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The Queen (1)
남만혁의 고치화로부터 3일째.
“으하하하! 뚫어주마!”
공동의 벽에 몰린 그레이스 멜론을 네 개의 주먹으로 난타하는 발파록.
돌곡.
삼식은 그레이스가 주의를 끄는 동안 은밀히 주문을 외워 발파록의 후방에 검은 구체를 생성했다.
돌고곡!
삼식이 신호를 보내자 구체에서 튀어나온 대량의 매직 미사일이 그대로 발파록의 권능, 대와일드식 마법방해역장을 뚫고 전신을 강타한다.
“아! 발파록 선수, 단말마조차 뱉지 못하고 패배합니다! 우리 퀸 선수, 대견합니다. 오늘도 버텨냈어요! 나라돌 해설자님은 지금 장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예, 훌륭합니다. 퀸 선수 덕분에 저희도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며칠 전, 두 사회자 중 하나가 발파록에게 빙의 당해 죽었다. 갑자기 파트너를 잃은 브렐레는 급하게 남은 관중 중 한 명을 끌어들여 중계석을 채웠고, 지금의 어설픈 중계에 이른다.
브렐레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급히 전날 보여준 퀸 선수의 활약을 언급해 오디오를 채워 넣었다.
“사흘 전만 해도 저희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위 차원 출신 나라돌은 중위 차원 출신인 브렐레의 눈총을 받고 나서야 내려놓았던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맞습니다. 사흘 전만 하더라도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퀸 선수가 패배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확실히 그랬죠. 삼식 선수의 참전이 없었다면 필패였을 겁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보니 나라돌 씨가 당시 삼식 선수의 인터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야기 좀 풀어주시죠.”
고향별에서 무덤지기였던 나라돌은 언데드와 원활하게 소통하는 능력이 있어, 남은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삼식의 사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그게 말입니다. 마나의 새로운 질서를 깨달았답니다.”
“예?”
“큼, 저도 마법사가 아닌지라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들은 대로 말씀드리자면, 지금껏 자신의 매직 미사일을 방해하던 발파록의 권능을 역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뭔가 심오한 깨달음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최근 3일간의 결투는 퀸이 전방에서 방어를 맡고 삼식이 후위에서 공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첫날은 초반에 잠깐 발파록이 우세하였으나 중반 이후엔 오늘처럼 삼식의 매직 미사일에 당해 그레이스가 쉽게 승리를 가져갔었다.
“하지만 발파록 선수의 숨은 저력이 상당한 듯합니다.”
“동의합니다. 그 부분이 저도 관심이 가서 따로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이 표를 봐주시죠.”
“음, 공격 성공 횟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이대로면 며칠 내로 퀸 선수가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서 읊조리는 말이었기에 시청자들의 반응도 꽤 뜨거웠다.
[익명 239234-2108 : 이게 정말 하위종과 상위종의 싸움이 맞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익명 125651-8729 : 큰마음 먹고 다시 보기 질렀는데, 후회 없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퀸, 매일 새로운 권능을 가져와 눈을 즐겁게 해주는 발파록. 환상의 조합이다.]
[익명 9156-345 : 사회자들. 죽을 거 같아도 도망치지 마라. 내가 살려준다.]
[익명 4584-91 : 가장 좋은 시점을 제공하는 두 사회자분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시청자 : 9910】
남만혁의 시청자를 그대로 끌어온데다 ‘초엘리트 상위종 vs 듣도 보도 못한 하위종’이라는 제목으로 알고리즘에 오른 덕에 많은 숫자의 시청자들이 이 두 사회자의 채널로 몰려왔다.
‘하루를 버틸 때마다 얻는 포인트가 대략 1만. 이거면….’
포인트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생각하며, 오늘도 목숨을 걸고 다섯공동에 잔류하는 것을 선택한 브렐레였다.
* * *
남만혁 고치화 10일째.
“와일드!”
“삼식아, 뒤로!”
대롱대롱 흔들리는 금주먹을 허리에 매단 그레이스 멜론이 삼식을 향해 달려가는 발파록 앞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크로스 가드 중심을 정확하게 때리는 발파록의 권격.
투둥, 퉁!
타격지점을 무수히 진동시켜 파괴하는 권능, 일파만파가 그레이스의 가드를 날려버린다.
