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카오스믹서 (2)
돌고래 수인이 상자를 열자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라 입으로 쑥 들어간다.
새까맣던 눈이 하얗게 뒤집힌 돌고래 수인이 크게 몸을 들썩이더니 두리번거리며 일어난다.
“이변은 없었네요.”
“이번에는 누가 이길지 궁금하군요. 어제는 꽤 아슬아슬했었죠?”
“예, 발파록 선수가 퀸 선수의 턱에만 집착하지 않았어도 가능성이 있었거든요.”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린. 어이쿠, 실례. 베르데 종은 하나같이 고집이 세죠.”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한 번 정한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번복을 안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그게 참 안타깝단 말이죠. 퀸 선수의 턱은 저 단단한 가드 안에 있지 않습니까. 이족보행 개체 특성상 다리를 공략하면 일이 쉽게 풀릴 텐데요. 아, 절대 편파 중계는 아닙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시청자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제가 대신 전달해 드린 것뿐입니다.”
“이해합니다. 헛! 말씀드리는 순간 옥타곤에 입장하는 발파록 선수! 퀸 선수와 인사를 나누는군요.”
“제가 중계를 맡은 게 벌써 10일째인데, 그 전부터 저 둘은 매일 전투를 해왔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일 겁니다.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면 친구가 되지 않을까요?”
중계진의 티키타카가 제법이다. 처음에는 무슨 짓거릴 하는지 궁금해서 놔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방치하길 잘한 거 같다.
【시청자 : 5,090】
단순히 퀸과 발파록 둘만 싸울 때에 비해 시청자 수가 크게 늘었다.
어정쩡한 참가자가 정리되면서 넘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숫자임은 틀림없다.
저 중계진도 그렇고 참가자 대부분이 시청자 수에 목을 매는 이유는 다름 아닌 포인트 때문이다.
‘매일 최고 시청자 수만큼 포인트를 주는 게 크지.’
나의 경우 거기에 지형 변동으로 인해 매일 새롭게 나타나는 참가자들과 지금처럼 간섭 개체, 발파록을 처치해 얻는 포인트를 더하면 하루에 약 7천 이상을 벌고 있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환호에 고개를 돌리자 발파록이 전신에 물의 고리를 두른 채 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크하하하! 튼튼한 것 하나는 가히 세계 제일이구나!”
고속으로 회전하는 물 고리와 박투에 최적화된 돌고래 수인의 권각이 퀸의 가드를 난타한다.
놈의 맹렬한 공세에 철조망이 폭풍우 속 창문처럼 요동침에도 가드를 올린 퀸은 일체의 흔들림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발파록이 제풀에 지치면서 끝나겠지.’
며칠째 보아온 익숙한 광경이다.
“화이팅.”
누구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가볍게 퀸을 응원한 다음, 나는 내 할 일을 위해 텐트로 들어왔다.
“어디까지 분류했더라.”
본래 소마의 주먹과 그레블로스의 뿔 레플리카를 뽑은 순간, 상자는 그만 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카오스 믹서]
하지만 녜블라를 통해 이 합성 항아리가 내 손에 들어와 버렸고 나는 행복회로를 풀가동하고 말았다.
카오스믹서는 처음 내 우려와 달리 투자한 소재의 소실이라는 리스크 말고는 내 몸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종류의 아이템은 아니었다.
덕분에 쓸모없는 B, C급 소재를 대량으로 처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인 A급 소재는 52개.
와르르.
-왁!
늘어놓은 소재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와중, 구석에서 안개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헉!
순간 악마의 원혼인 줄 알았다. 가끔 등장하는 저주받은 소재가 원념을 쏘기도 해서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데.
“놀래라, 이 자식아!”
안개 속 구슬에 꿀밤을 먹일 요량으로 주먹을 들자 녜블라가 급히 사념을 보내왔다.
-잠, 잠시만요. 뿔이랑 심장, 마나스톤은 이쪽. 그 외 신체 부위는 여기요. 로맨이 자는 동안 쿠아랑 내가 분류작업 끝냈어요.
“…잘했다.”
주먹을 내리자 안도하는 녜블라.
-휴, 그런데 이거 정말 항아리에 다 넣을 거예요? 아까운데.
오늘까지 내가 연 상자의 개수는 약 800개. 그런데도 모인 A급 마나 관련 소재는 뿔 4개, 심장 2개, 마나스톤 2개가 전부다.
