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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34화 (134/201)

<134화>

The Queen (2)

78일째.

“아!”

“퀸 선수의 다리가!”

시작부터 끈질기게 하체를 노리던 발파록이 기어코 그레이스의 다리 하나를 끝장냈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할 그레이스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발파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강철같은 의지로구나. 과연 나의 대적자로다!”

지상에서의 기동력을 잃은 그레이스는 속수무책으로 밀렸으나 삼식의 매직 미사일을 믿고 필사적으로 시간을 벌었다.

“공중전은 그대에게 불리할 터인데.”

부유로 날아오른 그레이스를 실망 반 흥미 반으로 쳐다보던 발파록은 그녀가 남은 한쪽 손으로 까닥이며 도발하자 웃음을 흘리며 쏘아져 나갔다.

돌…곡….

그레이스가 버티고 삼식이 공격하는 이들의 전술은 삼식의 마나가 고갈되면 끝이 맞이하는 시한부 작전이었고 바로 지금이 그때였다.

미안하다는 사념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고 역소환된 삼식.

내심 조만간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것을 예상한 그레이스였으나 막상 닥치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다시 보세나, 와일드여.”

삼식의 두개골이 사라지자 발파록은 다수의 권능이 실린 주먹을 그레이스를 향해 뻗었고, 폭발과 진동을 비롯해 각종 속성이 담긴 공격이 그녀를 덮쳤다.

쿵, 쿵, 쾅!

그레이스는 거대한 망치에 연속으로 맞는 것처럼 공동의 벽 깊숙이 박혔다.

부서진 벽의 잔해와 함께 그레이스가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던 관중과 사회자는 일시에 숨을 죽였다.

“끝났…, 습니다.”

“예, 이제 저희 목숨을 걱정해야 할 차례군요.”

우우우—

모두가 그레이스의 죽음을 받아들였으나 오직 발파록만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자세를 풀지 않았다.

‘앞의 공격들은 정신을 빼놓기 위한 허초. 마지막 일격만이 대적자의 숨통을 끊기 위한 공격이었거늘.’

아무리 단단한 체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수십 개의 권능을 조합해 만들어낸 이 참파의 술에 당하면 형체가 남지 않아야 정상.

그런데 저리 육체가 멀쩡하다는 건….

“막았다?”

어떻게?

발파록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쓰러진 그레이스에게 다가가자.

스걱.

“음? 이런.”

금빛 섬광이 일순 시야의 끝을 스쳐 지나갔고, 시야가 빙글 돌았다.

목이 잘린 것이다.

바닥을 구르며 자신의 목을 자른 것의 정체를 확인한 발파록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크흐흐, 크르르륵.”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금색 주먹이 둥실 떠 있었다.

* * *

모두가 죽음을 직감했던 결투가 끝난 후.

그레이스는 눈앞에 자리한 금색 주먹을 자신의 왼 주먹이 있던 자리로 옮긴다는 의지를 일으켰다.

그러자 소마의 주먹이 정확히 그곳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무언가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고 사고하자 금주먹이 그대로 행한다. 의지와 행동 간의 차이가 실제 육체를 움직일 때보다 빨랐다.

“…환각이 아니었구나.”

발파록의 마지막 일격이 가해지던 때에 그레이스는 무심결에 왼팔로 막는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벨트에 묶여 있던 금주먹이 반응하더니 그레이스의 의지대로 움직여 공격을 막은 것이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짧은 순간, 그레이스는 이 주먹이 자신의 신체 일부와 다름이 없음을 인지하고 곧바로 가속과 부유를 먹여 발파록의 목을 노리고 날려 보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행한 것임에도 목을 정확하게 가른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으….”

생각을 이어 나가던 그레이스는 한계에 다다른 육체의 피로로 인해 그대로 쓰러졌다.

“승, 승리입니다. 퀸 선수가 발파록을 해치웠습니다!”

“으아아아! 살았다!”

브렐레가 환호하며 관중의 호응을 끌어내는 중, 나라돌은 먼지가 되어 사라져가는 발파록이었던 멧돼지 수인의 다리를 등에 메고 있던 도끼로 잘라냈다.

“휴.”