체력 소모가 심해 고향에서는 쓰지 않는 권능이었으나 발파록은 이 한순간을 위해 가져왔다.
회심의 권능으로 틈을 만들어낸 발파록이 상체가 훤히 드러난 그레이스에게 주먹을 뻗었다.
돌곡!
그때 그레이스의 뒤에서 날아온 두 발의 일그러진 형태의 매직 미사일이 발파록의 주먹에 닿았다.
“크하아압!”
발파록은 손을 희생해 퀸의 복부를 뚫어버릴 생각으로 더욱 어깨에 힘을 주고 주먹을 밀어 넣었으나 매직 미사일은 놀랍게도 그의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팔을 타고 올랐다.
“큭!”
순식간에 어깨를 통과한 두 매직 미사일은 발파록의 눈에 착탄, 폭발했다.
깔끔하게 날아간 머리. 발파록이 빙의한 고릴라 수인의 몸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돌곡.
주의하라는 삼식의 사념을 들은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호흡을 고른다.
바로 어제, 저런 상태에서도 되살아났던 발파록이었기에 두 사람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꾸드득, 뜨득.
아니나 다를까. 권능, 황혼의 재생을 통해 육체를 복원한 발파록은 누운 상태로 눈을 껌뻑이더니 씨익 웃고는.
“이 얼마 만에 느끼는 흥취의 연속이란 말인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
발파록이 한순간에 그레이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것은 삼식의 뒤였고 고릴라의 굵은 팔 네 개로 삼식의 사지를 결박하더니 공동에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게 뛰어올랐다.
새로 익힌 속성을 매직 미사일에 담으면 한동안 무방비 상태가 되는 삼식이었기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안돼!”
그레이스가 급히 부유와 가속으로 발파록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이미 그는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와일드, 그대와의 결투는 잠시 미루지.”
사지를 속박한 채 삼식의 척추를 무릎으로 민 자세 그대로 공동 바닥과 충돌.
충격으로 인해 피어오른 뿌연 연기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받아라.”
휙, 연기 속에서 발파록의 목소리와 함께 둥근 물체가 그레이스의 품으로 날아온다.
엉겁결에 받아든 물체는 희미한 안광이 깜빡이는 삼식의 두개골이었다.
돌곡, 돌고곡.
머리만 무사하면 괜찮다는 삼식의 말에 그레이스는 안도하며 소마의 주먹처럼 삼식의 두개골을 자기 허리에 묶었다.
이를 지켜보던 발파록은 자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의미한 짓을 했구나. 허나, 그것 또한 좋다.”
그는 삼식이 발산하던 마나의 파동이 쇠약해진 것을 인지하고 곧장 그레이스를 향해 도약했다.
몇 주간 보아왔던 익숙한 그림. 발파록이 때리고 그레이스가 막는 구도.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공중전이 추가되었다는 것.
웬만해선 다 지상에서 방어하는 것을 선호하는 그레이스였으나 맞으면 신체 능력이 뭉텅이로 깎이는 발파록의 권능은 어쩔 수 없이 피해야 했고, 그럴 때는 지금처럼 부유를 사용해 거리를 벌렸다.
“도망칠 곳은 없다!”
상대의 육체 능력을 빼앗아 내 것으로 삼는 권능, 기력강탈을 당연히 쓸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회피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발파록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몽의 마굴에서 와일드와 격전을 벌이던 그때보다.
‘지금이 재밌다!’
상대의 호흡, 기세, 눈짓을 통해 수를 읽고 대처하며 대항하는 전투.
자신은 늘 이런 싸움을 갈망해왔다.
비록 상대가 하위종이라 힘에 제한을 두어야 하지만, 상대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으니 이 또한 만족스럽다.
“크흐흐흐.”
다수의 권능을 가져왔는데도 저 방어를 뚫을 수가 없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상위종인 자신조차 육체를 유지할 수 없는 속도로 날아와 꽂히는 일격까지.
“완벽한 나의 대적자로다!”
그리고 발파록은 깨달았다. 자신이 상대의 실력에 도취되어 너무 흥을 냈음을.
눈앞에 다가오는 초음속을 아득히 뛰어넘은 주먹을 발파록은 웃으며 받아들였다.
* * *
남씨 고치화 28일.