S급도 몇 개 나오긴 했으나 처음 뽑은 그레블로스의 뿔을 제외하면 전부 가죽이나 힘줄 같은 일반 소재였다.
“해야지.”
소마의 주먹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S급의 위가 있다는 걸 안 이상 다른 길은 없다.
‘이 ‘레플리카’도 마음에 안 들고.’
아무리 급이 높고 효과가 좋아도 짝퉁이라는 말 아닌가. 스승님이나 안토니오 같은 놈에게 보이기가 민망하다.
나는 A급 뿔 하나와 심장을 집어 들었다.
-지, 지금 하게요? 쿠아야, 나 어떡해. 너무 설레.
어느새 텐트에 들어온 물레방아를 부둥켜안고 내가 내려놓은 항아리를 주시하는 녜블라.
“가자!”
A급 소재 두 개를 항아리에 던져 넣고 잠시 기다리자.
피유우우.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회색 연기. 저건 실패했을 때의 효과다.
-아아….
“한 번 더 간다.”
-불행은 몰려온다고 그랬어요. 조금 쉬었다가, 악!
무시하고 뿔과 마나스톤을 넣음과 동시에 내가 아는 모든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나의 간절함이 닿았을까, 항아리 속에서 화려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우와!
【마나를 흡수하는, 쥬라토의 마나스톤(S)】
오케이. 기세를 몰아 나머지 A급 소재를 차례로 넣었고, 결과.
【천변만화의 술을 창시한, 페일락의 심장(S)】
【원소 내성의 극에 다다른 헤르난디드의 뿔(S)】
신은 존재한다!
내 기도를 듣고 개입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연달아 세 번을 성공할 리 없잖은가.
“한 번 더!”
극도의 흥분으로 인해 떨리는 손으로 심장과 뿔을 들어 카오스믹서에 넣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두 번 뛸 시간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갑자기 가느다란 빛 한줄기가 솟구쳐 오른다.
“어?”
싶었으나 대뜸 중간에 힘없이 꼬꾸라지는 빛줄기. 그리고 이어지는 회색 연기.
…신은 죽었다.
-이, 이번에는 진짜 쉬었다 하죠.
“끙, 그래.”
찬 공기 좀 마실 겸 밖으로 나오니 공동은 어느새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우오오오!
“정타가 들어갔습니다! 퀸 선수 물러납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거든요? 아, 이렇게 무너지나요.”
중계진 역시 관중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고양된 목소리였다.
‘퀸이 무너져?’
“고집을 꺾은 발파록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건 상대를 호적수 이상으로 인정한 거거든요? 아, 저런! 퀸 선수 절뚝거립니다. 왼쪽 다리 부상으로 보이는데요.”
저들의 말대로 퀸은 제자리에서 버티는 게 아니라 한쪽 다리를 끌며 스탭 아닌 스탭을 밟고 있었다.
부상 때문에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는 건가? 그렇다는 건….
‘내구가 깨졌다.’
이러면 위험한데.
뻐억—
발파록이 로우킥을 페인트로 주고 팔꿈치로 퀸의 얼굴을 강타한다. 녀석의 머리가 홱 돌아감과 동시에 입 안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내 볼에 후두둑 떨어진다.
휘청거리는 퀸.
돌곡? 돌곡!
경기장 바로 옆에 있던 삼식이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안광을 급하게 깜빡이며 내 바짓단을 잡아당긴다.
돌곡! 돌고곡, 도르륵!
매우 거친 의사가 담긴 사념이었는데, 순화하면 이렇다.
퀸을 돕기 위해 경기장에 들어가려 했으나 퀸이 강한 어조로 거절했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계약자가 어떻게든 해달라.
“삼식아.”
돌곡?
“우리는 발파록을 못 이겨. 퀸이 여기 있는 전원을 지켜주고 있는 거야.”
돌곡!
“저건 누가 봐도 괴물이잖아. 어떻게 상대하냐.”
현재 발파록의 공격은 제대로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퀸이 맞고 밀려난다는 결과가 있으니 과정을 유추할 뿐이지.
돌곡, 돌고곡!
넥서스나 해변을 구현해서 어떻게든 해보자는 녀석.
나는 삼식이를 들어 어깨에 태운 채 펜타곤 내의 상황을 조금 더 주시했다.
쾅!