간신히 약물의 효과가 번지기 전에 끊어내는 데 성공한 나라돌은 도구 몇 개를 꺼내더니 익숙한 손짓으로 고기와 뼈를 분리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몇몇 관중은 역겹다는 표정을 짓다가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훈제까지 하는 나라돌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음식을 먹고 싶으면 포인트로 사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사회자 씨, 그거 먹게요?”

“아뇨, 퀸 선수 드리려고요.”

“아!”

삼식을 통해 그레이스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들은 나라돌이었으나 지금까지 나서지 못한 이유는 대적자에게 뭔가를 제공하면 죽이겠다는 발파록의 선포 때문.

“이봐, 그러다 당신이 죽어.”

고기를 다듬던 나라돌이 칼을 피가 흥건한 도마에 던져 꽂고는 방금 말을 한 관중을 쳐다봤다.

“만약 퀸 선수가 오늘 결투에서 죽었다 쳐봅시다. 그럼 댁도 나도 모조리 묘지 행이었습니다. 이리 죽나 저리 죽나 똑같으면, 나는 최소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할 겁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남은 고기를 써는 나라돌의 모습에 몇몇 사람이 맞는 이야기라며 그를 돕고 나섰다.

“그래, 최근 비실대던 이유가 못 먹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그리고 보니 우리 집 애완인도 음식을 먹여야 활발하게 움직이더라.”

“누가 줬는지만 모르면 되잖아. 다들 손 보태고 같이 모른 척하자고!”

그렇게 나라돌의 주도로 음식이 만들어졌고 얼마 후, 묘한 향기에 이끌려 정신을 차린 그레이스는 자신의 텐트 앞에 차려진 고깃상을 보고 급히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발파록이 그녀의 팔을 뜯어냈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깨어났다. 라고 자각한 지도 벌써 한참 됐다. 시간의 흐름이 명확하지 않지만, 체감상 2달은 넘었다.

중간에 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지 않았다면, 진작에 정신을 놨을지도.

‘더럽게 어둡네.’

빛뿐만 아니라 어떤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가 진공상태라던데,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내 몸이 존재하고 있단 점이다. 그 예로 머리를 더듬으면 마법으로 결합한 그 이름 모를 뿔이 만져진다.

파직.

‘윽.’

다만, 막 새끼를 낳은 암고양이처럼 건드릴 때마다 손가락을 지지는 게 여간 앙칼진 게 아니다.

아무튼 내가 살아 있는 상태가 맞는지 궁금해질 때면 이렇게 뿔을 만져보곤 한다. 고통은 삶의 증거라지 않은가.

‘에휴.’

특성이 발동되면 수련이라도 하겠는데,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아 무료한 시간만이 흘렀다.

…어느 날, 뿔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정확하게는 미약한 통증이다.

뭐랄까, 팔꿈치로 이마를 툭툭 치는 느낌?

신경이 쓰이기는 하나 크게 아프지도, 막을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내버려 뒀다.

…며칠이 지나자 이 통증이 전신으로 번졌다.

퉁, 퉁, 퉁.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이 통증은 어째서인지 무척 익숙한 느낌이었다.

‘심장 박동이랑 비슷하지 않나?’

그걸 자각하자 고통과 뿔의 반항이 사라졌다.

…문득 깨달았다.

‘문제는 나였구나.’

나는 뿔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뿔 역시 나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긴 것이고.

뿔을 중심으로 느껴진 고통은 어쩌면 인제 그만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뿔의 외침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정한다. 상시 뿔을 달고 다니는 것은 아무리 개성적인 각성자 사회라도 나에겐 부담이었다.

외형적인 특징이 뚜렷한 빌런의 검거율은 일반적인 빌런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귀찮게 됐어.’

악마학파의 장로가 쓴 마법서에 의하면 뿔은 탈착이 가능해야 한다.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근본은 ‘소환’마법이니까. 그런데 지금 진행되는 꼴을 보니 탈착은 그른 것 같다.

‘심장.’

뿔은 어느새 내 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

목소리가 나온다.

“크으음. 아아, 오케이. 같이 가자고. 네가 후회하면 했지, 나는 아쉬운 거 없어.”

사실 뿔이 생기면 다크 넥서스로 활동할 때가 문제인데, 생각해보니 외형을 숨긴 채 움직이면 그만이다.

여차하면 선원 중 하나를 대리로 내세워도 되고.