다섯공동의 수리가 끝나 두 번째 공동이 개방되었다. 그전까지 자정에 이동되어오는 참가자는 10명 내외였는데 오늘은 30명이 훌쩍 넘었다.
“지역 선택권을 구매하셨다고요?”
공동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놀란 사회자, 브렐레가 가까이 있던 사람을 붙잡고 묻자 그는 다소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상위종과 하위종이 싸우는 거 맞지?”
“예에. 맞긴 한데….”
“어? 잠깐. 당신, 사회 보던 사람 아냐?”
“저를 아십니까?”
“당연하지, 이봐! 여기 이 사람. 사회자야.”
웅성대며 다가오는 사람들.
자신이 유명해졌다는 사실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 브렐레가 케헤헤 웃으며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방금 대충 만든 글씨 나부랭이를 끄적여 줄 때.
방금 자신을 알아본 사람 앞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검은 상자가 튀어나온다.
상자가 낙하함과 동시에 뚜껑이 열렸고 안에서 벌레가 튀어나와 살짝 벌어진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어업? 케흑!”
이제는 익숙해진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브렐레는 비명 대신 환호하는 관중들을 헤치고 나가 중계석에 앉았다.
“늦으셨습니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세팅 중인 나라돌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늦기는.”
첫날 어리벙벙하던 모습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나라돌은 완숙한 해설자처럼 보였다.
“퀸도 왔군요.”
10시 55분.
경기 시작까지 5분. 누가 11시에 하자고 제안한 건 아니었으나 한 달이나 싸우다 보니 암묵적으로 이런 규칙이 생겼다.
“또 고치 앞에 가네요.”
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고치를 올려다보는 그레이스의 모습에서 사회자들과 관중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애틋함?’
오직 전투만을 위해 불필요한 감정을 버렸던 발파록마저 심장 어림이 따끔거릴 정도의 분위기를 흐린 그레이스는 자신의 주먹을 고치에 대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기고 올게요. …너도 지지마.”
위기의 순간마다 능청스러운 남만혁의 얼굴을 떠올리며 극복해온 그레이스였기에 반말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내적 친밀감이 엄청나게 치솟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양 선수는 정각에 맞춰 공동의 중앙에 섰고.
“경기, 시작!”
사회자의 호령과 함께 격돌했다.
이날, 그레이스 멜론은 왼팔을 잃었다.
* * *
고치, 66일.
그레이스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려는 시청자와 관중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걸릴 때마다 발파록은 해당 개입자를 찾아가 목을 날렸다.
행사장 안이건 밖이건 가리지 않고 말이다.
“진정한 전사란 자신의 모든 상태를 초월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 네놈들의 개입은 이 몸의 대적자를 방해하고 있다!”
이는 발파록이 하위종에 대한 상식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었다. 대다수 상위종은 항성이 발산하는 에너지와 물만 공급되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실제로 서몬&케이브 행사가 진행되는 모든 지역에는 항성 에너지, 즉 생존에 필요한 마나와 열, 그리고 물을 언제든지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다섯공동의 경우 이곳, 첫 번째 공동이 그러한 공간이었기에 발파록은 그레이스에게 필요한 에너지 이상이 공급되길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그리 절제한 끝에 강해졌으므로.
그러나 그 절제는 식사를 통해 다양한 영양소를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 그레이스에겐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돌곡….
그레이스가 텅텅 빈 식량 가방을 뒤적이자 삼식이 걱정이 담긴 사념을 보냈다.
“괜찮아.”
괜찮지 않다. 남만혁이 혹시 몰라 대량으로 구해둔 식량도 6일 전에 끝났다.
아끼고 아낀 엘릭서도 어제 하체가 마비되는 증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
메마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려다 흠칫하는 그레이스. 왼팔이 없는 것에 아직 적응을 못 한 것이다.
후.
우와아아!
한숨에 맞추듯 밖에서 들리는 관중들의 환호. 그레이스는 사회자에게 받은 시계를 통해 곧 경기 시간임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 그녀는 습관처럼 남만혁이 갇힌 고치에 다가가 손을 대었다.
“살아서 돌아올게. 너도, 힘내.”
괴로운 속내를 숨긴 채 한동안 고치를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발파록이 기다리고 있는 공동의 중앙을 향해 절뚝대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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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