“으윽.”
역시, 역전의 기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튈 준비를 해야….
‘음?’
이제껏 정면이나 발파록만 응시하던 퀸이 흘낏, 경기장 천장을 바라본다.
“…아하.”
이해했다.
퀸의 노림수를 가늠한 나는 그 즉시 경기장 위에 해변을 구현했다.
“놈! 신성한 결투 중에 이게 무슨 짓이냐!”
발파록이 나를 노려보며 경기장 바닥을 발로 한 번 쿵, 찍자 거기서 퍼져나온 파동이 현실을 잠식해가던 내 구현을 한순간에 파괴한다.
히어로들이 무력하게 쓸려나간 이유가 바로 저거다. 전투 훈련을 받은 그린과 블루는 전부 저런 종류의 힘을 제 신체의 일부처럼 능숙하게 다룬다.
“미안하다. 그래도 몇 개만 더 해볼게.”
해변을 부를 수 없는 순간 넥서스 구현은 물 건너갔다. 하여, 군단의 심장을 최대한 의식하며 발파록에게 사념파를 발사.
“감히, 이딴 저급한 수를!”
초록색 얼굴이 노랗게 변할 정도로 분노하는 발파록.
저리 반응할만하다. 같은 인간에게도 잘 안 통하는데, 상위 종에게는 먹이로 길들이려는 느낌이었을 테지.
“서몬 애시드 좀비.”
애시드 좀비는 다크 넥서스로서 활동할 때만 사용하려던 마법이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다.
‘퀸이 쓰러지면 다 끝장이다.’
발파록이 나를 신경 쓰면 쓸수록 퀸의 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내 독 좀비를 멀찌감치서 권풍과 물 고리로 처리하는 발파록.
“네놈의 공격은 조금의 흥미도 일지 않는구나.”
몸을 아예 내 쪽으로 돌려 오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발파록. 나는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카츄의 배를 긁어 독 문어와 복어의 교배를 통해 탄생한 알을 던졌다.
발파록이 손을 젓자 그것만으로 알은 경기장 철조망에 부딪혀 터졌다.
“고작 이거냐.”
세상 모든 한심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발파록은 콧방귀를 끼곤 다시 퀸을 향해 돌아선다.
“포이즌.”
“뭐라?”
철조망을 녹이던 독이 떠올라 허공에 방울방울 맺히더니 내 앞으로 온다. 나는 그걸 움켜쥐고.
“영역, 전개.”
극도의 집중력으로 영역의 크기를 발파록과 나를 넣게끔 조절해 펼쳤다. 대신, 위력에는 신경을 쓸 수 없어 놈과 나를 제외한 영역 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한 줌의 독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한 수는 있구나. 그래 봐야 하위 종의 마법. 이 몸에는 닿을 수 없다.”
과연, 놈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내 마나의 9할을 영역을 구축하는 데 사용했건만.
“역시 그런가.”
직감. 이놈과 나는 상성이 안 좋다. 아니, 애초에 그블린을 상대하기에는 나를 포함해 인류 전체가 한참 이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한 명.”
영역을 풀었다.
“포기인가. 무능한 것이 근성도 없구나.”
내게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발파록.
“이봐.”
“들어주마. 패배자의 단말마를 경청하는 것 또한 전사의 덕목일지니.”
“빛에 준하는 속도로 맞아본 적 있나?”
“무어—”
내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자 고개를 드는 발파록, 그리고 그곳에는 공동의 천장을 돌아 초음속을 한참 돌파한 퀸의 주먹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콰앙!
임팩트 직후, 공동 전체에서 먼지가 피어오를 정도의 충격이 팔방으로 퍼져나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자욱했던 먼지가 걷히자 발파록은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나 있었다.
이것이 가능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 영역을 전개하며 경기장을 녹여 퀸이 다이브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
둘, 발파록의 오만한 성격.
나나 퀸 정도는 쉽게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또 도움받았네요.”
퀸은 발파록이었던 것들을 발로 쳐내며 내게 걸어왔다.
“도움이랄 것도 없지. 우린 팀인데.”
삼식이를 끌어안으며 그리 말하자 퀸이 머쓱하게 웃으며 볼을 긁는다.
“사실 조금만 더 버티면 내구 특성이 성장할 거 같아서 삼식이의 도움을 거절했었어요.”
“뭐? 그걸 왜 지금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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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