뿔이 짧게 흔들렸다. 웃는 건가.

“음? 오….”

직후 시야 한쪽에 삼인칭 시점으로 고치 속의 내가 보였다.

작다. 태아인가?

꼬물거리던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급속도로 성장했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다시 태어난 건가.”

그러한 과정에서 뿔은 끊임없이 나에게 성장 동력이 되는 마나를 공급하고 있었다.

마나만으로 성장하는 종족? 그거 완전.

“악마잖아.”

나의 불안은 뿔에서 부정적인 사념이 느껴지는 것으로 종식되었다.

“아니라는 거지?”

부르르.

“됐어, 그럼.”

차원을 넘나드는 체질에다 강력한 힘을 보유했다고 알려진 악마종이었으나 태생적으로 온갖 계약에 귀속되는 운명이라고 들었다.

그블린전 준비하기도 바쁜데 뭔가에 얽매여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질색이다.

“슬슬 나가도 되지 않나?”

아직 중학생 정도의 몸이긴 하지만, 바깥이 어떻게 됐을지 걱정되어서 그리 말했더니 뿔에서 엄청난 거절 의사가 느껴졌다.

“멀쩡해 보여도 완성되지 않은 몸이라 지금 나가면 죽는다? 으음.”

내가 낙담하여 침음을 삼키자 뿔이 넌지시 제안을 해왔다. 잠깐이라면 밖을 보여줄 수 있단다.

자기와 결합되기 전에 분리해둔 내 혼을 현실에 박아넣는다는 뭔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길래 손을 내저었다.

“그냥 해.”

쑤욱, 빨려 나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점멸하더니 공동 전체가 발아래로 보였다.

‘응?’

놀랍게도 내 영혼의 외형은 회귀 전의 중년 상태의 몸이었다.

‘내가 이런 수염이었던가?’

턱을 문지르며 오래간만에 까슬까슬한 감각을 느끼는 것도 잠시.

발파록의 공격에 의해 벽에 처박히는 퀸이 보였다.

‘허?’

그게 끝이었다. 밖으로 나왔던 내 혼은 금세 고치 속으로 돌아왔다.

“지금 나가야겠어.”

자세히는 못 봤으나 퀸이 위기인 것은 확실하다.

부르.

“방금 보여준 건 과거라고? 이미 이기고 쉬는 중이다? 확실하지?”

부르르.

녀석을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녀석을 더 강하게 만든다. 걱정되기는 하나, 퀸이라면 이겨낼 것이라 믿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럼 됐어.”

부르르!

“아홉 번째 뿔을 계승한 영혼다운 판단력이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나의 의문에 돌아온 답은, 사후세계를 떠돌던 어느 악마에 대한 긴 이야기였다.

“그게 이 뿔의 본 주인이다?”

부르르르.

뿔의 원주인에 대한 서사는 꽤 흥미로웠으나 내 로망을 자극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뿔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그러면 처음 소환된 뿔은 네가 아니었다는 거네?”

부르르.

뿔이 보내온 사념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후세계의 거물이라 물리는 남자 곁에서 대단한 활약을 한 이 악마는 각 뿔에 속성이 하나씩 담겨 있고, 여섯 번째 뿔은 저주였다고 한다.

그런데 내 저주 반전이 그걸 튕겨냄으로써 역소환되고 아홉 번째 뿔이 소환됐다고 한다.

다 신비롭고 놀라운 이야기였으나 무엇보다 내 체질이 그 대단한 악마의 힘마저 반전시킬 정도라는 게 가장 놀랍다.

하긴, 악마보다 더한 놈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는 했지.

“그래서 네 속성은 뭔데.”

부르, 부르르.

“신성?”

뿔은 그 악마가 종래에 다수의 행성을 거느리는 신이 되었으며, 아홉 번째 뿔은 신의 격에 도달했을 때 생긴 거라 덧붙였다.

뭔 소리야.

“신이고 나발이고, 그블린 조지는 데 도움이 되냐고.”

부르르!

뿔이 치욕스러워하는 감정이 사념으로 넘어온 이후 녀석은 자신이 가진 힘을 하나씩 읊었다.

“오, 그거부터 말했어야지! 우리 사이 애매해질 뻔했잖아. 앞으로 잘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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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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