, 응?”
꿈쩍도 안 한다. 상자에 용접이라도 된 것처럼 상자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주먹.
“이게 무슨.”
“제가 해볼까요?”
퀸에게 넘기자 녀석은 상자의 가장자리를 발로 밟고 소마의 주먹을 잡아당겼다.
뜨드득!
뭔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난 직후, 상자가 하늘을 날았고 반동으로 튀어나온 금주먹은 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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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